온건한 성품을 지닌 김개남 휘하의 동학농민군 지도자 ‘남응삼(南應三)’
고려대 연구교수
배항섭
남응삼(南應三, ? ~ ?)은 1894년 전라도 담양, 남원 등지에서 김개남(金開男) 휘하의 접주로서 활동한 동학농민군 지도자이다. 활동 양상이 과격하였던 것으로 알려진 김개남과 달리 비교적 온건한 노선을 유지한 인물이었다.
남응삼이 언제부터 동학에 입도하여 활동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1차 농민혁명 및 집강소 시기에도 문헌자료에서 남응삼의 행적은 잘 보이지 않는다. 집강소 시기에는 김개남을 따라 담양, 남원 등지에 머물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차 농민혁명 시작 직전인 1894년 8월 26일, 김개남은 남원을 점령하고 도회(都會)를 설치하면서 5개의 군영을 세웠다. 남응삼은 그 중 전영(前營) 대장(大將)으로 임명되었다. 각 군영은 5~6천여 명의 농민군으로 편제되었다.
김개남 휘하의 대장이 되어 활약하다
이후 전량관(典糧官)에 임명된 남응삼은 9월 30일에 병력을 이끌고 남원을 떠나 10월 1일에 담양에 도착하여 식량과 군수물자를 조달하였다. 10월 14일 김개남의 대군이 남원을 떠나자 10월 24일 담양을 떠나 남원으로 향하였다. 도중에 태인 오공리 김삼묵(金三默)에게 들려 수천 명의 병력을 합류시켰으며, 25일에는 임실로 내려와 다시 증원한 다음 27일에 유복만, 김경률, 김홍규, 김우칙, 이춘종, 김원석 등과 함께 남원성에 들어갔다.
이때 이들은 새로 깃발과 군복을 만들어 다시 기세를 떨쳐 장차 운봉을 넘어 영남으로 향할 것이라고 큰소리를 치기도 하였지만, 곧바로 저항에 부딪혔다. 11월 14일, 운봉의 박봉양(朴鳳陽)이 이끄는 민보군(民堡軍)이 남응삼, 남원 관노 김원석과 남원 접주 김홍기, 임실 접주 최승우 등이 주축이 되어 남원 부동촌에 둔취하고 있던 동학농민군을 공격하였다. 이때 남응삼은 노비, 무부(巫夫) 등으로 구성된 농민군을 이끌고 응전하였으나,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말았다. 이후 기록에서 남응삼 부대의 활동이 목격되지 않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이들의 활동은 사실상 여기에서 일단락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원군의 밀사, 정석모와의 만남
남응삼의 활동 가운데 흥미로운 것은 김개남이 북상할 때 따라가지 않고 남원에 잔류한 점이다. 이는 남응삼이 활동양상이나 노선 면에서 김개남에게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김개남이 남원에 들어와 5영을 설치하고 위세를 떨칠 무렵, 대원군(大院君)은 농민군 지도자들에게 정석모(鄭石模)라는 유생을 보내 효유하고자 하였다. 전봉준은 밀사 및 서신을 통하여 대원군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는 등 유연한 태도를 보였으나, 김개남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대원군의 뜻을 전하러 온 정석모를 연금하고 곤장 10대를 때려 혼절시키기까지 했다. 죽음 직전까지 갔던 정석모는 남응삼의 배려와 치료로 겨우 살아날 수 있었다. 이때 남응삼은 정석모에게 “이런 고운 소년이 무슨 일로 이런 큰 곤욕을 당한단 말인가? 나는 약한 마음으로 남이 나쁜 일을 당하는 것을 차마 볼 수가 없는 탓에 일찍 와서 위로하지 못하였다”고 하면서 돌보아 주었다. 남응삼은 김개남의 과도한 처벌에 동의하지 않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남응삼은 유생 정석모를 대동하고 다니기 시작하였다. 앞서 언급했듯이 남응삼이 典糧官의 소임을 위해 병력을 이끌고 남원을 떠나 담양에 이를 무렵, 정석모는 그에게 “동도는 아직도 군기가 없어 도처에서 백성들에게 폐해를 끼치고 있다. 그 때문에 민심이 크게 이반되었다. 이는 실로 매우 상서롭지 못한 일이니, 공이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남응삼은 엄한 명령을 내려 작폐를 금하도록 하고 동행한 군사들이 머물고 있는 곳을 특별히 더 단속하였다. 김개남 휘하에 있었지만, 김개남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온건한 노선을 취하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김개남과 결별하여 독자적인 활동을 펼치다
10월 10일경, 남응삼은 사실상 김개남과의 결별을 선언하였다. 김개남은 서울을 향해 북상하기 위해 휘하의 접주들에게 부하들을 이끌고 남원으로 모이라고 지시하였으나, 남응삼은 병을 핑계삼아 남원으로 가지 않았다. 이는 이때 동행하였던 정석모도 만류한 탓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남응삼이 김개남과는 다른 노선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그가 동학농민군 활동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김개남과 행동을 같이 하지 않았을 뿐, 그는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김개남이 남원을 떠난 후 바로 그곳으로 들어와 수천의 농민군을 이끌고 민보군과 접전을 벌였다. 남원 전투 이후 그의 행적은 묘연하나, 이때 전사한 것은 아니었다.
이후 남응삼의 행적에 관하여 정석모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남씨의 소식은 끊어졌었다. 그 뒤 10여년이 지나 일진회(一進會) 일로 전주에 갔었는데, 남씨도 와 있었다. 나는 그의 숙소를 방문하여 차와 먹을것을 갖추어 대접하였다. 이때부터 왕왕 나를 찾아와 요청하는 바가 있으면, 매번 힘을 다해 도모하였다. 은혜를 갚는다고는 생각지 않았으나, 지난 일을 회상하면 실로 저버릴 수가 없었다.
남응삼은 농민전쟁 이후까지 살아남아 전주에 은거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기할 만한 점은 그가 전주에서 일진회와 관련된 활동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그의 노선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분명치 않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