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참여자 강영희의 고손자 강성진
일시 : 2023. 7. 25(화) 12:00 ~
장소 : 광주광역시 광산구 동곡초등학교 총동창회실

이번 호의 유족인터뷰는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강영희(姜永禧, 1837~1905) 님의 고손(高孫) 강성진(姜聲振, 1954~ ) 동학농민혁명유족회 광주광역시 회장님을 모시고 진행하였다. 참여자 강영희는 진주강씨(晉州姜氏)로 1837년 전라남도 나주시 공산면 금곡리(월비月屝상촌)에서 태어나서 생활하다가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나주성(羅州城) 전투와 영산강자락의 ‘다시들 전투’ 등에 참여한 사실이 확인되어 2008년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위원장) 국무총리) 때 참여자로 등록되었다.
강영희 님의 고손자 강성진은 (사)동학농민혁명유족회 광주광역시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 129주년을 기념하여 지난 7월 광주광역시 광산구청에서 열린 ‘동학농민혁명 광주학술대회’를 비롯하여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독립유공자 서훈(敍勳)을 위한 활동 등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문) 회장님 반갑습니다. 녹두꽃 독자님들께 본인 소개 부탁드립니다.
답) 안녕하십니까? 『녹두꽃』 독자 여러분 반갑습니다. 저는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강영희의 고손자 강성진입니다. 지난 2007년에 제가 강영희 고조부님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내용을 정리하여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 심의위원회에 신청서를 제출하였습니다. 신청서를 접수한 후 동학농민혁명 관련 전문가 조사 등을 통해 저희 고조부님이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사실이 확인되어 그 이듬해 참여자로 등록되었습니다. 이때 저도 참여자 유족으로 등록하여 동학농민혁명유족회 회원으로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2017년 5월 문화체육관광부 법인으로 등록하여 사단법인 동학농민혁명유족회로 거듭난 후 제가 광주광역시 유족회 회장직을 맡고 있습니다.

 
문) 네, 회장님. 지난 7월 7일 광주광역시 광산구청 윤상원홀에서 많은 분들이 참여한 가운데 동학농민혁명 제129주년 기념 ‘동학농민혁명 광주학술대회’가 개최되었습니다. 학술대회를 준비하시느라 어려움이 많으셨죠?
답) 네, 문 부장도 행사를 많이 해보셔서 잘 아시겠지만, 막상 펼쳐놓고 보면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는 행사도 참 신경 쓸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요. 지난 7월 7일 열렸던 학술대회도 준비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학술대회 주제를 잡는 일부터 시작해서 적합한 분들을 섭외하는 일, 예산을 마련하는 일, 행사장소를 섭외하는 일 등등 쉬운 일이 없었지만 참여자 유족으로서의 사명감을 갖고 적극적으로 추진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주위에 뜻있는 분들이 행사준비를 성심으로 도와주셔서 큰 행사를 성황리에 마칠 수 있었습니다. 특히 김종후 (사)동학농학농민혁명 전국유족회 대의원님을 비롯해서 행사를 준비하는데 도움을 주신 많은 분들에게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주제발표를 해주신 교수님들과 토론자로 참석해주신 분들을 비롯하여 이번 학술대회에 참여한 모든 분들께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문) 그날 학술대회는 이상식(前 전남대 인문대학장, 광주전남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회장) 교수님 기조발제로 시작해서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서훈 _ 나주 북동부에서 희생당한 동학농민혁명군”(박용규), “광주지역 동학농민혁명 정신선양 방안 모색”(김재기)이라는 주제발표로 이어졌지요?
답) 네, 그렇습니다. 이번 학술대회를 준비하면서 참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은 전라도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번진 전국적인 반일의병이었잖아요? 동학농민군이 일본군을 몰아내는데 실패하여 결국 우리나라가 일제에 짓밟혔고, 그 과정에서 동학농민혁명은 반란사건으로 매도되었잖아요? 그러다보니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이전까지만 해도 고부군수 조병갑을 몰아내기 위한 사건으로 인식되었어요. 일제 때는 물론이고 해방이 된 후에도 동학농민혁명을 고부군수 조병갑을 몰아내고자 일어난 일 정도로 인식했으니까 계속 반란사건으로 매도되었지요. 그러다가 1994년 100주년 기념사업이 전국 각 지역에서 전개되면서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었어요. 하기야 백주년 이전까지만 해도 저도 사실은 관심이 거의 없었어요. 그러다가 우리 광주․전남에서는 1994년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당시 전남대 인문대학장으로 재직하시던 이상식 교수님이 광주전남 동학농민혁명백주년기념사업회를 창립하여 활동하면서 사람들의 관심이 모아졌고,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인식도 달라지게 되었어요.
문) 네, 회장님. 회장님께서 하신 말씀에 대해 저도 깊이 공감합니다. 사실 동학농민혁명의 대중화는 100주년 기념사업의 성공적인 추진으로 가능했다고 말해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100주년 기념사업의 결과로 2004년 동학농민혁명 특별법이 견인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특별법이 제정된 후 참여자 및 유족에 대한 조사와 등록이 시작되었고, 문체부의 인가를 받아 재단법인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설립된 후 전국의 유족분들과 지역단체 임원과 회원님들이 아주 헌신적으로 동학농민혁명 정신선양사업을 추진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회장님께서도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선양을 위해 다방면에서 활동해오셨지요? 그래서 하고 싶은 말씀이 참 많으시겠지만 오늘은 회장님의 고조부이신 강영희 참여자분에 대한 얘기를 중심으로 인터뷰를 진행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웃음) 회장님께서 고조부님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사실을 언제, 어떤 경로를 통해 알게 되었는지요?
답) 네, 고조부님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사실에 대해서는 조모님(박쌍림 朴雙林, 1897~1984)께 들었습니다. 제가 스무 살 무렵이었으니까 아마 그때가 1970년대 중반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때는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지금처럼 얘기할 수 없었던 시절이었지요. 쉬쉬하면서 내색하지 못했던 때였어요. 그래서였는지 할머니께서도 딱히 동학농민혁명이라고 말씀하시지는 않고, 나라에 큰 난리가 있었는데 그때 고조부님이 거기에 함께하셨다가 난리가 끝나던 무렵 그 뒤끝이 어찌나 무서웠던지 고조부께서 가족은 물론이고 딸과 사위까지 모두 데리고 지리산자락에 있는 남원 운봉으로 피난살이를 갔다고 얘기를 해주셨어요.
문) 네, 조모님께 들은 얘기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저희 가계(家系)를 살펴보면 1520년대 강보승(姜保昇) 할아버지께서 나주월비(月扉) 지금의 나주시 공산면 금곡리에 터를 잡고 정착하신 낙남조(落南祖)가 되십니다. 그리고 병자호란에 서우신의 종사관으로 양근에 머물면서 남한산성 구원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마침내 화해가 성립되어 청군 군대가 노략 횡포를 일삼자 이들과 안변 남산에서 맞서 항거하다 순절하신 진사 강사남(姜泗南) 할아버지가 낙남조의 6세손입니다. 이분이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신 고조부님의 7대조이시죠. 문과 급제자 승문정자 강세홍(姜世弘)의 손자이신 고조부님은 동학농민혁명(1894년) 당시 사회적으로 결코 멸시당하는 입장은 아니었습니다. 향리(鄕里)의 지식층으로써 동학농민군에 참여하셨습니다. 고조부님께서는 주위의 농민들에게 합류를 권유하는 등 상당한 영향력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조모님께서 제게 “갑오년에 큰 난리가 있었는데, 그때 고조부님이 참여했다”라고 말씀하셨어요. 말씀을 이어서 고조부님께서는 겨울철에 동학농민군이 나주로 진격할 때 사암 나루를 건너 영산강 유역인‘다시들’에서 벌어진 전투에 참여하였고, 나주 용문산으로 진격하는 전투에도 참여하셨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러다가 이 전투에서 패배하여 귀가하였는데 관군과 일본군이 하도 집요하게 수색하니까 결국에는 가족 모두를 데리고 지리산자락에 있는 운봉으로 가서 피난살이를 했다고 얘기를 해주시더라구요. 지금 생각해보면 피난처를 왜 아무런 연고도 없는 운봉으로 정했는지가 궁금합니다. 아마도 당시에 나주와 운봉에 집강소가 설치되지 않은 곳이어서 나름 안전한 곳이라 믿고 택한 것은 아닐까 그렇게 생각을 해보기도 합니다. 그렇게 운봉으로 피난을 가서 생활하면서 증조모께서 강대현(1897~1961)을 낳으셨다고 합니다. 그 이듬해인 1898년 8월에 나주로 돌아오는 길에 대현의 돌을 맞았다고 하셨습니다. 나주로 돌아온 후 선산이 있는 나주군 공산면 남창리에 집을 짓고 8년 정도 사시다가 고조부님께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제가 조모님께 이런 얘기를 들은 것은 스무살 무렵이었으니까 1970년대였습니다. 그때만 해도 사회 상황이 여의치 못해 이런 얘기를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입 밖으로 내지 않고 마음속으로만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2004년도에 일간신문을 통해 동학농민혁명 유족신청서를 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조모님에게 들은 얘기를 근거로 2007년에 신청서를 제출하였고,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현장 조사 등을 통해 2008년에 저의 고조부님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로 등록되었습니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강영희 님의 묘소(전남 나주시 공산면 남창리 151) 
문) 조모님에게 들은 얘기나 회장님께서 그동안 여러 경로로 들어서 알게 된 내용이 있으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네, 동학농민혁명 당시 고조부님의 연세가 58세로 고령이었다고 합니다. 고조부님은 두 아들이 있었는데, 두 아들 중 큰아들 교수(제 증조부)는 무안(오갈재)에서 한약방을 하셨는데 병약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둘째 아들 건수(당시38세)와 (갑오난리)동학농민혁명에 같이 참여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둘째 아들이 자손도 없이 사망하였다고 합니다. 양자도 세울 수 없는 처지여서 그렇게 하지도 못해 후손도 없이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러다 보니 종증조부님의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근거를 아직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지난번 고조부님 참여자 신청할 때는 종증조부님을 신청서에 포함시키지 못했습니다. 이후 저는 나름대로 관련 자료를 열심히 찾고 있습니다. 참여하신 근거를 찾아서 종증조부님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로 신청하여 등록시켜드리는 것이 후손의 도리라고 생각되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자료를 찾고 있습니다.
문) 회장님,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강영희 님의 유족 관계는 어떻게 되는지요?
답) 저의 고조부님의 장남이 강교수(字는 석녀)입니다. 그리고 저의 조부님이 강대현(姜大鉉), 저의 선친 강정원(姜正遠) 그리고 저 이렇습니다. 윗대부터 자식이 한 명밖에 없어 아주 손이 귀한 집안입니다. 그래서 고손자인 제가 조모님에게 들은 내용을 바탕으로 자료를 보완하여 신청서를 제출했던 것입니다.

 
문) 네, 회장님. 고조부님께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로 등록된 연도가 2008년이었으니까 그때 회장님도 유족으로 등록되었겠네요?
답) 네, 그렇습니다. 참여자와 유족으로 등록된 후부터 동학농민혁명유족회 회원으로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벌써 1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네요. 동학농민혁명 특별법이 제정된 지 15년 후인 지난 2019년 동학농민군이 전라감영군을 맞아 크게 승리한 5월 11일이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로 제정되었잖습니까? 이런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유족의 한사람으로서 그 감회가 남다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족한 제가 광주광역시 동학농민혁명유족회 회장을 맡아서 일하면서 늘 부족하지만 참여자 후손으로서의 도리를 다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잡고 있습니다.
문) 회장님께서는 광주․전남지역은 물론이고, 전국을 아우르는 (사)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와 전국에서 펼쳐지는 동학농민혁명 정신선양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계십니다. 그 과정에서 드는 생각들이 참 많으실 것 같은데요.
답) 그렇지요. 2019년 기념일이 제정된 후 매년 5월 11일 문화체육관광부 주최로 동학농민혁명기념식이 거행되었습니다. 기념일 제정 후 정부 주최로 열린 첫 번째 기념식은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개최되었고, 그 뒤로 전북 정읍시에 있는 황토현전적지에서도 열렸습니다. 기억에 남는 기념식은 2021년도에 경복궁 안 흥례문 앞마당에서 열린 기념식입니다. 매년 거행된 기념식이 우리 참여자 유족들에게는 다 감회가 깊을 수밖에 없지만 경복궁 안마당에서 열린 제127주년 동학농민혁명기념식은 정말로 잊을 수 없습니다. 일본군이 경복궁을 무단점령하고 고종 임금을 인질로 잡고 국정을 농단하니까 경복궁에 일본놈들을 몰아내려고 다시 일어난 것이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 아닙니까? 그런데 일본군과 관군에게 무기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동학농민군이 쓰러진 후 실로 127년 만에 정부 주최로 열린 기념식이 경복궁 안마당이었으니까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었지요. 참여자 유족의 한 사람으로서 정말 눈물이 났습니다.
문) 회장님께서 광주·전남지역은 물론이고 다른 여러 지역에서 펼쳐지는 동학농민혁명 정신선양사업을 함께해오면서 느낀 점이나 바람이 있으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답) 네, 우리 전라도 지역에 있는 무안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장흥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장성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에서 주최하는 행사에도 참여하지만 기념재단이나 전북 정읍 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 충남 태안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공주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등이 주최하는 행사에도 많이 참여합니다. 그때마다 느끼는 것은 행사가 열리는 장소들이 대체로 유적지들로서 정비가 잘 되어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우리 전남지역은 아직 동학농민혁명 관련 유적지들이 제대로 정비되어 있지 못하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가슴이 아픕니다. 한편으로, 보다 더 열심히 활동을 해서 우리 선조들의 숨결이 서린 유적지를 잘 정비해내야겠다는 마음을 다잡곤 합니다. 재단에서 많은 정신선양사업을 추진하고 계시지만 우리 전남지역의 유적지를 환경정비하는 일에도 각별히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합니다.
문) 네, 회장님. 우리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서도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전국의 유적지들을 환경정비하려면 어느 지역에 어떤 유적지가 있는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에 재단에서는 지난 2011년부터 2013년까지 3년에 걸쳐 전국에 분포한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현황조사를 실시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2년 전인 2021년에도 전국에 분포한 유적지 및 기념시설물에 대한 연구조사를 실시했습니다. 그래서 확인된 유적지 숫자가 378곳입니다. 이들 유적지마다 우선적으로 안내판을 세우기 위해 문화체육관광부 등 관계기관과 사업예산을 세우고자 적극적으로 협의하고 있습니다. 사업예산 확보를 위해 더욱더 힘을 기울이겠습니다. 회장님, 얘기가 나온 김에 광주광역시 일대 유적지를 소개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답) 네, 광산구청 인근에 있는 갑오년 당시 집강소가 설치되었던 ‘광주관아 터’(광주광역시 동구 광산동 13 일대)가 있습니다. 그리고 동학농민혁명 당시 손화중 장군이 지휘한 광주지역 동학농민군이 나주 수성군과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던 ‘용진산 전투지’가 있고, ‘침산 전투지’가 있습니다. 수많은 동학농민군이 관군과 민보군에게 학살당한 가슴 아픈 장소들입니다. 129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현장에 작은 추모비나 위령비 하나 세워져 있지 않아 후손으로서 얼굴을 들고 다니기가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기념재단에서도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으니까 방치된 유적지들에 대한 정비사업을 서둘러 줄 것을 당부드립니다.


침산 전투지 (광주광역시 광산구 하산동 446-2) : 동학농민혁명 당시 광주지역 농학농민군과 나주 수성군 사이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
문) 네, 회장님. 회장님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오늘 긴 시간 동안 인터뷰에 응해주신 것에 대해 깊이 감사드립니다. 혹여 빠뜨린 얘기나 더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특별히 첨언할 것은 없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계승․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 늘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먼 길 마다하지 않고 찾아와 인터뷰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문) 네, 회장님. 내내 건강하시고, 하시는 일마다 잘 풀리기를 기원드립니다.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