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논산지역 동학농민혁명 유적지를 찾아서
명재(윤증) 고택
일본군의 경복궁 무단점령 이후 국내외 정치정세를 살피던 전봉준 장군은 1894년 9월 10일 삼례에 대도소를 설치하고 일본군 축출을 위한 2차 기병을 단행하였다. 이후 북접과의 연합전선 구축을 위해 힘을 기울여 성사시킨 후 10월 중순 경 논산으로 나아갔다. 이때 동학농민군이 노성에 이르렀을 때에 윤증 고택을 잠시 점령하였다. 동학농민군은 이곳에서 식량을 구하고 휴식을 취한 다음 그곳에서 나왔는데, 일부 동학농민군이 집 문간에 방화를 시도하였다. 그러자 노성에 살던 동학농민군이 윤증 집안은 덕망이 있는 집이라고 방화를 만류하면서 불을 껐다고 한다. 이때 문간의 대들보가 그을렸는데, 그 그을린 흔적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명재 고택 전경 |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노성산성길 50 (교촌리 306) 명재 고택 문간 |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 방화에 의해 그을린 자리
충남 논산지역 동학농민혁명 전개양상 –1
전봉준 장군은 제2차 봉기를 위해 1894년 9월 10일(음력) 전북 삼례에서 대도소를 설치하고 농민들을 규합 한 후 논산을 거쳐 공주로 진격하였다. 전봉준 장군 직속의 동학농민군이 북상을 시작하여 논산에 도착한 것은 10월 12일이었다. 전봉준 장군은 논산에서 다시 동학농민군을 초모(招募)하였으며, 삼례에서 북상하는 과정에 모인 동학농민군의 수는 수천 명에 달했다. 논산에서 10월 12일과 16일 사이 북접의 손병희 장군 직속의 동학농민군과 연합전선을 형성하였다. 이곳에서 전봉준 장군은 <양호창의영수>(兩湖倡義領袖)의 명의로 충청감사 박제순 등에게 일본군 축출을 위해 대의를 길에 함께 나설 것을 호소하는 편지와 통문 등을 보냈다. 각 지역의 수령들과 유림에게도 일본군 축출을 위해 봉기에 나설 것을 촉구하였다.
충남 논산지역 동학농민혁명 전개양상 – 2
전봉준 직속의 동학농민군과 손병희 직속의 동학농민군이 연합전선을 형성한 후 동학농민군은 충청감영 소재지 공주를 점령하기 위하여 수많은 크고 작은 전투를 치루면서 공주를 압박하였다. 그러던 1894년 11월 8일과 9일, 우금티에서 맞닥뜨린 동학농민군과 일본군·관군 연합부대는 수십 차례에 거쳐 치열한 공방전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은 일본군의 근대적인 신무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크게 패하고 말았다.
우금티에서 패한 후 11월 12일 노성으로 물러난 전봉준 장군은 다시 진영을 수습하려 하였으나 추격하는 일본군과 관군에게 밀려 논산으로 후퇴하였다. 이 과정에서 김개남 장군과 합류, 논산 소토산(小土山)에 진을 쳤으나 이내 일본군과 관군에게 밀려서 다시 인근 황화대로 후퇴하여 전열을 정비하였다. 1894년 11월 15일 황화대에 벌어졌던 전투에 참가했던 장위영 부영관 이두황이 보고한 내용을 통해 일본군 장교 모리오 가이찌(森尾雅一)의 지시를 받은 관군은 14일 밤 노성을 거쳐 논산으로 들어온 후 관군을 지휘하여 소토산(小土山)의 동학농민군 진지를 빼앗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황화대(황화산성)는 논산시에서 강경으로 나가는 길목, 큰들 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산이다. 들판 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황화대는 그 산정이 평평하여 성(城)과 같은 곳이다. 산 능선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던 동학농민군은 사면에서 공격해오는 일본군과 관군의 공격을 물리치지 못하고 패배하였다. 이후 동학농민군은 여산을 거쳐 전주방향으로 퇴각하였다.
황화대 전투지
충청남도 논산시 등화동 산 2, 강산동 산83 일대
황화대는 우금티에서 패배한 동학농민군이 후퇴하는 과정에서 추격하는 일본군, 관군과 전투를 벌였던 곳이다. 황화대는 논산 서쪽 들판 가운데 우뚝 솟아오른 산으로 강경으로 나아가는 국도변 좌측에 자리하고 있다. 해발 75m의 정상에는 황화산성(봉화산성)이 있는데 백제시대 의자왕이 산성을 축조하고, 그 위에서 잔치를 열었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황화산성은 총 둘레 약 800m 전후의 토성으로 성의 북쪽 정상 부분에 지름 약 10m, 높이 2m 가량의 토석으로 된 조선시대 봉수대 터로 여겨지는 원형의 토벽이 현재까지 남아 있다.


황화대(근경) 황화산성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