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예천지역 동학농민혁명 유적지를 찾아서
문병학 | 기념재단 기념사업부장
경상도 북서부(예천)지역의 동학농민혁명(1)
예천지역에서 동학세력의 조직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최맹순(崔孟淳)이 1894년 3월 소야(蘇野)에 접소(接所)를 설치하고, 관동수접주(關東首接主)가 되어 활동을 시작한 때로 볼 수 있다. 활동범위가 3도(경상·충청·강원)에 걸쳐있었던 최맹순은 1894년 6~7월 사이 날마다 수천 명의 교도가 입교했다고 전해질 정도로 그 활동이 대단하였다. 실제로 그의 휘하에 48개접 7만여 명에 이르는 거대한 조직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천지역에서 농민군 활동의 표면화는 1894년 7월부터인데, 이는 호남에서 동학농민군이 전주성 점령하고, 전라도 각 지역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폐정개혁을 실천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경상도 지역에서도 반부패 활동이 크게 고무된 것과 관련이 깊다. 또한 1894년 5월 조선에 출병한 일본군이 청나라와 전쟁을 치루기 위해 부산에서 서울에 이르는 구간에 병참부를 설치하고 전선을 가설하면서 경상도 북서부지역 농민들과 충돌이 빚어지면서 반일감정이 고조된 것과도 관련이 깊다.
실제로 일본군은 청나라와 전쟁을 결정한 대본영의 지시에 따라 1894년 6월 21일(음력) 경복궁을 무단점령한 후 서해(西海) 풍도에 정박 중이던 청나라의 북양함대를 공격하는 한편 부산 동래에서 서울에 이르는 요충지에 병참부 설치와 전선(電線) 가설에 박차를 가했다. 하여 1894년 7월에는 부산 동래를 비롯하여 구포, 삼랑진, 물금포, 밀양, 청도, 대구, 다부역, 낙동, 해평, 태봉, 문경 등에 일본군 병참부가 설치되었다.
예천관아 객사
경상북도 예천군 예천읍 노상리 1-1번지
예천관아와 객사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민보군의 보수집강소로 사용되었다. 객사(건평 3,97㎡)는 원래 예천읍 서본리 현 예천초등학교 자리에 있던 것을 1922년에 설립한 대창학원의 원장 김석희(金碩熙)가 1927년 3월 현재의 장소로 이설(移設)하였다. 현재 대창중·고등학교 교장실과 행정실, 인쇄실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예천 객사(전경)
예천 금당실 마을과 송림(松林)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 668-1, 665-1, 640, 622-1, 620-1, 545-1번지
예천 금당실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예천 동학농민군의 근거지 가운데 하나이며, 송림(松林)은 농민군과 관군 및 민보군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던 전투지이다. 이곳 송림은 현재 천연기념물 제469호로 지정·보존되고 있다.

예천 금당실 마을 입구 표지석
경상도 북서부(예천)지역의 동학농민혁명(2)
전라도에서 지방권력을 장악한 상태로 강력하게 폐정개혁을 단행한 것과 달리 경상도 지역에서는 읍치 외곽의 농민군 거점을 중심으로 활동이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경상도 북서부지역은 읍을 중심으로 이서배와 양반지주층이 보수집강소를 중심으로 반농민군을 조직하고 강력한 활동을 펼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1894년 여름으로 접어들면서 경상도 북서부지역에서 농민군이 봉기하자 대구에 소재한 경상감영에서 관군을 파견하기도 했지만, 이보다는 이 지역의 이서배․양반지주층으로 구성된 보수집강소의 민보군과 정부에서 임명한 소모사(召募使)가 모집한 소모영군 등이 반농민군 활동의 중심이었다.
전라도 지역과 마찬가지로 이 지역에서도 1894년 여름으로 접어들면서 농민군 활동이 급격하게 확산되었으나 보수양반층과 보수적 향촌질서가 강한데다 북접의 영향을 받은 농민군이 읍치 대한 공격을 유보함에 따라 전라도 지역에서처럼 강력한 개혁활동이 펼쳐지지는 못하였다.
이렇듯 이 지역에서는 동학농민군과 보수집강소의 민보군 어느 한 쪽도 압도적인 우세를 보이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8월 10일 새벽 예천 보수집강소의 민보군이 예천읍 동쪽으로 50리가량 떨어진 안동과 김천까지 쳐들어가 농민군 11명을 체포한 후 예천으로 돌아와 내성천변 모래밭에 생매장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또한 9월 초순 성주(星州)에서 개혁활동을 벌이던 동학농민군이 수성군의 공격을 받아 18명이 살해되었다. 그러자 9월 4일경 경상도 북서부지역의 동학농민군이 연합하여 성주읍을 공격하였고, 이때 이서배의 집과 민가 1,000여 호를 불태운 참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나아가 1894년 9월 18일 동학 교단에서 전국 대동원령이 내려진 후 상주(尙州)․김산(金山)․선산(善山)․개령(開寧) 등에서 동학농민군도 관군․민보군 사이에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예천 금당실 함양박씨 유계소(儒稧所)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 333, 334번지
함양박씨 유계소(儒稧所)는 예천의 양반 문중인 함양박씨의 유생이 모여 문중의 일을 논의하거나 경전을 강론하던 곳이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동학농민군이 이 건물을 빼앗아 도소를 설치하고 ‘금곡포덕소(金谷布德所)’라 불렀다. 건물은 동학농민혁명 기간 중에 불타버렸으나 이후 함양박씨 문중에서 복원되어 ‘경담재(鏡潭齋)’라는 현판을 걸었다.

예천 함양박씨 유계소(경담재 전경)
예천 동학농민군 생매장 터
경상북도 예천군 예천읍 동본리 479번지
1894년 8월 10일 새벽 예천읍 동쪽으로 50리 정도 떨어진 안동과 김천까지 쳐들어간 예천 보수집강소의 민보군이 동학농민군 11명을 체포한 후 예천으로 돌아온 후 생포한 농민군 열한 명을 모래밭에 생매장하였다. 이런 사실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경상도 예천의 유학(儒學) 반재원(潘在元)이 예천군에 집강소를 마련하고 해체하기까지 그 활동상을 일기형식으로 기록한 「갑오척사록」(甲午斥邪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894년 보수집강소 민보군에 의해 농민군이 생매장된 장소가 공설운동장 뒤편일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 정확한 장소는 아직 확인하지 못하였다. 이에 1999년 예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에서 예천공설운동장 앞 천변에 ‘동학농민군생매장터’라는 비를 세웠다.

예천 동학농민군 생매장 터 비석(碑石) 앞면
예천 한천제방과 서장자들
경상북도 예천군 예천읍 서본리 83, 85-2, 86-1 일대(서장자들) / 14, 70-11 일대(현산) / 103, 104 일대(유정)
한천제방과 서장자들은 1894년 8월 28일 밤 예천지역(화지)의 동학농민군과 보수집강소의 민보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갑오척사록」에 “부병(예천 민보군)들이 서정(西亭)의 긴 제방을 에워싸고 양면에서 협공을 하였다.”고 전투상황을 전하고 있다. 예천읍내 공격을 처음으로 시도한 것은 예천읍 서쪽 화지의 농민군이었다. 농민군의 예천공격에 대비하여 한천제방 위에 진을 치고 있던 보수집강소의 민보군들이 서정(西亭)의 긴 제방을 에워싸고 양면에서 농민군을 협공하였다. 전투상황은 “총탄이 떨어지는 숲속에서는 나뭇가지와 나뭇잎이 어지럽게 땅으로 떨어졌으며, 검은 연기가 하늘에 가득 차서 적과 아군이 구분이 되지 않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때 민보군 측의 사주를 받은 유적 남쪽의 청복동 주민들이 산 위에 횃불을 설치, 군대가 있는 것으로 위장한 채 큰소리로 “안동의 구원병 3천여 명이 왔다. 너희 적도들이 어디로 달아나겠는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이에 당황한 농민군이 예천 동남쪽 서장자들로 퇴각하였고, 민보군이 그 뒤를 추격하여 수많은 농민군이 오지(汚池)에 빠져죽거나 민보군의 창검에 희생되었다.

예천 한천제방과 서장자들
예천 금당실 전기항의사 추모비와 묘소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 산 31번지
1894년 6, 7월 도소가 설치된 예천지역 동학농민군은 8월로 접어들면서 조직이 완비된 것으로 보인다. 예천에서 활동한 농민군 지도자로는 금당실에 들어와 도소를 설치한 접주 권경함(權景咸)과 그가 함양박씨 유계소(儒稧所) 건물을 빼앗아 ‘금곡포덕소’를 세우고 그곳의 접주로 삼은 권순문(權順文) 등을 들 수 있다. 여기에 중심적인 활동을 한 인물로 거론되는데 사람이 전기항(全基恒)이다. 전기항은 농민군의 “모량도감(募糧都監)”이라는 직책으로 금곡의 농민군은 물론이고 경상도 북부 일대 농민군의 군량을 책임졌던 것으로 보인다. 전기항의 고손자(高孫子) 전장홍 씨는 “고조부님 풍채가 워낙에 좋아 돼지의 한문 표기 ‘전 도야지(刀也只)’로 불렸다고 한다.”는 것과 “고조부님은 천석꾼으로 불릴 정도로 부농이었으나 동학농민혁명 당시 군비 마련을 위해 재산을 다 끌어다 쓴 바람에 동학농민혁명 이후 집안에 무쇠솥 하나 밖에 남지 남았다”고 집안에서 전해져오는 얘기를 전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전기항의 넋을 기리고 그 정신을 계승하기 위하여 1996년 예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에서 전기항의 묘소 앞에 ‘동학농민혁명지도자 전기항의사추모비’를 세웠다.

동학농민군지도자 전기항의사 묘소
예천읍을 둘러싼 동학농민군과 보수집강소 민보군의 공방전
1894년 여름으로 들어서면서 예천읍 외곽지역 곳곳에 동학농민군 도소가 설치되었고, 곳곳에서 신분질서를 무너뜨리거나 악덕 지주나 토호를 벌하는 등 폐정을 개혁해나갔다. 또한 농민군 자체적으로 검찰관(檢察官) 혹은 안렴사를 두어 예천, 풍기 등 각 지역을 순회하며 폐정개혁 활동을 조정하거나 감찰하였다. 이 과정에서 1894년 7월 5일(음력) 농민군 수십 명이 예천읍으로 들어가서 전 영장(前 營將) 이유태(李裕泰)를 끌어내서 결박·구타하고 돈을 탈취하였다. 같은 달 7일에는 읍리(邑吏) 황준대(黃俊大)의 동생집 무덤을 파헤쳤으며, 9일에는 읍의 벼슬아치 김병운(金炳運)을 끌어내 구타하고 그의 아버지 무덤을 파헤쳤다. 또한 15일에는 우음동(于音洞) 접주 박래헌(朴來憲)이 수십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경진가점(京津街店)에서 안동부사 일행을 공격하고 행장을 빼앗는 등 활동을 본격화하였다.
이처럼 동학농민군 활동이 활발해지자 7월 24일 예천읍의 관리들은 객사에 모여 대책을 논의하였다. 논의 이튿날인 25일 예천군수가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고 군의 창고에 있는 무기로 부민(部民)들을 무장시켰으며, 26일에는 집강(執綱)·총독(摠督)·도감(都監) 등 70여 명의 간부를 정하고 객사에서 보수집강소 업무를 시작하였다. 보수집강소는 8월초 예천읍과 읍 밖에서 1천 5백여 명의 민보군을 모집하여 무장을 완료하였다. 이에 농민군은 8월 2일 사방의 통로를 막아 예천읍을 봉쇄하면서 보수집강소를 압박하였다. 그러던 8월 10일 새벽 예천의 민보군이 농민군 11명을 체포하여 모래밭에 생매장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분노한 농민군은 예천읍 봉쇄를 강화하면서 보수집강소 측에 책임자 문책을 요구하였다. 긴박한 대치국면이 이어지던 8월 20일경 농민군은 경상도뿐만 아니라 충청도·강원도의 각 접소에 예천 공격을 위해 집결하라고 연락하였다. 이렇게 하여 상북·용궁·충경·예천·안동·풍기·영천·상주·함창·문경·단양·청풍 등 13명의 접주들이 상주 산양(山陽)과 예천의 금곡과 화지(花枝) 등지에 모여 대회를 열었다. 이어서 농민군은 북쪽의 금곡·은풍(殷豊)·송정(松亭)을 막고, 동쪽의 도평(島坪)·감천(甘泉)·석관(石串)을 차단한 채 남쪽의 직곡(稷谷, 피실)과 서쪽의 화지 등을 장악하고 예천읍을 포위하고 보수집강소 측에 농민군을 생매장한 책임자를 압송하라는 통문을 보냈다. 이런 움직임에 파악한 예천의 보수집강소는 21일 안동부도총소(安東府都摠所)에 구원병을 요청하는 한편 23일에는 보수집강소의 민병 300여 명을 앞세워 화지의 농민군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윤치문(尹致文)이 이끄는 예천의 농민군과 안동과 의성이 합세한 농민군의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보수집강소의 민보군이 화지의 농민군을 공격했다가 물러났다는 소식을 접한 관동대접주 최맹순은 8월 24일 예천을 공격하기 위하여 휘하 각 접에 사통을 보냈고, 이튿날인 25일 농민군 수천 명이 용궁면을 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는 등 예천읍내 보수집강소를 위기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8월 27~28일 상황이 역전되었다. 농민군이 예천을 공격할 것을 대비하여 보수집강소에서는 8월 27일 총수(銃手) 100여 명을 징발하여 현산(峴山) 옆 골짜기에 잠복시켰다. 이어 28일 오후 농민군 1만여 명이 한천 남쪽의 유정(柳汀)으로 들어가 진지를 구축하였다가 밤이 되자 공격을 시작하여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으나 농민군이 크게 패하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8월 29일 안동에서 구원병 3,500여 명이 예천으로 들어와 보수집강소에 합류하였고, 통역·화병(火兵) 10명 등을 대동한 일본군 53명도 예천으로 들어와 합류하였다. 이후 일본군과 보수집강소의 민보군 연합부대의 공격에 농민군은 상주와 충청도 단양과 제천 등지로 밀려났다.
참고자료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9) -「소모사실」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3) -「갑오척사록」「토비대략」「소모일기」
『다시 피는 녹두꽃 -동학농민군후손증언록』, 역사문제연구소, 역사비평사, 1994.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및 기념시설물 현황조사』,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20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