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집회와 금구집회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 이병규
동학교단, 보은에서 집회를 개최하다
광화문 복합상소에서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하고 오히려 주동자에 대한 조선정부의 탄압이 뒤따르자 동학교단은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동학교단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이 많은 인원이 참여하는 대규모 집회였다. 광화문 복합상소 직후 동학교단의 중심세력은 동학도소가 있는 충청도 보은과 청산 등지로 내려갔다. 최시형은 1893년 3월 10일 곧바로 팔도의 모든 교인들은 보은 장내리로 모이라고 지시하였다. 3월 13일부터 보은에 모인 행렬은 3월말까지 지속되어 동학교도 2만여명 정도가 집결했다. 관에서 파악한 것만 보아도, 경기도 수원·용인·양주·이천·안산·송파·안성·죽산, 강원도 원주, 충청도의 청안·진천·청주·목천·옥천·영동·청산·비인·연산·진잠·공주·문의·태안, 전라도 함평·남원·순창·무주·태인·영광·장수·영암·나주·무안·순천, 경상도 성주·선산·상주·김산·안동·하동·진주·인동에서 동학교도들이 보은집회에 참여했다. 전국 각지에서 동학교도가 모인 것이다.
보은집회는 2만명이나 되는 엄청난 인원이 모인 대규모 집회였다. 그러나 그에 따른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지금에 이르러 백성들이 도탄에 빠진 것은 방백수령의 탐학무도함과 세호가(勢豪家)의 무단(武斷)에 있으니 만약 지금 이를 씻어 버리지 못하면 어느 때에 나라의 태평성세와 백성의 편안함이 있겠는가”라며 집회군중이 아직 기세를 올리던 때, 조선 정부는 3월 25일 충청감사 조병식을 파직하고 집회군중을 해산시킬 선무사(宣撫使)로 어윤중(魚允中)을 보냈다. 그리고 충청병사 홍재희(洪在羲, 홍계훈)에게 군사 3백명을 이끌고 보은으로 가게 했다. 1893년 4월 1일 어윤중은 보은군수 등과 함께 찾아와 “탐학한 관리들을 엄히 징벌할 것이니 각자 집으로 돌아가라 만약 이후에도 흩어지지 않으면 다시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임금의 윤음을 읽고 해산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동학교단 지도부는 “각하께서 친히 임금의 말씀을 포고하시니 어찌 감히 받들지 않겠습니까. 뜻을 밝히 받들어 향리로 해산하겠습니다. 각하께서 이 수만 생령을 살리셨습니다.”라고 답하며 3일 안에 해산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최시형, 서병학 등 동학교단 지도부는 수만명의 교도를 남겨 두고 곧바로 밤을 틈타 보은을 빠져 나갔다. 이튿날부터 보은에 모인 군중 역시 하나씩 해산하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보은집회를 이끈 동학교단 지도부는 사회변화를 갈망하며 모여든 2만여명의 세력을 뚜렷한 성과없이 너무도 쉽게 흩어 보내고 말았다. 매우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 그리고 민회(民會)

보은집회 터
그렇기는 하지만 보은집회에 두 가지 점에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하나는 교조신원에 머무르지 않고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를 내세워 서양과 일본 등 외세를 몰아내야 하는 시대적 과제를 인식하고 그것을 해결하고자 하였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보은집회의 과정과 내용이 “민회(民會)”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동학교단 지도부는 1893년 3월10일 보은의 성문밖에 통문을 붙였다. “지금 일본과 서양오랑캐가 나라 한가운데 들어와 큰 난리를 칠 지경이다. 진실로 지금 서울의 형편을 보건대 끝내 오랑캐의 소굴이 되는지라 … 우리들 수만이 죽기로서 힘을 합하여 일본과 서양오랑캐를 쓸어 대보(大報)의 의리를 본받고자 한다.”라고 쓰여 있었다. 척왜양 의식이 전면에 드러난 통문이었다. 보은집회는 이렇게 최제우의 신원 대신에 척왜양의 기치를 전면에 내걸며 시작되었다. 동학 집회운동이 동학의 공인요구라는 종교적 성격과 함께 정치적 성격을 띄어 갔던 것이다.
관의 보고에 따르면, 여기에 모인 이들은“재기를 갖추고서도 뜻을 얻지 못해 불평불만에 차 있는 자, 탐관오리가 날뛰는 것을 분하게 여겨 백성을 위해 목숨을 바치려는 자, 외국 오랑캐가 우리의 이권을 빼앗는 것을 분통하게 여겨 망령되이 그들을 내쫓는다고 큰소리치는 자, 탐욕스러운 관리의 수탈과 학대를 받아도 호소할 곳이 없는 자, 서울과 지방 토호의 횡포에 시달려 스스로 목숨을 보전할 수 없는 자, 죄를 짓고 도망하는 자, 감영과 군현의 관속으로서 의지할 곳이 없어 흩어져 살던 자, 농사를 지어도 쌀 한 톨도 남지 않고 장사를 하여도 한푼도 남길 수 없는 자, 무지몽매하여 풍문을 듣고 즐겨 들어온 자, 모진 빚 독촉을 견디지 못하는 자, 상놈이나 천민으로 출세해 보려는 자”들이었다.
이때 보은에는 동학교도 이외에도 당시 사회구조에 희생되거나 큰 불만을 가진 농민들이 모여 집회군중을 이루고 있었다. 이들은 산 아래 평지에 성을 쌓고 그 안에서 대오를 정비하며 ‘척왜양창의’라고 쓴 깃발을 내거는 한편, 새로운 방문과 통문을 냈다. 이에 당황한 보은군수는 해산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보은의 교인들은 ‘창의함은 오직 척왜양에 있으니, 비록 관령(官令)이라고 그칠 수 없다. 또 동학은 처음부터 사술(邪術)이 아니며, 설사 사술이라 일러도 임금이 욕당하고 신하가 죽는 지경에 이르러서는 충의(忠義) 하나 뿐이니, 각처 유생이 한마음 한뜻으로 죽음을 맹세하고 충성을 다하고자 한다’, ‘일본과 서양오랑캐를 치겠다는 선비를 죄주어 가둔다면 화를 주장하는 매국자를 상준단 말인가 … 혹 미혹한 자가 관령에 순종하여 왜양의 심복이 될까 두렵다’라는 글을 내어 해산령을 거절하면서 척왜양 의지를 더욱 강력하게 드러냈다.
한편으로 보은집회에서 눈여겨 볼 점은 민회(民會)라는 개념의 등장이다. 어윤중의 보고에 의하면 당시 보은집회에 모여든 이들이 “우리의 이 회(會)는 척촌(尺寸)의 무기도 손에 쥐지 않았으니 민회(民會)라 할 만하다. 일찍이 들으니 각국에 또한 민회(民會)라는 것이 있어서 조정의 정령(政令)이 민국(民國)에 불편한 것이 있으면 회의를 열어 강정(講定)한다 하니 이번 일을 어찌 비류들의 일이라 하겠는가”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즉 보은집회 참가자들은 자신들의 활동을 일종의 민회(民會)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자신들이 참여한 집회의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하였다. 이는 진전된 민권(民權)의식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또 종교운동에서 그치지 않고 정치적 성격까지 띄어갔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시대정신에 부합된 면모를 보였다고 할 수 있다.
변혁지향세력이 주도한 금구집회

금구집회 터
보은집회가 한창일 무렵 전라도 금구현 원평에서도 동학교도들이 집회, 즉 금구집회가 개최되었다. 금구현 수류면 원평리에서 집회가 열렸다는 사실은 『일성록(日省錄)』, 『취어(聚語)』, 『속음청사(續陰晴史)』, 『동도문변(東徒問辯)』, 『토비대략(討匪大略)』, 『남원군종리원사부동학사(南原郡宗理院史附東學史)』, 『시천교역사(侍天敎歷史)』 등 관변측 자료, 유생측 자료, 동학교단측 자료 등 1차 사료에서 확인된다.
금구집회는 1893년 3월 21일 이전에 이루어지고 있다. 이 시기는 보은집회가 진행되고 있던 때이다. 『일성록』이 금구집회의 실재와 시기를 증언해 주고 있다. 『일성록』고종 30년(1893년) 3월 27일자 기사에 따르면 사폐(멀리 부임하는 신하가 임금에게 하직인사 하는 것)하는 새로운 전라감사 김문현과 고종은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었는데 “고종이 이르기를 ‘말이란 한번 두 번 옮기다보면 터무니 없는 말을 지어내게 되는 것이나 족희 믿을 것이 못된다. 호남에서도 금구에 가장 많다하니 전주감영에서는 어느 거리인가, 먼저 그 소굴을 격파하여 금단하고 일소하는 방도를 삼도록 하라’라고 하니, 김문현이 답하기를 ‘30리 가량 되는데 금구 원평에 과연 취당하고 있다 하옵니다’라고 하였다”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금구집회에 모인 동학교도들은 1만명이 넘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한 금구집회의 주도자는 전봉준이었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견해이다. 이와 관련하여 정창렬은 ‘동학농민혁명의 최대 지도자인 전봉준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세력을 형성하였는가에 대해, 동학교문의 교조신원운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전봉준이 활동을 전개하여 1893년 3월 독자적 세력집단으로서 ‘금구취당’을 형성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1893년 사발통문 서명자로 출현하였으며 이후 고부민란에서 처음으로 지도자로 출현하였다’고 주장하여 금구집회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였다. 또한 조경달은 ‘금구 지방을 중심으로 한 전봉준의 투쟁 기반은 이미 이 금구집회에서 던져졌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거나 ‘금구집회는 스스로의 역량을 집약시켜 보은집회 참가자를 끌어들여 단번에 반정부운동을 본격적으로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는 견해는 눈여겨볼 대목이다.
금구집회는 보은집회의 연장선에서 이루어진 것이지만 그 정치적 지향은 그보다 더 확고했으며 분명한 목적의식 하에서 이루어졌다. 금구집회를 주도한 세력은 바로 삼례집회 이후에도 흩어지지 않은 채 서울의 괘서사건을 주도했던 전봉준 등 전라도의 변혁지향세력이었다. 이들은 동학의 집회운동 과정에서 서서히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정치적 지향을 공고히 하면서 집회운동의 성격을 변화시켰다. 이러한 금구집회는 앞으로 있게 될 거대한 역사적 사건인 동학농민혁명으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참고문헌
신순철·이진영, 『실록동학농민혁명사』, 서경문화사, 1998 박찬승, 「1892․1893년 동학교도들의 ‘신원’운동과 ‘척왜양’운동」, 『1894년 농민전쟁연구 3』, 역사비평사, 199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