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안 농민군 지도자 김응문과 형제들
연세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왕현종
1894년에는 동학농민전쟁의 열기가 한반도 전역을 휩쓸고 있었다. 당시 진원지였던 호남 서남부 지역 동학농민군의 숨겨진 이야기들은 아직까지도 대부분 밝혀지지 않았다. 무안지역 동학지도자 김응문 일가의 참여 사실은 불과 10년 전에 겨우 알려지기 시작했다.
실제 김응문이란 이름은 1894년 3월말 전봉준이 개최한 백산 호남창의대장소의 참여자 명단에 처음으로 등장한다(오지영, 『동학사(초고본)』, 1926). 무안에서 참여한 지도자로 배규인, 배규찬 등과 함께 이름을 올렸다. 원래 김응문(金應文)은 자로 부르는 이름으로 족보에는 창구(昌九, 1849~1894)였다. 아버지는 김광수(金光綬), 무안군 몽탄면 사창리 차뫼(茶山) 마을에 세거하고 있는 지사였다. 그는 창구 이외에 영구(永九, 효문), 학구(學九, 윤문), 덕구(德九, 자문) 등 4명의 자식을 두었다.
김응문은 어려서 몸집이 컸으며 신의가 있었고 성격이 청백(淸白)하였고, 글도 잘 써서 세간에 중함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호는 다사(茶史)였다. 나주 김씨 가문은 무안에 세거하면서 다양한 집안과 혼맥을 맺고 1887년부터 무안 향교에서 교대로 직임을 맡아 고을 여론을 주도하고 있었다. 응문 형제들이 동학과 언제 연관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1893년 3월 보은 장내리에서 동학 집회가 열렸을 때, 무안접에서 80여명이 참석하였고, 무안 청계면에서 동학 입도자가 증가하였다고 한다.
그는 아들 우신과 효문, 자문 동생들과 함께 농민전쟁에 참여하였다. 3월 15일경 배규인, 송두옥과 더불어 무안에서 봉기를 일으켰으며, 백산 창의소에도 참가하였다. 전봉군 대장이 휘하 농민군을 이끌고 고부, 함평 등지로 순회하다가 4월 19일 무안 사내리에 머물렀다. 이곳에서 전봉준은 양호초토사 홍계훈에게 보국안민을 내세우며 국태공 흥선대원군에게 정치를 맡기자고 주장하였고, 농민군 탄압을 중지하고 감옥에 갇힌 동학교도들을 풀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때 참여 농민군은 이미 7천~8천명으로 불어났다.
이 무렵 무안지역 동학 지도자로 널리 알려진 인물은 배규인이었다. 일명 배상옥이라 하는데, 그는 이미 ‘호남하도거괴(湖南下道巨魁)’라고 하며 무안, 영광, 장흥, 해남, 강진 등지에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김응문은 당시 대접주 배상옥과 친분이 두터워 서로 연계하여 활동을 벌였다. 그는 몽탄면 사창리에 있던 자기 집에 대장간을 설치하여 직접 무기를 만들고 농민군 활동을 위해 군자금을 모았으며, 무안 몽탄면 일대 농민들을 모아 군사 훈련도 시켰다. 5월 9일 무안에서는 농민군 수백명이 모여 돈과 곡식을 약탈하였고, 5월 중순이후 무안 청계면 청천리에 있는 청천재(淸川齋)에는 농민군 집강소가 설치되었다. 이들은 무안 탐관오리를 몰아내고 폐정을 개혁하는 활동을 벌였다고 한다.
9월 2차 봉기에도 무안 농민군 2천여 명이 참여하였다. 또 11월 중순 손화중, 최경선, 나주의 오권선 등이 서해안 남쪽 고을 농민군과 연합하여 나주 관아를 공격하기로 하자, 농민군은 무안 남산에서 진을 친 후 나주 외곽 30여리 지점 작은 냇가에 있던 교통 요지인 고막포와 고막원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고막원 전투에는 배상옥을 비롯하여 일서면 접주 박치상, 몽탄면 접주 김응문과 김효문, 김자문 형제들, 해제면 접주 최장현 삼형제 등이 참여하였다. 이때 농민군은 수성군에 패배하여 함평과 무안지방에 계속 둔취하였으나, 11월 23일과 24일 나주 공방전에서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 당시 전투에 참여한 농민군 숫자는 5~6만 명이나 되었으며, 전투에서 “죽은 시체가 들판을 가득했고 흐르는 피가 냇물을 이루었다”고 하였다.
무안 농민군 수천 명은 대월촌 앞에 모였다가 어쩔 수 없이 해산하였다. 12월 8일 김응문은 함평 엄다리에 몸을 숨겼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심문 도중 모진 고문과 악형으로 죽었다. 또 아들 김여정과 동생 김자문도 다음날 죽임을 당하였다. 동생 김효문도 12월 12일 붙잡혀 죽었다. 김응문의 시신은 무안 관아에서 다시 효수되었고, 후손들이 시신의 머리를 수습하여 선영에 잠시 투장하였다가 백년이 지난 1992년에야 부인 노씨와 합장할 수 있었다. 이처럼 1894년 김응문 일가의 피어린 투쟁기는 불과 몇 해 전 한 권의 책(이이화·배항섭·왕현종,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다-호남 서남부 농민군, 최후의 항쟁』 혜안, 2006)으로 세상에 알려지기는 했지만, 막내동생 김덕구의 잘려진 머리는 선영 아래 애기무덤 속에 한을 지닌 채 쓸쓸히 남아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