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발행처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56149)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동학로 742

TEL. 063-530-9400 FAX. 063-538-2893

E-mail. 1894@1894.or.kr

COPYRIGHT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FOUNDATION.

ALL RIGHTS RESERVED

목차열기
2020년 가을 41호
'동학농민혁명'의 민중적 계보

'동학농민혁명'의 민중적 계보


이영호 인하대학교 명예교수


  동학농민혁명 특별법에 의하면 ‘동학농민혁명’은 “조선 봉건사회의 부정·부패 척결 및 반외세의 기치를 내걸었던 대규모 민중항쟁”으로서 “1894년 1년간 전개된” 사건을 가리킨다. “종래 군·현 단위에서 산발적으로 이루어졌던 항쟁”이 “피지배 계층의 사상적 견해를 반영하고 있던 동학사상과 전국적 조직이던 동학교단을 매개로 광범위한 농민 대중” 즉 “피지배 계층을 중심으로 아래로부터 진행된 민중항쟁”으로 발전한 것이었다고 설명한다.


  ‘동학농민혁명’을 1894년 1년간 전개된 사건이라 했지만 19세기 민중항쟁과 동학의 창도 등 그 배경도 중시하고 있다. 반면 ‘동학농민혁명’ 이후 이를 계승한 변혁운동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동학농민혁명’의 계승에 대한 논의는 아주 부진하다. 최근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서 개최한 3·1운동 100주년 기념 기획특별전에서 그 계승에 대해 관심을 표명하여 반가웠다. 그런데 기획특별전의 제목은 “3·1만세로 이어진 동학농민군의 함성 – 민족대표 33인 중 9인이 동학농민혁명지도자?”로 되어 있었다. 이것을 보면서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은 천도교 민족대표에게 계승되었나 하는 의문을 품었다.


  ‘동학농민혁명’ 이후 변혁운동에 계속 투신한 동학여당(東學餘黨)은 적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동학 남접 손화중의 부하들이 교주 최시형의 반대로 기포하지 못하게 되자 영학당(英學黨)을 결성하여 전북 일원에서 반체제·반외세 보국안민의 기치를 내걸고 봉기한 일이 있었다. 이외에도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여러 흐름들이 있는데, 이러한 동학여당의 변혁운동은 1903~1904년에 이르면 거의 소진되는 것으로 관측된다.


  동학여당의 변혁운동이 소진된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진보회운동이었다. 진보회운동은 1904년 가을 평안도에서 먼저 시작되었지만 동학교단(북접) 소속 이병춘 등이 주도하여 전북과 충남 일원에서도 일어났다. 이후 진보회는 일진회와 통합하여 정치적인 세력으로 발돋움했고, 이미 1901년 일본으로 망명하면서 문명개화노선으로 전환한 동학의 3대 교주 손병희의 정치적 기반이 되었다. 이를 토대로 손병희는 1905년 12월 천도교를 창건할 수 있었다.


  천도교는 합법공간에서 문명개화노선을 취하면서 근대종교로 거듭났다. ‘동학농민혁명’ 및 동학여당의 변혁운동과는 결별했다. 동학의 남접세력이 주도한 ‘동학농민혁명’의 역사는 물론이고, 반외세 봉기에 참여했던 북접교단의 흔적도 천도교의 역사에서 삭제했다. 천도교가 동학의 변혁운동, 농민의 혁명운동을 자신의 전사(前史)로서 부분적으로나마 수용하게 되는 것은 1919년 3·1운동 이후의 일이다.


  3·1운동은 천도교에서 선도하면서 기독교와 연대했다. 천도교는 문명개화노선의 개화파를 대거 수용했고 기독교는 본래적으로 문명개화노선에 있었으니, 민족적 위기 상황에서 노선상 연대가 가능했다. 천도교와 기독교의 선창에 의해 3·1운동은 전 민족적 범위로, 전국 대부분의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운동의 주체 측면에서 볼 때 초기에는 종교인들이 앞장섰으나 후기로 가면서 학생·지식인·노동자·농민 등이 압도적으로 참여하고 주도했으며, 장소성의 측면에서 볼 때 초기에는 서북지방에서 많이 일어났지만 후기에는 남부지방 곳곳에서도 일어났다.


  단재 신채호는 3·1운동에서 근대사회의 주체로서의 ‘민중’이 출현했다고 평가했지만, 그 기원은 19세기 농민항쟁과 ‘동학농민혁명’으로까지 소급할 수 있다.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은 동학여당의 변혁운동 등을 거쳐 3·1운동의 민중층에서 역동적으로 분출했다. ‘동학농민혁명’과 3·1운동 사이에는 여러 계열과 노선의 민중운동이 전개되었으나 아직 발굴되지 못한 채 잠복되어 있다. ‘동학농민혁명’과 3·1운동의 계승성을 논의하기 위해서는 그 민중적 계보의 발굴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영호(李榮昊, Lee Young-ho) : 인하대학교 명예교수.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사학과에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한국역사연구회 회장을 역임했다. 한국 근대의 사회경제사, 민중운동사, 지역사 분야에서 연구했다. 저서로 『한국근대 지세제도와 농민운동』(2001, 서울대학교출판부), 『동학과 농민전쟁』(2004, 혜안), 『개항도시 제물포』(2017, 민속원), 『근대전환기 토지정책과 토지조사』(2018,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토지소유의 장기변동』(2018, 경인문화사), 『동학·천도교와 기독교의 갈등과 연대, 1893~1919』(2020, 푸른역사)가 있다.



정기구독 신청

발행처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56149)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동학로 742

TEL. 063-530-9400 FAX. 063-538-2893

E-mail. 1894@1894.or.kr

COPYRIGHT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FOUNDATION.

ALL RIGHTS RESERVED

2025년 겨울 62호
목차
目次 cont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