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동남부지역의 대표적 청년 동학농민군 지도자 김인배(金仁培)

동국대 연구교수 조재곤
호남을 아우르는 동학농민군 지도자 김이내의 일대기, 1870년에 출생하여 1891년에 동학에 입도하였으며, 1894년에 사망한 김인배는 농민군 통치가 이루어질 시기에 순천·여수·광양·하동 일대를 석권하고 농민군의 후방을 책임지는 인물이었다.
영호대도소 대접주로 활약
김인배는 1870년 6월 전라도 금구 하서면 봉서마을에서 아버지 현표(顯彪)와 어머니 경주 이씨의 큰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이고 족보명은 용배(龍培), 자는 야여(陽汝)이다. 그의 집은 100여 석을 수확하고 상당수의 머슴을 거느리는 부농에 속하였는데, 8세 때 종백부 현모의 양자로 입적하였다. 그러던 중 1894년 동학농민군의 봉기가 전라도 일대에서 시작되자 김인배는 농민군에 들어가 전주성 점령에 참여하였다. 그는 원래 김덕명 포에 속해 있다가 전주성 점령에 참여하였다. 그는 원래 김덕명 포에 속해 있다가 전주성 공방전 이후부터 김개남 측근의 대접주로 활약하게 된다.
김인배는 김개남이 남원서 집강소 활동을 할 무렵인 6월 순천 지방으로 파견되었다. 그는 순천 성내에 영호도회소(嶺湖都會所)를 설치하고 농민군의 군수(軍需)를 위해 무기와 전곡(錢穀)을 징발하였다. 당시 영호대도소는 김인배를 대접주로, 유하덕을 수접주로, 정우형을 도집강으로, 권병택을 성찰로 하는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그 아래 순천 광양의 11개 면을 단위로 한 접주들이 있었다. 영호대도소는 전라도 동남부지역의 가장 대표적인 농민군 조직이었다.
경상도 하동전투와 전라도 광양전투에 참여
김인배는 순천에서 활동하다가 8월부터 경상도 하동 방면으로 진출하였다. 이어 9월 1일 전투에 김인배와 유하덕이 이끄는 농민군 1만여 명이 출전하였다. 결과는 농민군의 대승리로 민보군과 향병은 달아났다.
농민군은 9월 2일 하동부 관아에 도소(都所)를 설치하고 집강소 활동을 시작하였다. 하동집강소는 약 2개월 동안 활동하였는데, 이때 농민군들은 민보군 거점인 화개동 500여 채에 불을 질렀고, 김인배는 처음 며칠간 이곳에 머물렀다.
김인배는 하동전투 승리 이후 진주로 갔다. 영호대도소의 농민군과 현지의 농민군은 9월 14일 진주성에 입성하여 옥문을 부수고 갇혀있던 사람들을 풀어주었다. 9월 17일에는 남원과 구례, 익산 등지의 농민군도 이 지역 농민군 대열에 합류했다. 김인배는 농민군 1천여 명을 이끌고 18일 진주로 들어와 대도소를 설치했다.
그러나 10월 18일 하동에 들어온 일본군과 진주병영의 군사, 토포사가 이끄는 중강군들은 22일 광양 섬거역에서 농민군과 접전을 펼쳐 10여명 이상을 살해하였고, 당일 광양의 농민군 1천여 명은 섬진강을 건너 하동부를 공격하였다. 이때 김인배는 섬진나루로 진격하는 부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화기공격으로 농민군들은 무기를 버리고 달아났고, 김인배 또한 산골에 숨어 있다가 후퇴하였다.
전주 퇴각 후 하동과 광양전투에서 패한 김인배는 이에 좌절하지 않고 10월 말 이후 유하덕과 함께 순천과 광양의 농민군을 다시 규합하여 여수의 좌수영 총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세 차례에 걸친 좌수영 공격과 처형
황현(黃玹)의 「오하기문(梧下記聞)」에 따르면 김인배가 좌수영을 공격하려 한 것은 뱃길을 끊어 세금상납과 상거래를 차단하려는 목적에서 비롯한 것이라 한다. 11월 10일 첫 번째 공격에서 좌수영을 함락시키지 못한 채 양측이 별다른 피해 없이 일단 순천으로 후퇴하였다. 그리고 11월 16일 다시 습격하여 감영병과 성 밖에서 접전 후 후퇴하였다. 그러나 좌수영 수사 김철규는 통영의 일본 해군 측량선 츠쿠바호(筑波號) 함장구로오카(黑岡)에게 서한을 보내 동학농민군 섬멸을 요청하였다. 이에 일본군 100여 명이 진남관으로 들어왔다. 드디어 11월 22일 농민군 수만명은 덕양역 전투를 시작으로 최후의 결전을 개시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공격으로 농민군들은 일방적인 수세에 몰렸고, 그날 밤 좌수영 격전에서 이풍영이 이끄는 좌수영 군사들의 습격으로 또다시 패주하였다.
김인배는 이후 순천을 거점으로 주변 일대에서 활동을 지속하였다. 그러나 12월 초 순천, 광양, 구례 등지에서 민보군이 조직되었고, 이들은 숨어있던 농민군들을 체포 처형하는 등 잔인한 보복을 개시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김인배와 유하덕은 1천여 명을 이끌고 순천에서 광양으로 옮겼다. 그러나 12월 7일 광양의 민보군 김석하 등은 아전들과 함께 농민군 대토벌전을 펼쳐 김인배를 비롯한 농민군 40여 명을, 며칠 후에는 다시 100여 명을 체포하였다. 김인배는 이때 봉강접주 박흥서 등 부하 23명과 함께 참수 처형된 후 광양객사 문 앞에 효수(梟首)되었다. 이때 그는 약관 25세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