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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여름 40호
충청도 북부의 동학농민군 지도자, 성두한

충청도 북부의 동학농민군 지도자, 성두한


신영우 충북대 명예교수


드러나지 않았던 인물, 성두한


  충청도 청풍의 대접주 성두한은 동학농민혁명 연구에서 감춰진 인물이었다. 그의 내력과 활동상을 전해주는 이야기가 찾기 어려웠다. 성두한이 갑오년에 활동한 지역은 청풍으로 나오지만 충주와 제천이 기록되기도 한다. 이름도 성두한(成斗漢)과 성두환(成斗煥)으로 둘이 나와 혼동하게 만든다.


  성두한의 활동 무대였던 충주 제천 단양 청풍 4개 군현은 동학 세력이 강력한 권역이었다. 제2세 교주 최시형이 강원도 은거지에서 충청도와 경상도로 조직을 확대해간 지역이라 오래된 동학도가 곳곳에 있었다. 이들이 갑오년에 무장활동을 펴면서 청풍에는 동학농민군의 거점이 만들어졌고, 그 중심인물이 성두환이었다.


  성두한은 갑오년 11월에 낸 포고문에서 호서창의대장 성(成)이라고 자신을 밝혔다. “이번 동도(東道)의 창의는 천도를 봉행하여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히 하려는 것이다. 왜적이 창궐하매 국가가 조석으로 위태하고 생령이 도탄에 들게 되었으니 말과 생각이 이에 미치매 통곡조차 할 수 없도다. 슬프다. 저 화친을 여는 적신(賊臣)과 서로 어지럽히는 유도(儒徒)가 외적과 결탁하여 군부를 위태롭고 욕되게 하며 도인을 죽이니 남쪽의 예천과 동쪽의 강릉이 중심이 된지라. 이제 죄를 묻기 위하여 의로운 깃발을 드노라.”


  이 포고문은 창의 목적이 보국안민과 반일의병이라고 밝히면서 예천과 강릉의 민보군이 외적과 결탁하여 동학농민군을 해치니 그 죄를 묻기 위해 깃발을 들었다고 했다. 경상도 접경지역과 강원도 일대까지 넓은 영역에서 활동하던 충청도의 동학농민군 지도자는 성두한이 유일했다.


  전국에 걸친 전개과정의 파악은 물론 예천지역 사례연구를 했던 필자에게 창의대장 성(成)을 조사하는 것은 중요했다.그리하여 1990년도 초부터 월악산 일대에서 성두한을 수소문하며 다녔다. 4군을 끼고 있는 월악산의 골짜기는 깊었고, 남한강 지류를 따라 형성된 경작지에는 마을이 곳곳에 퍼져 있었다. 하지만 그 후손이나 방손을 아는 사람을 찾아내지 못했다. 현지조사는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갑오년 기록에 나타난 성두한 위상


  충청도 북동부에서 성두한의 위상은 대단했다. 갑오년 정월에 청풍의 동학을 대표하는 인물로 손병희 손천민 박인호 차기석 손화중 김개남과 함께 처음 성두한의 이름이 권병덕의 『갑오동학란』에 나온다. 처음부터 갑오년 동학에서 거두의 위상을 갖고 있었다.


  성두한은 동학교단의 기포령 이전부터 봉기를 준비했다. 일본군 혼성제9여단 병력이 경복궁을 기습 점령한 6월 21일(음력)에서 한 달이 지나지 않은 7월 중순 청풍 읍내 인근의 성내리에 보루를 쌓고 천여 명을 집결시켰다. 본격적으로 무장활동에 들어간 것이다.


  동학 조직이 의병을 자처하는 상황은 예천과 강릉 그리고 보은에서 거의 동시에 나타났다. 양반 유생이 속수무책이었던 때 경상도 북동부와 강원도 중부 일대, 그리고 충청도 동남부에서 동학도들이 나라의 위기에 대응했던 방식이었다.


  성두한은 예천의 동학농민군이 8월 말 읍내 민보군과 공방전을 벌였을 때도 관여했다. “관동대접과 상북·용궁·충경·예천·안동·풍기·영천·상주·함창·문경·단양·청풍 등 13명의 접주”가 회합할 때 참여한 것이다.


  9월 동학교단이 기포령을 내리자 성두한은 청풍 원서면의 서창을 집결지로 정했다. 월악산과 소백산 주위 4개 군현에서 모인 서창집결군을 이끌었던 두령이 성두한이었다. 이때 충북 집결지는 충주 황산과 청주의 세교·송산, 그리고 진천 구만리 장터와 보은 장내리 등지였다.


  충주 서창 집결지가 가장 위태로웠다. 충주 가흥과 연풍 안보의 일본군 병참부와 전신소에 배치된 수비병 때문이었다. 히로시마에서 출발한 일본군 제5사단 주력 부대가 부산과 서울을 잇는 병참망을 통해 북상하고 있었다. 충주 일대의 동학농민군 지도자는 일본군이 지방관에게 강요한 군수물자 수송을 맡는 인부를 모집하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성두한의 활약상은 현지 기록인 『갑오일기』와 도순무영의 『갑오군정실기』가 발굴되면서 일부나마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활동은 주민들의 지지 위에서 가능하였다. 한 청풍 선비는 “일개의 우매한 백성이었는데도 백성들이 모두 그를 존경”했다고 하였다.


  일본으로서는 성두한이 큰 두통거리였다. 청국과 국가의 운명을 건 전쟁을 벌이던 일본군의 전신망과 병참망을 위협한 동학농민군 지도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가흥과 안보병참부에 배치된 적은 수비병으로는 어쩔 수 없었다.



▣ 『갑오군정실기』

일본군 보급망을 단절시킨 안보병참부 화공
  일본은 조선정부의 허락도 받지 않고 6월부터 부산과 서울 간 전신선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설치된 병참부는 21개나 되었고, 이것이 충청도와 경상도 동학농민군의 1차 공격목표가 되었다. 기포령 직후 경상도 선산과 상주의 동학농민군이 읍성을 점거하고 해평과 낙동병참부를 노렸으나 일본군의 반격을 받아 패산하고 말았다.
  성두한은 9월 27일 새벽 안보병참부를 기습하였다. 안보는 수안보에서 작은 고개 너머 나오는 작은 분지였다. 그믐 직전 2천여 동학농민군이 접근하여 사방에서 화공을 가하였다. 결국 38명의 수비병은 우세한 무기를 활용하지 못했고, 병참부 건물과 전신소가 모두 불타버렸다.
  이 사태는 청일전쟁 동안 일본군이 후방에서 전신망이 공격받은 유일한 사건이었다. 당장 히로시마대본영과 청국 전투 현장의 일본군 제1군사령부 간 통신이 끊어졌다. 모든 전투를 대본영의 육군참모본부와 해군군령부가 지휘하던 근대식 전쟁에 지장이 초래되었다. 야마가타 아리토모 제1군사령관은 즉각 해결하도록 엄명하였고, 전쟁기획자인 가와카미 소로쿠 참모차장은 대대병력을 증파하면서 동학농민군 초멸령을 내렸다.
  성두한은 서창을 기습해온 일본군을 피해 단양을 거쳐 제천을 지나 강원도로 활동지역을 옮겼다. 후비보병 제19대대 동로군이 그 뒤를 추적했으나 오래도록 종적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전국에 걸쳐 동학농민군의 활동이 종식되던 을미년 2월 마침내 사로 잡혀서 서울 감옥소에 갇혀 재판을 받았다.
  판결 선고서는 “충청도 4개 산군(山郡)의 지방에서 무리를 모아 관고의 군물을 약탈하고 민간의 돈과 곡식을 빼앗았으며 관정이나 마을에서 소요”를 일으킨 것이 성두한의 죄라고 했다. 안보병참부 화공으로 일본군이 집요하게 추적했던 사실은 갑오개혁 정부의 판결문에 기재되지 않았다.

이이화 선생과 찾아간 성두한의 청풍 근거지
  2019년 9월 9일 성두한의 자취를 찾아 이이화 선생과 청풍을 갔다. 이 길이 함께 가는 마지막 답사가 되었다. 이이화 선생은 전봉준동상건립위원장으로 2018년 3월 동상을 세운 다음에 3책으로 펴내는 ‘동학농민혁명사’를 매듭짓기 위해 청풍을 찾은 것이다. 전국의 동학 유적지를 다녔지만 성두한 연고지는 처음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 청풍 읍내는 충주호에 잠겨있다. 넓은 호수를 바라보고, 성내리로 들어갔다. 지붕만 함석이나 슬라브로 달라졌을 뿐 산골 마을은 초가집 늘어선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흙담에 기대서 쌓아놓은 장작이 가득하다. 이이화 선생은 이집 저집 나무문짝을 기웃거렸다.
  다음엔 성두한의 사촌 성운환의 거점인 학현 마을로 갔다. 제천 민보군의 보고가 상세하다. “이곳은 청풍에서 가장 험한 곳으로, 네 개의 산이 벽처럼 서 있어서 겨우 한 길로만 통합니다. 밤에 출발한 두 부대가 산 뒤의 석벽을 따라가다 동네 어귀에 들어왔으나 아무도 없었습니다. 20여 리를 더 가니 인가가 40여 호 있고, 순찰하며 지키는 자가 수십 명이었습니다.” 전 이장을 만나 동네 이야기를 들었으나 갑오년 일은 나오지 않았다.
  성두한이 살던 적곡리는 월악산으로 더 내려가 위치한 마을로 지금은 제천 수산리에 속해 있다. 마을회관 옆에선 검붉은 수수열매가 탐스럽게 익어가고 있었다. “얼마 만에 보는 수수밭인가!” 갑오년 함성은 종로 네거리 전봉준 장군의 동상 좌대에 한 구절로 남았다.
  “동학농민군의 함성은 1894년 이 강산을 뒤덮었다. 녹두장군 전봉준이 지휘한 동학농민군은 부패한 벼슬아치를 몰아내고 폐정을 바로잡기 위해 봉기하였다. (동학농민군 지도자 전봉준은) 권설재판소에서 사형 판결을 내린 다음날인 1895년 4월 24일 새벽 2시에 손화중 김덕명 경선 성두한 등 동지들과 함께 교수형을 받았다.” 성두한이란 이름이 검은 돌에 새긴 이 설명문에 들어가 있다.

▣ 충북 제천시 청풍면 학현마을 전 이장과 이이화 선생                                        ▣ 충청북도 제천시 수산면 적곡리을 찾은 이이화 선생과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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