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지방의 동학농민혁명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
유바다
상주는 조선 개국 이래 임진왜란 때까지 감영이 소재했던 경상도의 중심지였다. 임진왜란 이후에 감영이 대구로 이전한 뒤에도 상주는 경주 다음가는 위치를 차지했던 고을이었다. 상주 하면 삼백(三白, 쌀, 누에, 곶감)이라 하여 비옥한 토지에 바탕을 둔 풍부한 물산이 나는 곳이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부농층의 성장을 통한 사회 변혁의 움직임이 태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봉건왕조정부는 새로운 시대로의 흐름을 억압하고 있었다. 성장하던 부농층에 대한 약탈적 조세수탈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비단 상주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삼남(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모든 지역에 해당하는 것이었으며, 급기야 1862년 임술민란을 야기하고야 말았다. 봉건왕조정부에 대한 사회변혁세력이 일대 저항을 일으킨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고을 단위에 그친 것이었으며 지역적인 한계와 고립성을 탈피하지 못한 채 실패로 끝났다. 따라서 이들, 즉 봉건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했던 변혁세력들은 ‘동학’이라는 ‘전국적’ 조직과의 연계를 모색하게 되었다.
상주는 동학교단과도 관계가 깊은 지역이었다. 1862년 2대 교조인 해월 최시형이 상주에서 포교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1864년 최제우가 처형당한 이후에도, 최시형은 상주에 머물면서 포교를 전개하였다. 이후 상주는 동학 포교의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되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전초가 되는 교조신원운동이 처음으로 제기된 곳도 바로 상주 왕실마을이었다.
1894년, 전라도지역에서부터 농민혁명이 일어나자 상주에서도 대대적인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화동면, 화북면, 모동면, 공성면 등 상주 각지에서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였다. 무엇보다도 상주는 상공대접주 이관영이 있던 곳으로서 경상도 내륙북부 동학농민혁명의 중심지였다. 따라서 이와 같은 대대적인 봉기가 가능했다. 그중에서도 김현영을 비롯한 김씨가 3형제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이들은 양반이면서도 동학의 평등사상에 동참하는 이들이었다. 따라서 봉건적, 중세적 신분질서의 부정을 통한 새 시대로의 움직임은 반상(班常)을 가리지 않는 거국적인 움직임이었음을 알 수 있다.
1894년 9월 들어 상주 지역의 동학농민군들은 상주 관아를 장악하여 일시적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 승리는 오래 가지 않았다. 이미 같은 해 6월부터 경복궁을 점령하여 조선 침략의 야욕을 보이고 있었던 일본은 일찌감치 상주 부근 낙동에 일본군병참부를 설치하여 서울-부산을 잇는 보급로를 닦고 있었다. 일본군은 낙동 지척에 있던 상주의 동학농민군을 곧바로 몰아내기 시작하였다. 결국 일본군의 막강한 화력 앞에 상주의 동학농민군들은 상주 읍성을 버리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봉건왕조정부는 일본군에 편승하여 동학농민군을 대대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곧바로 이들은 상주에 소모영, 즉 군영을 세웠으며 유격장 김석중으로 하여금 상주 지역의 동학농민군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동학농민군들은 일본군과 연합한 봉건왕조정부의 조직적인 진압작전을 당해낼 수 없었다. 곧바로 읍내, 모동면, 공성면, 화동면, 화서면 등지에서 숱한 동학농민군들이 체포되어 희생당하였다. 결국, 상주 지역의 동학농민군은 1894년 12월 17~18일 보은 북실 전투를 끝으로 대부분 소멸당하고 말았다. 양반으로서 평등사상에 공감하고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하였던 김현영도 이때 전사하였다. 한반도 중부 내륙 지역 최후의 항전에 상주 지역의 동학농민군들도 당당히 참여하여 마지막 피를 흘렸다.
상주는 해월 최시형이 포교를 시작할 때부터 초기 동학포교의 중심지였으며 교조신원운동을 주창한 곳으로서 동학농민혁명의 발상지였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상주 지방의 동학농민군들은 보은 북실 전투에도 대거 참여하여 동학농민혁명의 마지막을 장식하였다. 동학농민혁명의 처음과 끝에 상주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상주동학농민혁명 약사 (略史) 1894 9.18 동학교주 최시형의 기포령 이후 북접의 상주농민군 봉기준비 9.22 농민군 수천명이 상주성을 점령함 9.28 일본군이 상주성을 공격, 농민군 100여명이 학살당하고 패퇴함 9.29 왕조 정부가 영남소모사를 임명함 10.19 민보군을 흡수하여 소모영 설치 10.22~12.2 김석중의 유격병대가 상주, 모동, 화동, 화북, 청산, 용산 등에서 농민군을 색출, 체포하여 처형함 상주농민군은 태평루(21명), 모동장터(6명 이상), 화동(3명), 화령장터(3명), 화남광주원(2명), 평온 (3명 이상), 청산월남점(2명), 청산소사동(2명) 등지에서 처형됨 12.11 용산에서 북접농민군이 상주유격병대와 접전하여 승리함 12.12 남사정에서 농민군 4명 처형됨 12.14 태평루에서 농민군 4명 처형됨 12.18 일본군과 상주유격병대가 보은종곡리, 북실에서 농민군을 살육하여 농민군 완전 괴멸됨 12.22 남사정에서 농민군 10여명 처형됨 12.23 태평루앞에서 농민군 3명 처형됨 1895 1.24 영남 소모영 해체  | 
※참고문헌 - 신영우(申榮祐),·「1894年 嶺南 尙州의 農民軍과 召募營」上·下「東方學志」51,52,1986
- 상주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경상북도 상주동학농민혁명과 현대사로 이어지는 자료집」한일사, 20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