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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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여름 48호
민족자존과 인권을 위한 투쟁

민족자존과 인권을 위한 투쟁

- 동학농민혁명과 4·3의 역사적 의미 -


고희범 4·3평화재단 이사장 


  “우리가 의(義)를 들어 이에 이른 것은 그 뜻이 다른 데 있지 아니하고 창생을 도탄 가운데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의 위에다 두고자 함이라.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내쫓고자 함이라."


“친애하는 경찰관들이여! 탄압이면 항쟁이다. 당신들은 누구를 위하여 싸우는가? 당신들의 부모형제들에게 총부리를 돌리지 말라.” “시민 동포들이여! 경애하는 부모 형제들이여! ‘4·3’ 오늘은 매국 단선단정을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조국의 통일독립과 완전한 민족해방을 위하여! 우리들은 무기를 들고 궐기하였습니다.”


  맨 위는 1894년 3월 20일 호남의 들녘에 메아리친 동학농민혁명의 창의문이요, 아래는 그로부터 54년 뒤인 1948년 4월 3일 제주도 인민유격대가 경찰과 도민들에게 보내는 호소문이다. 동학농민혁명의 기치는 ‘보국안민’이었다. 외적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탐학한 관리들을 응징함으로써 고통 받는 백성을 구하기 위해 동학농민들이 일어선 것이다. 제주의 4·3은 불의한 권력에 대한 정의로운 저항과 자주독립 통일정부 수립이 봉기의 핵심적 이유였다. 동학농민혁명과 4·3은 나라의 자주독립과 인권을 기본적인 가치로 담고 있다는 점에서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 그러나 탐관오리의 탐욕과 학정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고자 봉기한 동학농민군은 잘 훈련된 관군과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 게 무참하게 패배했다. 단선단정을 반대해 2개 선거구에서 국회의원 선출을 무산시킨 제주도민은 미군정의 지휘 아래 이승만과 군 수뇌부의 초토화 작전으로 인구의 10% 이상이 학살을 당하는 참혹한 피해를 당했다.


  동학농민혁명과 4·3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기고, 오늘 우리는 그 역사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동학농민혁명은 비록 미완의 혁명으로 끝났으나, 그 끼친 영향은 매우 컸다. 불의에 저항한 농민들의 저항운동은 신분제의 타파와 내정개혁 등으로 역사발전의 단초를 제공했다. ‘반봉건‧반외세 농민항쟁’으로 자리매김된 동학농민혁명으로 반일애국주의가 우리 사회에 깊게 뿌리내리게 되었다. 동학농민군이 주장한 내용은 폐정개혁에 반영되어 ‘과부의 재가 허용과 신분제 폐지’와 함께 갑오개혁에 부분적으로 반영되는 성과를 가져오는 등 봉건사회의 일각을 무너뜨리기도 했다. 결국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 점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동학농민혁명은 3·1운동, 4·19혁명, 5·18광주민주화운동의 뿌리로서 현대적 평등사상과 민주화의 지평을 연 역사로 기록되고 있다.


  제주도민들은 4·3 당시 남한단독선거를 반대하고 통일정부 수립을 요구하는 전국적인 분위기를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대변했다. 제주도는 실제로 단독선거를 거부한 유일한 지역으로 남았다. 하지만 그에 따른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보복은 3만의 인명 희생과 막대한 재산피해, 공동체 파괴 등 전대미문의 참화로 귀결됐다.


  비극적 종결 이후 4‧3은 이승만과 군부의 독재정권이 이어지면서 왜곡과 폄훼로 점철되어 그 진실은 깊은 음지에 묻혀 버렸다. 하지만 유족과 제주도민의 가슴속에 자리잡은 한과 진상규명의 의지는 묻힐 수 없었다. 많은 이들의 희생과 지난한 투쟁으로 마침내 2000년 특별법 제정을 이뤄냈다. 이후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보고서 채택, 대통령의 사과, 국가추념일 지정에 이어 2021년 특별법 개정으로 피해 보상과 수형인들에 대한 직권재심이 진행되면서 과거사 해결의 전범으로 평가받고 있다.


  2020년 72주년 추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추념사를 통해 “제주는 해방을 넘어 진정한 독립을 꿈꿨고 분단을 넘어 평화와 통일을 열망했다. 그러나 누구보다 먼저 꿈을 꾸었다는 이유로 제주는 처참한 죽음과 마주했고 통일정부 수립이라는 간절한 요구는 이념의 덫으로 돌아와 우리를 분열시켰다.”라고 4‧3의 성격을 규정했다.


  외세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도탄에 빠진 민중을 구하고자 일어섰던 동학농민혁명, 국토 양단과 그로 인한 민족상잔을 막아내고자 일어섰던 4‧3항쟁, 세대를 달리 하는 두 개의 커다란 역사는 불의에 대한 저항과 민족의 자존을 지키기 위한 혁명적 운동으로 기억되어 마땅하다. 또한 동학과 4‧3은 오늘날에도 시대를 뛰어넘어 민족의 자주독립과 통일, 평화와 인권이라는 시대적 소명을 우리에게 부여하고 있다.


고희범 / 제주4‧3평화재단 이사장, 전 한겨레신문 사장, 전 제주4‧3연구소 이사장, 전 제주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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