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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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가을 61호
동학농민혁명 전시관(박물관)

동학농민혁명 전시관(박물관)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안에는 동학농민혁명이 지닌 역사적 의미와 그 위상을 동아시아와 세계사적 차원에서 조망할 수 있는 동학농민혁명 전시관(박물관)이 있다. 2022년 5월 11일 동학농민혁명기념일에 개관한 전시관의 규모는 연면적 1078.58m2로 현재 국립박물관 등록을 위한 절차를 밟고 있다. 전시관은 ➊민중의 힘으로 사회를 개혁하다 ➋전국에서 민중·민족 항쟁이 일어나다 ➌일본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싸우다 ➍동학농민군의 고난과 희생을 되새기다 ➎한국 근대 민주정신의 큰 줄기가 되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번 호에는 ➌ 일본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싸우다 파트를 지면으로 소개한다.



PART 3. 일본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싸우다


 

  아편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이 중국에 난징 조약(1842)을 강요한 후, 제국주의 열강의 동아시아 진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일본은 미국의 함포 외교에 굴복하여 1854년에 가나가와(神奈川) 조약을 맺었고, 조선은 미국의 함포 외교를 모방한 일본의 압박에 1876년 강화도 조약을 맺고 문호를 개방했다. 메이지 유신(1868)을 단행한 일본은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들어 전쟁을 위한 군사 시설 및 장비를 강화하는 한편 1880년대 말에는 조선과 대륙 침략을 구상하고 있었다.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하자 일본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해 대륙에 진출할 수 있는 기회로 판단하고 대규모 병력을 파견하여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그 결과, 중국 중심의 전통적인 동아시아 국제 질서는 해체되고 일본이 패권을 장악한 새로운 질서가 생겨났다.



일본의 전쟁 준비와 농민의 저항


  일본군은 1894년 7월 23일부터 전신선을 보호하고 농민군을 탄압하기 위해 서울과 부산을 잇는 주요 도로에 군사 작전용 물자 관리 시설인 병참부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의 침략 행위가 노골적으로 드러나자 7월 말부터 조선 전국에서 민중과 동학농민군의 항일무장투쟁이 시작되었다. 8월부터는 일본군이 전신선과 병참부를 설치한 지역을 중심으로 전신선 절단, 전신주 파괴, 병참부 공격 등 반일 투쟁이 곳곳에서 이어졌다.


조선국전도 朝鮮國全圖 54.5×38.5cm, 1894.

일본 시사신보사(時事新報社)에서 발행한 지도로 조선 전국을 정밀하게 측량해 만든 근대 지도이다. 우리나라를 주(州), 부(府), 군(郡), 현(縣)으로 구획해 각 도시를 자세히 표기한 후 불법으로 일본이 가설한 부산(釜山)-경성(京城) 간의 경부 전선을 표기하였다. 부록에는 중국 상하이[上海]까지 연결된 육상 전선陸上電線과 함께 일본까지 이어지는 항해선(航海線), 해상전선(海上電線)이 동아시아 삼국을 잇고 있다.



조선에서 시작된 청일전쟁



 

  조선 정부는 1894년 6월 초순에 농민군과 전주화약을 맺은 이후 청나라와 일본 양국에 군대를 물릴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미 대륙 진출을 목표로 한 일본군은 조선 정부의 요구를 거부했고 7월 23일 경복궁을 강제로 점령한 후 이틀 뒤인 25일에는 선전포고도 없이 남양만 풍도 앞바다에서 청나라 군함 2척과 청나라 병사들을 태운 영국 상선을 기습하여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이후 성환전투(7월 29일), 평양전투(9월 15일)를 거쳐 청나라군이 압록강 건너로 후퇴할 때까지 조선은 청일전쟁의 전쟁터가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조선 정부뿐만 아니라 민중은 막대한 피해를 보았다.



<청일전쟁 주요 전투와 전개도>



 

① 풍도해전(1894.7.25.)

전투로 청일전쟁이 시작되었다. 일본군은 청나라와의 전쟁을 위해 1만여 명에 가까운 병력을 이미 조선에 상륙시켰고, 선전포고도 없이 청나라군을 수송하던 군함과 영국 국적의 선박을 공격했다.


② 성환전투(1894.7.29.)

청일전쟁 최초의 육상 전투로 천안시에 있던 성환역 부근에서 벌어졌다.전투는 7월 29일 밤부터 다음 날 아침까지 이어졌으며 초반에는 일본군 수십 명이 전사하기도 했지만 결국 청나라군이 크게 패하고 평양으로 퇴각했다.


③ 평양전투(1894.9.15.)

일본군과 청나라군 사이의 두 번째 육상 전투로 청일 전쟁의 전환점이 된 전투이다. 일본군이 크게 승리했고 청나라군은 압록강을 건너 후퇴했다. 이후 일본은 조선의 국내 정치에 본격적으로 간섭하기 시작했다.


④ 황해해전(1894.9.17.)

청일전쟁에서 가장 규모가 큰 해전으로 평양 전투 직후 압록강 하구에 있는 다둥거우[大東溝] 해역 일대에서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청나라의 북양 함대를 물리치고 제해권을 확보했으며 북양 함대는 뤼순항으로 물러났다.


⑤ 압록강전투(1894.10.25.)

평양 전투에서 패배한 청나라군은 압록강 북쪽 기슭을 따라 길게 진지를 구축했다. 9월 하순에 의주에 도착한 일본군은 뗏목 위에 널빤지를 깔아 다리를 만든 후 10월 25일에 압록강을 건너 청군을 격파하고 다음 날인 26일에는 중국 단둥에 있는 주롄청[九連城]을 점령했다.


⑥ 뤼순[旅順]전투(1894.11.21.)

일본군은 압록강 전투에서 승리한 여세를 몰아 1894년 11월 21일 뤼순항을 점령했다. 뤼순을 점령한 날부터 4일 동안 일본군이 약 2만 명에 달하는 병사와 시민을 학살했고 여기에는 부녀자와 유아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⑦ 웨이하이[威海]전투(1895.1.20.~2.12)

청일전쟁의 마지막 주요 전투이다. 일본은 육해군 공동 작전을 펼쳐 북양 함대의 거점과 잔존 함선들을 파괴했다. 이후 잉커우[營口] 전투를 거쳐 시모노세키[下關]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청일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일본군 개선문 판화 35×70.6cm, 1894,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1894년 9월 일본인 화가 타케가와 세이키치가 청일전쟁을 선전하려 발행한 다색목판화 가운데 하나이다. 청일전쟁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린 성환전투 등에서 승리를 거둔 일본군이 1894년 8월 5일 마포 만리창 일대에서 거행한 개선식을 표현하였다.  한일 양국의 국기가 걸린 급조한 개선문 앞에 도열한 일본군을 서양인처럼 묘사한 점이 특징으로, 일본은 자국의 승전 소식을 목판화로 다수 제작하여 제국주의를 위한 보도와 선전에 적극 활용하였다.



『일청전사』15×22.8cm, 1897,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1897년 일본에서 간행한 청일전쟁의 기록물로 총 7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된 내용은 양국 간의 전투 양상과 전력에 관한 것으로 각종 도표와 사진 등이 수록되어 당시의 전함과 개선식 행사 등의 여러 정보를 파악할 수 있다. 일본은 근대 최초의 대외전쟁으로 얻은 승리의 영광을 선전하고자 청일전쟁 관련 기록물을 다수 발행· 배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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