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 북부의 동학농민군 지도자, 성두한
신영우 충북대 명예교수
드러나지 않았던 인물, 성두한
충청도 청풍의 대접주 성두한은 동학농민혁명 연구에서 감춰진 인물이었다. 그의 내력과 활동상을 전해주는 이야기가 찾기 어려웠다. 성두한이 갑오년에 활동한 지역은 청풍으로 나오지만 충주와 제천이 기록되기도 한다. 이름도 성두한(成斗漢)과 성두환(成斗煥)으로 둘이 나와 혼동하게 만든다.
성두한의 활동 무대였던 충주 제천 단양 청풍 4개 군현은 동학 세력이 강력한 권역이었다. 제2세 교주 최시형이 강원도 은거지에서 충청도와 경상도로 조직을 확대해간 지역이라 오래된 동학도가 곳곳에 있었다. 이들이 갑오년에 무장활동을 펴면서 청풍에는 동학농민군의 거점이 만들어졌고, 그 중심인물이 성두환이었다.
성두한은 갑오년 11월에 낸 포고문에서 호서창의대장 성(成)이라고 자신을 밝혔다. “이번 동도(東道)의 창의는 천도를 봉행하여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히 하려는 것이다. 왜적이 창궐하매 국가가 조석으로 위태하고 생령이 도탄에 들게 되었으니 말과 생각이 이에 미치매 통곡조차 할 수 없도다. 슬프다. 저 화친을 여는 적신(賊臣)과 서로 어지럽히는 유도(儒徒)가 외적과 결탁하여 군부를 위태롭고 욕되게 하며 도인을 죽이니 남쪽의 예천과 동쪽의 강릉이 중심이 된지라. 이제 죄를 묻기 위하여 의로운 깃발을 드노라.”
이 포고문은 창의 목적이 보국안민과 반일의병이라고 밝히면서 예천과 강릉의 민보군이 외적과 결탁하여 동학농민군을 해치니 그 죄를 묻기 위해 깃발을 들었다고 했다. 경상도 접경지역과 강원도 일대까지 넓은 영역에서 활동하던 충청도의 동학농민군 지도자는 성두한이 유일했다.
전국에 걸친 전개과정의 파악은 물론 예천지역 사례연구를 했던 필자에게 창의대장 성(成)을 조사하는 것은 중요했다.그리하여 1990년도 초부터 월악산 일대에서 성두한을 수소문하며 다녔다. 4군을 끼고 있는 월악산의 골짜기는 깊었고, 남한강 지류를 따라 형성된 경작지에는 마을이 곳곳에 퍼져 있었다. 하지만 그 후손이나 방손을 아는 사람을 찾아내지 못했다. 현지조사는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갑오년 기록에 나타난 성두한 위상
충청도 북동부에서 성두한의 위상은 대단했다. 갑오년 정월에 청풍의 동학을 대표하는 인물로 손병희 손천민 박인호 차기석 손화중 김개남과 함께 처음 성두한의 이름이 권병덕의 『갑오동학란』에 나온다. 처음부터 갑오년 동학에서 거두의 위상을 갖고 있었다.
성두한은 동학교단의 기포령 이전부터 봉기를 준비했다. 일본군 혼성제9여단 병력이 경복궁을 기습 점령한 6월 21일(음력)에서 한 달이 지나지 않은 7월 중순 청풍 읍내 인근의 성내리에 보루를 쌓고 천여 명을 집결시켰다. 본격적으로 무장활동에 들어간 것이다.
동학 조직이 의병을 자처하는 상황은 예천과 강릉 그리고 보은에서 거의 동시에 나타났다. 양반 유생이 속수무책이었던 때 경상도 북동부와 강원도 중부 일대, 그리고 충청도 동남부에서 동학도들이 나라의 위기에 대응했던 방식이었다.
성두한은 예천의 동학농민군이 8월 말 읍내 민보군과 공방전을 벌였을 때도 관여했다. “관동대접과 상북·용궁·충경·예천·안동·풍기·영천·상주·함창·문경·단양·청풍 등 13명의 접주”가 회합할 때 참여한 것이다.
9월 동학교단이 기포령을 내리자 성두한은 청풍 원서면의 서창을 집결지로 정했다. 월악산과 소백산 주위 4개 군현에서 모인 서창집결군을 이끌었던 두령이 성두한이었다. 이때 충북 집결지는 충주 황산과 청주의 세교·송산, 그리고 진천 구만리 장터와 보은 장내리 등지였다.
충주 서창 집결지가 가장 위태로웠다. 충주 가흥과 연풍 안보의 일본군 병참부와 전신소에 배치된 수비병 때문이었다. 히로시마에서 출발한 일본군 제5사단 주력 부대가 부산과 서울을 잇는 병참망을 통해 북상하고 있었다. 충주 일대의 동학농민군 지도자는 일본군이 지방관에게 강요한 군수물자 수송을 맡는 인부를 모집하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성두한의 활약상은 현지 기록인 『갑오일기』와 도순무영의 『갑오군정실기』가 발굴되면서 일부나마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활동은 주민들의 지지 위에서 가능하였다. 한 청풍 선비는 “일개의 우매한 백성이었는데도 백성들이 모두 그를 존경”했다고 하였다.
일본으로서는 성두한이 큰 두통거리였다. 청국과 국가의 운명을 건 전쟁을 벌이던 일본군의 전신망과 병참망을 위협한 동학농민군 지도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가흥과 안보병참부에 배치된 적은 수비병으로는 어쩔 수 없었다.

▣ 『갑오군정실기』


▣ 충북 제천시 청풍면 학현마을 전 이장과 이이화 선생 ▣ 충청북도 제천시 수산면 적곡리을 찾은 이이화 선생과 필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