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안군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김응문 일가(一家) 유골 발굴


▣김응문의 유골 ▣김자문의 유골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전라도 무안군 몽탄면에서 동학 접주로 활동했던 김응문 일가의 유골이 지난 4월 28일과 5월 24일 무안군 몽탄면 다산리 용매마을과 무안군 청계면 월선리 월구정 묘에 각각 발굴되었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김응문(金應文 1849~1894)은 나주와 무안지역 향교에서 중요 직책을 맡을 정도로 뼈대 있는 향반(鄕班) 출신으로, 그의 일가는 먹고사는 문제에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다. 하지만 비정상적인 세도정치 등에 따라 사회적으로 만연한 부정부패 척결의 필요성에 적극적으로 공감하여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 이후 생가(生家)인 무안군 다산리 차뫼마을 뒤 대밭에 대장간을 만들어 병기를 제조하는 한편 군자금을 모아 동학농민군을 훈련시켰다고 한다. 또한, 김응문의 둘째 아우 김효문(金孝文, 1851~1894)과 막내(넷째) 아우 김자문(金子文, 1868~1894), 김응문의 큰아들 김여정(金汝正, 1867~1894)도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여 참여하였다. 이들은 1984년 11월 18일 고막포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패배하여 김응문의 장남 김여정의 처가(妻家)가 있는 함평에 숨었다가 체포되어 1894년 12월 8일 김응문과 김자문, 김여정이 무안관아에서 참수되었고, 나흘 뒤인 12월 12일에 다른 곳에 피신해있던 김효문도 붙잡혀 처형되었다. 처형된 후 시신을 수습하지는 못하였으나 김응문의 집안이 향반으로서 지역에서 덕을 쌓고 살았던 터여서 김응문의 머리만을 거두어 월구정 둔덕에 작은 무덤을 만들어 투장(偸葬)하였고, 막내 동생인 김자문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김응문 묘 바로 밑에 투장되었다. 둘째동생인 김효문은 무안군 몽탄면 사천리, 김응문의 장남인 김여정은 무안읍에 묘를 조성하였다.
그렇게 102년이 지난 1996년 김응문 일가의 후손들은 김응문과 그의 부인 함평노씨를 합장(合葬)하고자 파묘하였다가 옹기항아리에 남아 있는 유골(머리)이 확인되어 파묘를 중단하고 다시 매장하였다. 이후 23년 후인 2019년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이 제정되는 등 사회적 분위기가 전환되자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김응문 일가의 합동 묘역을 조성하기 위해 2021년 4월 28일 파묘하여 참여자 김응문의 머리 부분이 기왓장에 덮인 채 발굴되었고, 참여자 김효문의 머리 부분이 거의 산화된 상태였으며, 김여정의 유골은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음을 확인하였다. 이후 5월 25일 2차 파묘를 추진한 결과 참여자 김자문의 머리가 산화하지 않고 온전한 상태로 발굴되었다. 이처럼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로 확인된 사람의 유골이 온전한 형태로 발굴된 것은 매우 특별하다. 그동안 발견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골은 1995년 일본 북해도대학에서 발견되어 1996년 국내로 봉환된 후 2019년 조성된 녹두관(전주시 완산구 완산동)에 모셔진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무명의 동학농민군 지도자 유골이 유일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