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서천, 한산지역 동학농민혁명 유적지를 찾아서
문병학 기념재단 기념사업부장

서천관아 터 위성사진
충청도, 서천과 한산지역 동학농민혁명 전개양상
충청지역 동학농민군의 활동 양상은 복합적이다. 전라도와 맞닿은 곳 중의 하나인 금산, 진산, 논산 등지에서는 일찍이 무장기포 이전부터 활동이 시작되었으며, 전라도와 맞닿은 또 다른 지역인 서천과 한산은 6월부터 접소(接所)가 설치되었다. 그런가 하면 동학교단 지도부가 주재(駐在)했던 충청도 내륙지역 보은과 옥천은 상대적으로 종교적 지향성을 강하게 보였다. 한편, 청나라와 일본 양국 군대가 진출한 통로이자 청일전쟁 전장(戰場)이었던 충청도 내포지역(서해안지역)은 척왜의 정서가 강하게 형성되었다. 나아가 논산과 공주는 이른바 남접과 북접 동학농민군이 연합부대를 형성하여 충청감영으로 진격하다가 공주 우금티에서 일본군과 관군을 맞아 치열하게 격전(激戰)을 벌인 곳이다.
충청지역의 동학농민군 활동은 1894년 9월 18일 동학교단에서 발한 ‘기포령’(起包令) 이후였으나 전라도와 접해있던 서천과 한산은 1894년 6월부터 접소가 설치되었고, 7월에는 무장한 동학농민군 57명이 한산 방향에서 서천으로 쳐들어와 관아를 점령한 일도 있었다. 나아가 9월경에는 금강을 건너 임천과 입포 등지에서 들어온 전라도 농민군과 서천의 동학농민군이 연합하여 관군과 맞섰고, 이들은 11월 말까지 끈질기게 저항하였다.
서천관아
충청남도 서천군 서천읍 군사리 356-3

서천관아 터에 들어선 서천군청
충남도 서천지역에 동학(東學)이 전파된 시기는 1880년대 후반으로 추정된다. 비교적 이른 시기에 동학이 전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제1차 봉기 때 서천지역의 동학농민군 활동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 까닭은 서천의 동학 지도자들이 봉기를 반대하는 북접(北接), 이른바 동학교단의 지휘를 받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6월 하순으로 접어들면서부터 전라도와 충청도 인접지역들에서 동학농민군의 활동이 표면화하면서 서천지역의 상황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1894년 6월 29일 인접한 전라도 함열과 성당(聖堂)으로부터 수십 명의 동학농민군이 무장하고 임천에 들어와 ‘국가를 위하고 백성을 안정시킨다.’(爲國安民)는 구호 아래 마을을 순찰하면서 총과 마필을 빼앗고, 궁민(窮民)을 구호한다고 부자들에게 돈과 재산을 빼앗았다. 그리고 7월 6일 동학농민군은 정산에서 진사 조창하를 살해하였고, 7월 7일 서천과 청양 등지에서 봉기하였다. 또한, 7월 9일 무장한 동학농민군 57명이 한산 방면에서 서천으로 쳐들어와 관아를 점령하였다.
서천을 점령한 이들은 "우리는 전라도 부안(扶安) 동학인이다. 전라도 연해에 정박해 있는 일본선박이 기백척이나 되며, 전라도 일도(一道)가 놀라고 있다. 계엄하지 않을 수 없으나, 부족한 것이 마필과 군기이다”라고 말하면서 총과 마필, 화약, 철환 등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이방과 수성포수대장을 협박하여 총 6자루와 화약 3근, 철환 1백 개, 창 2자루 노새 2필, 말 1필을 빼앗았다.
동학농민혁명 1차 봉기 때 서천과 한산지역에서는 비교적 단발적인 사건들은 이어졌으나 본격적인 봉기는 없었다. 그러다가 9월 18일 북접교단으로부터 기포령이 내려진 후 늦은 가을로 접어들면서 동학농민군 활동이 적극화하였다. 11월 5일 한산 상지포(上之浦)에 주둔해 있던 동학농민군은 유회군의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곧바로 호남지역 농민군의 도움을 받아 11월 19일 한산읍성을 함락시켰다. 한산읍성을 함락한 동학농민군은 전략적 요충지인 화양산으로 진을 옮겨 주둔하다가 11월 20일 관군이 서천읍성에서 철수하자 곧바로 서천읍성을 공격하였다.
서천읍성에 들어 온 동학농민군이 민가를 불태우고, 관아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군기고의 화약이 터져 서천관아가 잿더미로 변하였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서천군수는 경군(京軍)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20일 오후 한산으로부터 경군이 들어와 동학농민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이 패배하여 사방으로 흩어졌다. 패배한 동학농민군 몇 천 명은 서천의 삼수동(三水洞) 뒤 언덕에 주둔하였고, 또 몇 천 명은 남쪽연로와 포구 등지에 주둔하였다. 그 다음날 21일 관군은 서천 북쪽에 포진한 동학농민군을 공격하였고, 동학농민군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한산관아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지현리 249~3, 248~3

한산관아 터 위성사진
한산관아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에게 두 차례나 점령되었다. 동학농민혁명 1차 봉기 당시 한산지역의 동학농민군 활동은 두드러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1894년 가을 동학교단으로부터 기포령이 내려진 이후 동학농민군이 활동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11월 5일 한산 상지포(上之浦)에 주둔하고 있던 동학농민군은 유회군의 공격으로 흩어졌으나 이내 전라도 농민군의 도움을 받아 19일에는 한산읍성을 함락시키고, 화양산으로 이동하여 주둔하였다. 20일 정오 무렵 한산에 도착한 관군의 기록에 따르면 동학농민군이 점령한 이후 한산관아는 동학농민군의 방화로 성안의 모든 인가가 모두 불에 탔고, 각 처의 관아 건물도 벽만 남아 있을 지경이라고 전하고 있다. 한산은 이후에도 전라도 함열과 웅포 지역의 동학농민군에게 점령되어 불에 타는 피해를 입었다.

한산관아 터에 들어선 한산면사무소
화양산 전투지
충청남도 서천군 화양면 금당리 산23-1, 산29-1 일대

화양산전투지 위성사진
화양산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한산과 서천지역 동학농민군이 주둔했던 곳이다. 화산면 금당리와 기산면 화산리 사이에 있는 해발 100m 가량의 화양산은 방어에는 유리한 지형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또한, 서천평야 한쪽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사방을 감시하고 통제하기에도 유리한 곳이었다.
11월 18일부터 서천에서 들어온 관군과 이 지역의 유회군은 한산 두문동에 진을 치고 있다가 19일 화양산에 주둔하고 있던 동학농민군을 공격하였다. 이 과정에서 관군 1명이 전사하는 등 전세가 불리해지자 관군과 유회군은 후퇴하였다. 이틈을 이용해 화양산에서 내려온 동학농민군은 두문동 5개 마을에 불을 질러 관군과 유회군을 몰아붙였다. 그 다음 날인 관군이 서천읍성에서 완전히 철수하였다. 이에 동학농민군은 바로 서천읍성을 공격하여 민가를 불태우고 관아에 쳐들어가 화약을 터트려 모든 관아를 잿더미로 변하였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서천군수는 경군에게 지원을 요청하였고, 20일 오후 한산을 출발하여 서천에 도착한 경군은 동학농민군을 후미에서 공격하였다. 이 전투에서 패한 동학농민군들은 사방으로 흩어졌고, 그 다음 날에도 관군은 동학농민군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였다.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내고 크게 패배한 동학농민군은 사방으로 도주하였다.


화양산전투지(원경) 금당리에서 바라본 화양산
참고자료
- 「巡撫先鋒陳謄綠」,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2』, 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2008.
- 「錦藩集略」,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3』, 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2008.
- 「洪陽紀事」,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3』, 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2008.
- 「兩湖右先鎽日記」,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7』,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2010.
-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및 기념시설물 현황조사』,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20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