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윤치문의 증손자 윤영식
일시 : 2023. 4. 19(수) 13:00
장소 : 경상북도 예천문화회관 뜰

윤치문(尹致文 1863~1894) / 파평 윤씨. 경상북도 예천군 유천면 고산에서 활약한 동학농민군 지도자. 1894년 갑오년 이전 무관(武官) 직임을 역임. 1887년 충무위 부사용으로 임명되는 교지를 받고, 1888년 무과에 급제한 뒤에는 벼슬이 올라 1892년 6월 사헌부 감찰에 임명된다. 향리에 내려와 있던 그가 동학에 들어간 배경은 확실하게 알 수 없으나 농민군 조직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군사 활동에 앞장선다. 예천 일대 동학농민군이 합세하여 (예천)읍내를 공격하던 1894년 8월 28일(음) 굴머리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윤영식(尹永植, 1940~ ) / 윤치문의 증손. 예천에서 태어나 줄곧 살아왔다. 현재 윗대부터 물려 내려온 고산의 집과 땅을 지키면서 농사를 짓고 있다.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동학농민군 후손 증언록), 역사비평사, 1997. 211쪽.
문) 선생님, 반갑습니다. 녹두꽃 독자님들께 본인 소개 부탁드립니다.
답) 『녹두꽃』 독자 여러분 반갑습니다. 저는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윤치문 님의 증손자(曾孫子) 영식입니다. 그리고 전북 정읍에서 이렇게 먼 경상북도 예천까지 저를 찾아와 주신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 감사드립니다.
문) 지난해 7월이었지요? 예천박물관 세미나실에서 개최되었던 ‘2022년 예천동학농민혁명 학술대회’ 때 뵙고 오늘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사전에 말씀 올렸던 것처럼 오늘 이렇게 선생님을 찾아뵙게 된 것은 저희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녹두꽃』여름호에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이신 선생님의 증조부님이신 윤치문 님에 대해 얘기를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답) 고맙습니다. 전라도에서 이곳까지 먼 길인데 마다하지 않고 이렇게 찾아와 주셔서 정말로 감사해요.
문) 네,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이곳 예천에서 태어나셨지요?
답) 그럼요. 경북 예천군 유천면 고산동이 제 고향입니다. 고산동 106번지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줄곧 여기에서 살아왔고, 지금도 이곳에서 농사를 지으면 살고 있지요. 제가 지금 살고 있는 유천면 고산동은 우리 집안이 대대로 살아온 터전입니다. 이곳에서 저의 7대조 할아버지 때부터 사셨다고 하니까 대략 200년이 넘었다고 봐야겠지요. 더 올라가 보면 말입니다. 본래 파평 윤가가 영주 풍기에서 살다가 4백여 년 전에 대윤 소윤 그렇게 되면서 그때 시조 할버지께서 예천으로 넘어오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여기서 살고 있는 것이지요.
문) 집안 대대로 살아온 터전이네요?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셨던 증조부께서도 지금 이곳 고산동에서 태어나셨겠네요?
답) 네, 그럼요. 증조부께서도 이곳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생활하셨지요.
문) 지난 1997년 역사문제연구소 ‘동학농민전쟁백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에서 펴낸 동학농민군 후손 증언록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1997. 역사비평사)이라는 책에 선생님의 증조부님에 대한 내용이 게재되어 있습니다. 당시 충북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시던 신영우 교수님께서 증조부님에 대한 내력을 정리하셨던데 그때 상황이 기억나시는지요?
답) 네, 그럼요. 생각나지요. 지금은 고인이 되신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님과 신영우 교수님이 같이 예천에 오셨어요. 한두 번 온 게 아니예요. 이이화 선생님과 신영우 교수님은 동학농민혁명 관련한 자료를 찾고, 그것을 연구하시느라 아주 자주 이곳 예천에 오셨어요. 특히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이던 1994년을 전후해서는 자주 오셨어요. 그때는 저나 이이화 선생님이 50대였을 때니까 젊었던 때였지요.

 
문) 네,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무렵 선생님께서 이이화 선생님과 신영우 교수님 등과 나눈 대화를 바탕으로 작성되어 출판된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 책을 읽다 보니 선생님께서 이곳 예천에서 태어나 공직생활을 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던데, 어느 기관 혹은 어떤 일을 하셨지요?
답) 그게 조금 얘기가 달라요. 제가 공직에 있었던 것은 아니고 군대를 이곳 예천에서 근무했어요. 그 내용이 잘못 전달된 것 같아요. 제가 군인 때 보안부대로 배정을 받아서 고향인 이곳 예천에 와서 근무했었거든요.
문) 네, 군대 가기 전에도 그랬고, 군에서 제대한 후에도 고향을 떠나지 않고 줄곧 이곳에서 생활하신 거네요?
답) 그렇지요. 고향에서 줄곧 농사를 지었지요. 그러다가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이던 1994년 전국에서 기념사업이 펼쳐지고, 역사학계 관계자분들이 저를 찾아와 증조부님에 대해 이런저런 내용들을 묻고 하면서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저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지요. 그 무렵 우리 예천지역에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셨던 전기항 참여자분이 계시는데 그분의 후손이 지금 사단법인 예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고 있는 전장홍 선생님이세요. 1996년 3월 1일, 지금도 기억이 또렷한데 그날이 3․1절이었어요. 그분이 그날 예천성당에서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님 역사 특강과 함께 예천지역에서 전개된 동학농민혁명을 알리고 그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예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를 창립하였지요. 그때 문부장님도 이이화 선생님 일행과 함께 행사에 참석해서 저와도 인사를 나누었었지요. 그게 벌써 30년 가까이 되네요.
문) 네, 저도 기억이 납니다. 제가 그 당시 사단법인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이사장 한승헌) 사무국장으로 근무하던 때였는데, 이이화 선생님이 저희 사업회 이사님이셨어요. 그래서 예천기념사업회 창립식 겸해서 열린 이이화 선생님의 역사 특강이 있었어요. ‘경상북도 예천지역 동학농민혁명’을 주제로 한 강연이었는데, 이 강연을 위해 이이화 선생님과 그 전날 예천에 와서 하룻밤 자고 일어나 행사장인 예천성당으로 갔던 기억이 납니다.
답) 네, 저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때 전장홍 선생님이 동분서주 정말로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문부장님은 지난 30여 년간 전국에서 펼쳐지는 동학농민혁명 정신선양을 위한 행사들에 두루 다녀봐서 아시겠지만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지역민들의 관심이 각 도별로 많이 차이가 나잖아요? 저도 전국 유족회 행사나 기념사업단체 행사들에 참석하면서 느낀 것인데, 전라도 지역에서 동학농민혁명 기념행사가 펼쳐지면 그곳에 지자체장은 물론이고 각급 기관장 등이 대거 참석하여 분위기가 매우 고양되어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런데 우리 경상도 지역이나 충청도 지역에서 펼쳐지는 동학농민혁명 기념행사는 어딘지 모르게 다소 분위기가 뜨겁지 못하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2004년 동학농민혁명 특별법이 제정되고, 2019년 동학농민혁명 기념일이 제정된 지금의 상황에서는 제가 사는 경상도 지역에서도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으로 높아졌지만 30년 전만 해도 경상도 지역의 분위기는 참 침체되어 있었어요. 지금도 전라도 지역에 비하면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이 많이 낮다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문) 네, 선생님 말씀에 공감합니다. 동학농민혁명이 끝난 후 일제강점기와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극심한 부침을 겪으면서 한 세기가 넘도록 그 역사적 의미가 왜곡되고 축소되어온 것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예천에서 기념사업 추진을 위해 단체를 창립한 일 등에 대한 귀한 말씀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쯤 해서 오늘 인터뷰 본래의 목적인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윤치문 님에 대해 얘기했으면 합니다. 선생님의 증조부님이신데 증조부님이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셨다는 사실은 언제 알게 되었는지요?
답) 증조부님이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셨다는 얘기는 조부께 들었습니다. 언제인지는 그 시기가 명확하게 생각나지는 않습니다. 하여간 제 조부께서 살아계실 적에 저에게 너의 증조부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대장이셨다고 얘기해주신 것이 기억이 납니다. 그러면서 증조부님이 무과에 급제하셔서 무관 벼슬을 하셨고, 아주 힘이 장사였다고 말씀하셨어요.
문)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던 분들의 많은 경우가 농민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1894년 여름 일본군이 경복궁 무단점령하고, 친일내각 수립하여 청일전쟁 도발 등의 폭거를 자행하여 국권을 유린하자 전국에서 유생을 비롯하여 다양한 계층에서 동학농민혁명 대열에 합류하지만 증조부님의 경우는 좀 독특한 경우에 해당된다고 여겨집니다. 동학농민혁명 이전에 조선 정부에서 관직에도 있으셨지요?
답) 네, 동학농민혁명 이전이던 1887년 충무위 부사용으로 임명되었다는 교지가 있고, 1888년에는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에 오른 후 1892년 6월 사헌부 감찰에 임명되었다고 선대로부터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이를 입증하는 문서가 집안 대대로 전해져오고 있습니다. 증조부께서 1887년 [선략장군 충무위 부사용(宣略將軍 忠武衛 副司勇)]으로 임명되면서 받은 교지, 무과에 급제하여 받은 교지 [한량 윤치문 무과 병과 제팔백육십일인 급제 출신자(閑良 尹致文 武科 丙科 第八百六十一人 及第出身者)] 그리고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사헌부 감찰에 임명되면서 받은 교지 등을 지금도 잘 보관하고 있습니다.
문) 선생님 증조부께서 1887년 관직을 받았고, 1888년 무과 급제 후 1892년 6월 사헌부 감찰로 임명되었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이 본격화된 것이 1894년인데 증조부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때가 언제쯤인지요? 그리고 그 연유에 대해 전해진 얘기가 있는지요?
답) 증조부님이 동학에 들어가셨다는 말은 전해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연유로 혁명에 가담하였는지 그런 점에 대해서는 저도 잘 모릅니다. 조부님이나 아버지께서도 그런 얘기를 해주신 적이 없었어요. 그저 증조부님이 동학에 들어가서 활동하다 돌아가셨고, 그 일 때문에 가족들이 피난을 다니면서 갖은 고초를 겪었다는 얘기는 전해 들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증조부님이 동학농민군이 예천 읍내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굴머리 전투 때 전사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천 사람들은 굴머리를 서정자들이라고도 부릅니다. 증조부께서 전사한 후, 집에 계시던 증조모님이 시아버님이신 고조부님을 모시고 깊숙한 곳으로 피난을 다니셨다고 합니다. 그 과정에서 모진 고초를 겪으셨다고 합니다.

경북 예천군 동학농민군 생매장 터 추모비 (경상북도 예천군 예천읍 동본리 479)
동학농민혁명 당시 예천 보수집강소의 민보군에 의해 체포된 농민군들이 생매장된 곳
문) 네, 선생님. 2004년 동학농민혁명 관련 특별법이 제정되어 설치된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절차를 거쳐 증조부께서 참여자로 등록되었지요?
답) 네, 참여자심의위원회에 신청서를 제출하여 참여자 사실조사 등의 절차를 거쳐 2005년도에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로 최종 등록되었습니다. 그래서 증조부님의 위패가 전북 정읍시 황토현전적에 자리한 구민사(求民祠)에도 모셔져 있고, 2022년 5월 개원한 동학농민혁명기공원 내 추모관에도 모셔져 있습니다.

 
문) 네, 저도 선생님 구민사와 추모관에 봉안되어 있는 증조부님 위패를 보았습니다. 증조부님에 대해 알고 계신 내용 중에 빠뜨린 얘기는 없는지요?
답) 네,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셔서 활동한 내용이나 이런 것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들은 것이 그다지 많지 않아요. 조부님이나 조모님 또는 아버님께 들은 얘기가 그리 많지 않아요. 나중에 이이화 선생님, 신영우 교수님 이런 분들한테 듣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특별하게 빠뜨린 것은 없어요.
문) 네, 선생님. 끝으로 증조부께서 굴머리 전투에서 전사하셨다고 하셨는데, 증조부님 시신은 거두었나요? 어디에 모셔져 있는지요?
답) 네, 굴머리 전투가 끝난 후 하룻밤을 지내고 난 뒤에 당시 집안 어른들이 전장에 가서 증조부님 시신을 수습하여 선산에 모셨다고 합니다. 선산은 예천군 유천면 가동 산 105번지 일대예요. 그곳에 저의 7대조, 6대조 그리고 증조부 이렇게 세 어른이 모셔져 있고, 조부님부터는 우리 집 바로 뒷산에 모셔져 있어요.

예천 동학농민군 서장자 전투지(경상북도 예천군 예천읍 서본리 83 , 85-2, 86-1 일대(서정자들)
동학농민혁명 당시인 1894년 8월 28일 밤 예천지역(화지)의 농민군과 민보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
문) 네, 선생님. 긴 시간 동안 가슴 아픈 얘기를 가만가만 기억을 더듬어가면서 말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빠뜨린 얘기나 꼭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모진 세월이었어요.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이전에는 증조부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다 뭐 이런 얘기를 입도 뻥긋 못하고 살았지요. 그런데 지금은 특별법도 제정되고, 국가 기념일도 제정되어 매년 정부에서 기념식도 성대하게 거행하잖아요? 격세지감이에요. 그동안 전국 각 지역에서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을 헌신적으로 추진해온 기념사업단체 관계자 여러분은 물론이고, 동학농민혁명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연구하신 선생님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나아가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범국민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여러 측면에서 애쓰시는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임원과 직원 여러분께도 이 자리를 빌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문) 네, 선생님. 긴 시간 동안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