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자 한달문의 손자 한우회
일시: 2023. 11. 21.(화) 11시
장소: 나주시 봉황면 용전리 한우회 님 댁
문) 이번 호 『녹두꽃』유족 인터뷰에는 참여자 한달문(韓達文 1859~1895) 님의 손자 한우회(韓宇會) 선생님을 모셨습니다. 선생님 반갑습니다. 먼저, 본인 소개 부탁드립니다.
답) 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 나주지역에서 활동했던 참여자 한 달자 문자 님의 손자 한우회입니다. 저는 1936년 화순군 도곡면에서 태어나서 여섯 살 무렵에 나주군 봉황면 지금 이 마을로 이사 와서 지금까지 농사를 지으면서 80년 넘게 살아왔습니다. 옛날에는 많이 그랬던 것처럼 저도 태어난 건 1936년인데 호족이 2년 뒤에 등록되어 주민등록상에는 1938년으로 되어 있어요. 2004년 특별법이 제정되어 제 조부님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로 확인되고, 저도 유족으로 등록되어서 동학농민혁명유족회 활동에 나름대로 열심히 참여해왔는데, 지금은 나이가 들어가니 몸도 무겁고 해서 행사에 많이 참여하지 못해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문) 2004년 3월 동학농민혁명 관련 특별법이 제정되고, 그해 9월에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동학농민혁명참여자 명예회복심의위원회’가 설치되었습니다. 그때는 각 광역 자치단체와 시·군 지자체에 참여자 신청을 받는 업무를 보기도 했는데, 그 무렵에 신청서를 제출하여 조부님과 선생님이 참여자 그리고 유족으로 등록된 것이지요?
답) 네, 그렇습니다. 특별법이 제정된 뒤에 제 큰집에 한승구라는 조카가 있는데, 그 조카가 저의 조부님과 관련된 자료들을 찾아서 신청서를 작성해서 제출하였습니다. 그 뒤에 동학농민혁명 연구자를 비롯해 참여자 명예회복 심의위원회 관계자 분들이 이곳 나주에 내려와서 큰집 식구들은 물론이고, 저에게 조부님에 대해 묻는 등 여러 가지 조사를 하였습니다. 그때 우리 집 족보도 살펴보고, 제 백부님이 남긴 서책도 살펴보고 그렇게 해서 그 이듬해에 참여자로 등록이 확정되었다고 연락이 왔고, 그 뒤에 참여자 유족 통지서도 받았습니다.
문)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신 한 달자 문자 조부님의 자손은 많았나요?
답) 아니에요. 아들 둘을 두셨어요. 제 아버지와 아버님의 형님 이렇게 두 형제를 두었어요. 저의 백부(伯父)님은 용자 수자를 쓰셨고, 제 아버님은 기(起)자 동(東)자를 쓰셨어요. 저의 아버지는 삼 형제를 낳으셨는데, 백부님은 손이 없이 돌아가셨어요. 아버님 말씀으로는 백부님께서 글에 능하셔서 글을 가르치는 일도 하셨고, 서책도 많이 쓰셨다고 들었어요.
문) 그럼 참여자 및 유족등록 신청서에는 선생님 형제분들도 함께 유족으로 신청하였고, 등록도 그렇게 되었겠네요?
답) 맞아요. 그랬어요. 제 큰집 조카가 신청서를 작성할 때 저의 조부님을 참여자로 올렸고, 유족으로 저와 저의 바로 밑의 동생인 한만효(韓萬孝), 그리고 그 아래 막내 동생 한봉용(韓鳳鏞) 이렇게 세 명을 올렸지요. 그때가 벌써 이십 년쯤 지난 때라서 그 사이에 바로 아래 동생 한만효는 죽었고, 막내 동생 한봉용은 지금 나주시 다도면에서 농사를 짓고 있어요.
문) 네, 조부님이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셨다는 얘기는 언제, 누구 혹은 어떤 분에게 들으셨는지요?
답) 동학농민혁명이 지금이야 혁명이라고 내놓고 말하게 되었지만, 얼마 전에만 해도 반란군이라서 말도 꺼내지 못했잖아요? 그래서 저는 아버님이나 어머니께 할아버지에 대한 얘기는 아무것도 듣지를 못했어요. 그래서 사실 저도 조부님과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잘 몰라요. 하여간 기억을 더듬어보면 제 조부님은 저의 백부님과 아버님 이렇게 아들 둘을 두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백부님은 글을 잘하셨다고 하는데 손이 없이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 아버님이 우리 집안 족보를 비롯해서 여러 문서들을 보관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 문서들 중에는 백부님께서 쓰신 서책들도 몇 권이 있었어요. 하여간 기억이 명확하지 않지만 제가 쉰 살 무렵 그러니까 한 30년쯤 전에 저의 큰집에서 족보를 보겠다고 해서 제가 아버지께 받아서 보관하고 있던 족보랑 서책들을 큰집에 보냈어요. 그 때 족보는 보냈지만 백부님이 남긴 서책 몇 권은 넘겨주지 않고 제가 가지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나중에 백부님 서책 중 한 권에서 중간에 끼어있던 옥중편지가 발견된 것이지요.
문) 네, 그랬군요. 백부님 서책에 끼어있던 옥중편지를 발견한 것이 언제쯤인지 기억하시나요?
답) 그게 언제쯤인지 기억이 나지 않아요. 통 생각이 안 나요. 하여간 그 옥중편지가 있는 것을 알고서도 한동안 세상에 그 편지가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어요. 솔직히 그 편지가 그렇게 중요한 것인지 어쩐지 그런 것도 잘 몰랐어요. 그러다가 나중에 전라남도 지정 무슨 문화재로 올렸어요. 그리고 몇 년 전에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서 정... 뭣이라고 했던 젊은 남자 학예사가 전화를 걸어왔고, 여기를 찾아와 전라북도 동학농민혁명기념관 전시실에서 전시를 한다고 옥중편지를 빌려달라고 해서 그러라고 하였고, 그 뒤에 그 옥중편지를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 기증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으면 없어져버릴 수도 있고 그러잖아요? 신경도 많이 써야하구요. 그래서 정부의 특수법인인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 기증하면 좋을 것 같아서 기증을 한 것이지요.
문) 네, 조부님에 대한 얘기를 좀 더 나눠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조부님이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셨다는 사실을 언제 누구에게 들으셨는지요? 그리고 조부님에 대해 기억이 나는 것이 있으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제가 조부님에 대해 아버님이나 어머니께 들은 얘기는 거의 없어요. 특히나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셨다는 그런 얘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조부님에 대해 부모님께 들은 얘기는 제 조부님이 어릴 때부터 아주 영민하셔서 젊은 나이에 무관 벼슬을 하셨다고 들었어요. 절충장군인가 뭔가 하셨다고 들었어요. 저의 아버지께서 그 교지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게 어디로 가버렸는지 알 수 없다고 하셨어요. 하여간 훌륭한 무관이었다고 들었어요. 그 외에 제가 부모님께 조부모님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다는가 하는 그런 얘기를 듣지를 못했어요. 조부님이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해서 나주지역에서 대장을 하셨다는 얘기는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전후해서 지역의 향토사학자를 비롯하여 동학농민혁명 관련 연구자 선생님들이 저를 많이 찾아왔고, 그때 알게 되었어요. 조부님이 나주지역 뿐만이 아니라 저 아래 영암과 강진, 장흥 등 곳곳을 누비며 활동하셨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러다가 1894년 12월에 영암 어디...? 라고 했는데... 하여간 영암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그때 민포군에게 조부님이 붙잡혀 나주로 이송되어 감옥에 갇혔다고 그렇게 얘기를 들었어요. 나주감옥으로 잡혀 들어간 뒤에 고문을 심하게 받았다고 들었어요. 이 무렵에 조부님의 어머니 그러니까 저의 증조모님이 쓴 편지가 그 옥중편지인 거 같아요. 하여간 조부님은 어찌어찌해서 1895년 봄에 감옥에서 풀려났는데 풀려난 지 이틀 만에 옥중에서 당한 고문의 후유증, 장독(杖毒)으로 사망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게 어디엔가 기록되어 있다고 들었어요.
문)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로 등록된 조부님의 이름이 족보와 다르다고 들었습니다. 무슨 영문인지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네, 조부님은 호적상 기록에는 한영우이고, 족보에는 한치화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의 조부님의 자는 치화, 달문이고 호는 묵헌입니다. 그리고 조부님이 돌아가신 후 족보에 동학농민군 대장으로 활동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지요.
문) 네, 선생님께서 ‘옥중편지’라고 말씀하시는 조부님의 편지가 지난해인 2022년 2월 10일 국가등록문화재 제825호로 지정되었어요. 그래서 옥중편지가 ‘동학농민군 편지(한달문 편지)’라는 정식 명칭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편지는 지난 2023년 5월 24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했습니다. 조부님이 남긴 옥중편지가 조부님의 어머니 그러니까 선생님의 증조모님께 옥에서 빼내달라고 구원을 요청한 내용인데... 이 편지의 내용처럼 증조모님이 돈 300냥 등을 보냈기 때문에 조부님이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던 것일까요?
답) 글쎄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얘기는 들은 바가 없어요. 조부님이 남긴 편지 내용대로 저의 증조모님이 돈을 보내서 감옥에서 나왔는지 어쨌는지.... 듣기로는 당시의 집안 형편이 그런 정도의 돈은 증조모님이 보낼 수 있었을 거라고 해요. 그렇지만 편지 내용대로 증조모님이 돈을 보냈기 때문에 감옥에서 나온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조부님이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이틀 뒤에 돌아가시잖아요? 그런 정황을 미루어봤을 때 증조모님이 돈을 보내서 출옥한 것이 아니라 나주감옥에서 저의 조부님을 워낙 모질게 고문해서 죽기 직전이 이르자 송장 치우기 싫어서 내보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이치에 맞을 거 같아요.
문) 네, 그 상황을 생각하니... 너무나 가슴이 아프네요. 선생님과 인터뷰를 하러 이곳에 오기 전에 미리 조부님과 관련된 자료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전라남도에서 발행한 『전남동학농민혁명사』(이상식·박맹수·홍영기 공저, 1996.)와 『동학농민혁명 인물사료탐구』(최현식, 갑오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 2004.), 『전라도소획동도성책(전)』(全羅道所獲東徒成冊_全) 등을 검토하였는데, 이들 기록에 따르면 조부님이 1894년 9월부터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고, 적극적으로 활동하다가 체포·투옥되어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동안 동학농민혁명 관련 연구자라든가 지역의 향토사 연구자 이런 분들이 선생님을 많이 찾아왔다고 말씀하셨는데. 혹여 찾아온 사람들 중 기억나는 분들이 있는지요?
답) 네, 저와 출생 연도가 비슷했던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님도 생각나고, 이상식 교수님도 생각나고 그러네요. 그리고 나주시 문화원에서도 사람들이 찾아왔고, 정읍문화원에서도 사람들이 찾아왔던 것 같아요. 그런데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더는 기억이 나질 않네요. 또 큰집 조카가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로 등록하려고 신청서를 제출한 다음에 동학농민혁명을 연구하는 분들이 찾아와서 우리 집 족보도 살펴보고 백부님이 남긴 서책들도 살펴보고, 이런저런 것들을 묻고 그랬지요.

<동학농민군 한달문의 편지>
어머님께 올리나이다.
제번하고 모자 이별 후로 소식이 서로 막혀 막막하였습니다. 남북으로 가셨으니 죽은 줄만 알고 소식이 없어 답답하였습니다. 처음에 나주 동창 유기모 시굴점에서 죽을 고생을 하다가 한 사람을 만나서 조자의 토시로 신표를 하여 보내어 어머님 함께 오시길 기다렸더니, 12월 20일 소식도 모르고 이날 나주옥으로 오니 소식이 끊어지고 노자 한 푼 없으니 우선 굶어죽게 되니 어찌 원통치 아니 하리오. 돈 300여량이 오면 어진 사람 만나 살 묘책이 있어 급히 사람을 보내니 어머님 불효한 자식을 급히 살려주시오. 그간 집안 유고를 몰라 기록하니 어머님 몸에 혹 유고 계시거든 옆 사람이라도 와야 하겠습니다. 부디부디 명심불망하옵고 즉시 오시기를 차망 복망하옵니다. 남은 말씀 무수하니 서로 만나 말 하옵기로 그만 그치나이다.
1894년 12월 28일 달문 상서
의복 상하 벌, 보신 한 벌, 만건, 토시 한 벌, 주의 한 벌, 노자 2냥, 온 사람과 함께 가 과세를 편히 할 터이니 혹 기고가 있어 못 오면 옥동 가고골 한기수에게 의복지어 보내소서.
문) 네, 선생님. 어쨌거나 선생님께서 아버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족보와 백부님의 서책 등을 잘 보관하셔서 조부님이 남긴 옥중편지가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지난 2022년 2월 10일 국가등록문화재 제825호로 지정되었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도 등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국민은 물론이고, 세계인들이 기억하고 계승해야 할 가치 있는 인류의 유산으로 길이길이 남게 되었습니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후손으로, 매우 가치가 높은 유물을 잘 보존하여 후대에 길이 남길 수 있게 한 장본인으로서 감회가 남다를 것 같습니다.
답) 어쨌거나 잘된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실 동학농민혁명을 내놓고 떳떳하게 얘기할 수 있게 된 것이 얼마 되지 않았잖아요? 그래서 참여했다는 사실을 쉬쉬하면서 살아왔잖아요? 그런 어두운 세월 때문에 옥중편지도 이제야 빛을 보게 된 거잖아요?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지고 가슴 아프지요. 조부님 때만해도 우리 집안은 잘살았다고 해요. 그런데 조부님이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셨다가 장독으로 돌아가시고 난 후 하루아침에 풍비박산이 나서 가세가 기울었고, 고향에서 계속 살 수가 없어서 인근으로 옮기는 아픔을 겪었잖아요? 어쨌거나 이제는 우리 조부님이 동학농민혁명이라는 훌륭한 일을 하셨다 그렇게 내놓고 말할 수 있어서 정말 좋습니다. 후손의 한 사람으로서 가슴 벅차지요. 그래서 늙어서 몸은 힘들지만 가능하면 동학농민혁명 기념식에는 참석해오고 있습니다. 작년엔가? 올해인가? 동학농민혁명 기념식 때 제 큰집 조카 승구가 무대에 올라가서 제 조부님 옥중편지를 낭독했잖아요? 가슴이 뜨거웠습니다. 이렇게 내놓고 우리 조상님들의 역사를 얘기할 수 있게 될 때까지 참 많은 사람들이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유족의 한 사람으로서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을 위해 전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기념사업회 관계자분들과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등에 감사하고 있어요.

한우회 님과 부인
문) 네, 선생님. 빠뜨린 얘기나 더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없어요(웃음). 특별히 더 하고 싶은 얘기가 없네요.
문) 네, 선생님 몸도 편치 않으신데 긴 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선생님 내내 건강 유의하십시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