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발행처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56149)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동학로 742

TEL. 063-530-9400 FAX. 063-538-2893

E-mail. 1894@1894.or.kr

COPYRIGHT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FOUNDATION.

ALL RIGHTS RESERVED

목차열기
2025년 가을 61호
1부 동학농민혁명정신은 무엇인가

  1부 동학농민혁명정신은 무엇인가

  동학농민혁명의 현실타개 자세는 역사적 유산


한양대 명예교수

정창렬


  2010년 2월에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특수 법인으로 출범하게 되었다. 그 출범을 뜻깊게 생각하면서 116년전의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그 혁명의 정신은 여러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겠지만, 여기에서는 오늘날의 세계화의 조건 속에서 우리들이 계승해야 할 정신이 무엇인가에 한정하여 생각해 보고자 한다. 즉 세계화의 대세 즉 서양 중심의 세계질서가 온 지구촌을 휩쓸고 있는 상황 속에서, 동학농민혁명이 어떠한 역사적 의의를 가지게 되는지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동학농민혁명이 발생한 19세기 말의 조선도 서양자본주의와 그 문명이 동양에 밀려들어와 동양에 대하여 어떤 대응을 강요하고 있었다. 1860년에 창교된 동학도 서양에의 대응자세를 지니게 되었다. “서양사람들이 天主의 뜻으로 富 와 貴를 취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온 천하를 정복하여 교당을 세우고 그들의 道를 전파하고”(포덕문) “서양은 싸우면 이기고 공격하면 탈취하여 이루지 못하는 일이 없다”(포덕문) “서양 사람은 道를 이루고 德을 이루어서 그들의 造化는 이루지 못하는 일이 없으며 (중략) 이는 그들이 天時를 알고 天命을 받은 것이 아니겠는가”(논학문)라고 하여, 서양이 천시를 알고 천명을 받아서 동양을 정복하고 있다고 인식하였다. 서양 문명의 침투에 대하여 무조건적으로 배척하면서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럴만한 힘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洋學(서학-인용자)은 동학과 비슷한듯 하면서 다르고 한울님에게 비는듯 하면서 알맹이가 없다. 그러나 運은 같고 道도 같은데 理는 같지 않다. (중략) 서양사람들은 한울님을 생각하는듯 하면서 빔(呪)이 없어 道는 허무에 가깝고 학은 천주가 아니니 동학과 서학은 다르다”(논학문)라고 하여, 서양 문명은 理가 허무에 가깝다고 하였다. 최제우는 “洋人이 우리 나라에도 들어와 또 천주당을 세웠다. 내가 마땅히 그들을 소멸하겠다”라고 하면서 陰인 양학=서 학을 陽으로써 제압한다는 뜻으로 東學이라고 하였다. 서학과 서양이 실효적으로 동양을 제패하고 있는 근거가 있음을 인식하고, 그것을 극복함으로써 동학의 세계를 건설하려고 하였다. 


  서학과 서양을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우리라 무슨 팔자 그다지 기험 할고 부하고 귀한 사람 이전 시절 빈천이오 빈하고 천한 사람 오는 시절 부귀로세 天運이 순환하사 지나가고 돌아오지 않음이 없나니”(교훈가) 라고 하여, 지나가고 돌아오지 않음이 없는 천운의 순환 즉 後天開闢에 의하여 빈천자는 부귀하게 된다고 하였다. 그러면 후천개벽 전의 부귀자는 빈천자로 역전되는 것인가. 동학에서는 후천개벽의 시대에는 역전으로서의 단순한 상호위치교환이 아니라 부귀자 빈천자가 모두 함께 同歸一體하는 혁명적 전환이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그 사회가, ‘하늘님의 마음이 너의 마음이다’‘사람 섬기기를 하늘 처럼 하여라’라는 人乃天(사람이 곧 하늘이다- 인용자)의 사회였다. 1894년의 동학농민전쟁에 서도 낡은 양반제도는 농민군들의 실력에 의하여 사실상 붕괴되었다. 동학과 동학농민혁명은 신분차별제도가 없는 인내천의 질서를 구축함으로써 서학과 서양의 질서를 극복하려고 하였다. 


  위에서와 같은 모습은 1894년의 동학농민전쟁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그해 농민군들이 전라도 각지를 접수하면서 정부에 제출한 폐정개혁 요구사항에는 외국상인의 상업활동을 개항장에 국한시킬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외국상인의 상업활동을 무조건적으로, 전면적으로 반대한 것이 아니라, 조약상에 정해진대로 개항장에 국한할 것을 요구한 것이었다. 외국과의 무역이 바람직하다는 것이 아니라 일단 체결된 외국과 의 조약은 지켜져야 하는 것이 국제법적으로 정당한 것임을 농민군이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 전봉준은 재판과정에서 “두번째 起包(봉기-인용자)는 일본 군대가 대궐을 침범했기 때문에 봉기하였다고 했는데 (중략) 외국인으로서 서울에 머물고 있던 자들도 일본군대처럼 몰밀어서 쫓아내려고 하였는가”라는 재판관의 물음에 “그렇지 않다. 일본 외의 각국은 단지 무역만 했을 뿐이고 일본인들은 군대를 이끌고 서울에 머물면서 대궐을 침범했기 때문에 우리나라 영토를 빼앗으려고 한다고 생각했기에 재봉기하였다”(전봉준공초)고 대답하였다. 국가주권을 침탈 하려는 행동만 하지 않는다면 무역은 굳이 반대하지 않는다는 자세였다. 그런데 일본은 무역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국가주권을 침탈하기 때문에 재봉기하였던 것이다. 이에 국가주권을 확고 히 지키고 새로운 사회질서를 수립하는 것은 하나로 결합되는 일이었다. 


  이러한 과제를 전봉준은 어떻게 수행하려고 하였는가. 그가 생각하는 새로운 사회질서의 핵심은 신분제의 폐지와 경작능력을 기준으로 한 토지의 平均分作이었다고 보인다. 그것을 실현하는 정치적 방도는 “몇 사람의 명사가 協合하여 合議法에 의하여 정치를 담당하게”(동경조일신문)하는 정치적 대개혁이었다. 기왕의 봉건적 전제정치를 극복하기 위하여, 아마도 농민군세력, 친일적이지 않은 개화파세력, 대원군계 세력 등이 연합하여 민주적으로 정치를 개혁하려는 구상이었다고 보인다.


  서양중심의 세계질서의 제패를 무조건적으로 배척하지 않고, 그 실효적인 제패를 현실의 것으로서 인정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자체의 낡은 구질서를 민족적으로, 민주적으로 대개혁하려고 하였다고 볼 수 있다. 


  동학농민혁명은 서양의 침략적 진출과 새로운 문명의 침투 속에서, 그것들의 현실적이고도 실효적인 힘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것들에 대한 자기비하나 열등의식 속에서가 아니라, 그것들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질서를, 낡고 잘못된 구래의 자기 질서를 총체적으로 부정하면서, 자신의 전통에 뿌리를 박으면서, 창출하려고 분투하였다. 그 '분투의 전통은' 내외의 조건에 의하여 실패하고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였지만, 그 분투의 전통은 역사 내재적으로 오늘의 우리에게 전승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지금 세계화의 추세 속에서 정신적 방황을 거듭하고, 자기 비하와 서양중심주의에 매몰되어 있는 오늘의 정신적 상황 속에서, 동학농민혁명의 현실타개의 자세는 한번 더 곱씹어볼 만한 역사적 유산이지 않을까 생각된다.



정기구독 신청

발행처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56149)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동학로 742

TEL. 063-530-9400 FAX. 063-538-2893

E-mail. 1894@1894.or.kr

COPYRIGHT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FOUNDATION.

ALL RIGHTS RESERVED

2025년 가을 61호
목차
目次 cont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