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고 기념해야 할 역사 전적지
- 강원도 홍천 서석 풍암리 전적지-
박준성 역사학연구소 연구원
역사의 사건이나 인물은 자료의 발굴과 연구의 축적에 따라 내용이 보충되고 재해석된다. 현실의 요구와 이해 관심에 따라 기존에 알고 있던 사실도 새롭게 보게 된다. 기록뿐 아니라 역사의 현장도 다시 꾸며진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역사 현장에는 곳곳에 알림판이나 기념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동학농민혁명을 기념하는 탑으로 맨 먼저 만들어진 탑이 1963년의 황토현에 세워진 ‘갑오동학혁명기념탑’이다. 두 번째가 1973년 우금티의 ‘동학혁명군위령탑’이다. 세 번째가 1977년 주민들이 성금을 모아 세운 강원도 홍천 서석면 풍암리의 ‘동학혁명위령탑’이다.
강원도는 동학이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에서 교단이 위기를 극복하고 경전 간행과 포교의 기반이 이룬 곳이었다. 동학운동에 참여했던 강원도 동학농민군은 1894년 자신의 생존과 사회의 변혁을 이루고자 투쟁에 나섰다. 8월 중순 무렵부터 평창 쪽에 결집해 있던 영월과 평창, 정선 등 5개 읍의 농민군 본대 천여 명이 9월 4일 오전 대관령을 넘어 강릉부관아를 점거하였다. 전라도 쪽 전봉준 세력이 집강소 체제를 벗어나 움직이기 시작한 9월 10일 무렵이나, 최시형이 기포령을 내리고 북접 교단지도부가 활동에 나선 9월 18일 보다 보름여 앞선 때였다.
강원도 동학농민군의 최대 전적지는 홍천군 서석 풍암리였다. 강릉·양양·원주·횡성·홍천 등 5읍의 접주로 불렸던 농민군 지도자 차기석과 접주 박종백이 이끄는 강원도 중부내륙 지역의 농민군은 10월 13일 밤에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 동창(東倉)을 점거하였다. 10월 23일에는 홍천군 서석면 풍암리에서 강원도 지역 최대의 접전이 이루어졌다. 기존에는 풍암리 전투가 10월 22일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근래 <갑오군정실기>의 발굴에 따라 10월 23로 수정되었다. 서석에 모인 농민군 수천명은 풍암리 진등에 흙으로 보루를 쌓고 백기를 꽂아 진을 치고 토벌대와 맞섰다. 맹영재가 이끄는 토벌대와 친군진어영 병정, 홍천현의 포군 연합부대 1000여 명에 대항하여 농민군은 한낮부터 저물 때까지 치열하게 싸웠다. 서석에서 토벌대의 토벌은 2-3일 계속되었다. 횡성쪽 토벌대는 풍암리전투가 끝난 뒤 10월 24일 새벽에 서석에 도착하여 26까지 주둔하고 횡성현으로 돌아갔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이후 희생당한 농민군 위령제가 처음 열린 곳이 강원도 홍천이었다. 해방 후 1946년, 홍천에서 농민군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위령제를 거행한다는 신문기사에는 홍천군 서석면 풍암리 전투의 농민군 희생을 ‘갑오동학혁명운동’의 가장 처참한 비극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희생자를 2천 여 명으로 거론하고 있다. 서석 지역의 후손들이 증언하였던 800여-1000여명 희생이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방증해 준다. 또한 유가족들의 거주지를 홍천·춘천·원주·정선 등지로 꼽고 있다. 서석 전투에 참여한 농민군들이 홍천 뿐 아니라 여러 지역에서 합류한 농민 연합군이었음을 알려준다. 지금도 매년 10월이면 기념 추모제를 진행하고 있다.
기념은 과거를 기억하고 생각하는 현실의 행위이다. 기념할 대상은 승리의 역사만이 아니다. 중국 남경대학살기념관 곳곳에는 ‘전사불망 후사지사’(前事不忘 後事之師)라는 글귀가 걸려 있다. 지나간 일을 잊지 말아야 하는 까닭은 그것이 다가올 일에 가르침이 되기 때문이다는 뜻이다.
강원도 홍천군 서석면 풍암리 동학농민혁명 전적지는 강원도 기념물이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나 의미, 역사적 사실의 근거, 기념행사의 지속성, 사적지의 지역적 형평성 등을 고려하면 국가 사적지로 승격하여 지정함이 마땅하다.
박준성 : 역사학연구소 연구원, 노동자교육센터 운영위원. 1984년부터 한국 근현대 민중항쟁과 노동운동사를 연구하며, 강의와 역사기행을 진행해오고 있다. 강원도 동학농민혁명에 관하여 몇 편의 글을 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