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관을 찾아서
이대흠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관 운영실장

석대들 전투 재현 전시물(농민군이 사용한 장태)
동학농민혁명의 4대 전적지는 황토현 전적지, 황룡 전적지, 우금티 전적지, 석대들 전적지다. 이 중 마지막으로 동학농민혁명군(이하 농민군)의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 바로 장흥의 석대들 전적지다. 올해 4월 26일 석대들 전적지에 개관한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관(이하 기념관)을 방문해 이대흠 운영실장(기념관)과 장모창 학예연구관(장흥군청)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담을 나누며 떠올렸던 것은 포기하지 않고 최후까지 역사에 목숨을 부딪쳤던 장흥 농민군의 혼이었다.
장흥동학농민혁명과 석대들 전적지의 역사적 의미
동학농만혁명은 어떻게 끝을 맺게 되었을까? 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일반적으로 우금치에서 통한의 패배를 맛본 농민군이 논산 황화대, 김제 원평, 태인으로 후퇴에 후퇴를 거듭했으며, 결국 주력부대가 해산되고 지도자들이 체포되어 처형되면서 막을 내리게 되었다는 답변이 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이대흠 운영실장은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비록 혁명의 불빛이 희미해졌을지는 모르나 장태장군이라 불렸던 이방언 장군을 구심점으로 장흥에 모여들었던 농민군들은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벽사역, 장흥부성 등을 점령하며 승승장구했다.
이들이 주목받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질문에 이대흠 운영실장은 영웅들이 사라진 역사이기 때문이라 답했다. 영웅주의적 시각의 동학농민혁명사는 지도자들의 죽음과 함께 끝을 맺고만다는 것이다. 그는 장흥의 석대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으며, 석대들 전투야말로 민중봉기의 극점에서 실패로 끝나게 된 마지막 지점이었다고 얘기했다. 3만여 명의 농민군이 참여해 2천에서 3천여 명의 희생자를 낸 이 전투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의 대규모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
농민군들은 석대들 전투 이후에도 일본의 침략야욕에서 나라를 구한다는 목표를 포기하지 않았다. 전라남도에서는 도서지방을 중심으로 1915년까지 활발한 항일의병투쟁이 벌어졌다. 1만 5천에서 1만 7천여 명의 의병이 활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경기도의 의병이 5백 명가량으로 추정된다는 것과 비교하면 어마어마한 숫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사실은 석대들 전투 이후 도서지방으로 피난했던 농민군들이 항일의병에 가담했던 것으로 본다면 아귀가 척 들어맞게 된다. 석대들 전적지는 어떠한 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나라를 구하고자 했던 구국 영웅들의 의지를 품고 있는 것이다.
기념관설립배경
장모창 학예연구관은 기념관이 어떻게 설립되었냐는 물음에 대해 사적지 지정에 관한 이야기부터 차근차근 풀어나갔다. 기념관 건립사업을 수립한 이후 석대들 전적지를 사적지로 지정 신청했으며, 2009년 5월에 국가지정사적 제 498호로 지정됐다. 기념관은 2010년부터 본격적으로 건립공사가 시작되어 2014년 완공되었다. 이후 1 년간 내부 인테리어 공사 등 준비를 마치고 올해 4월 26일 개관식을 가졌다. 개관식에는 이낙연 전남도지사, 김성 장흥군수 등 많은 이들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고 한다.
기념관의 설립위치 또한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다. 장모창 학예연구관은 기념관이 세워진 곳이 과거 석대들에 존재하던 언덕인 ‘작은 석대’가 있던 곳이며, 동학농민혁명 이후 여러 공사를 거치며 훼손된 ‘작은 석대'를 복원하는 의미로 현재 위치에 기념관이 들어서게 되었다고 언급했다.
이대흠 운영실장은 기념관이 중정(中庭)을 품은 독특한 구조로, 전체적인 모습은 살아있는 역사의 눈동자를 형상화한 것이라 덧붙였다.
기념관살펴보기

 
기념관 내부는 크게 영상실, 전시실, 체험장, 토론실로 이루어져 있었다. 데스크를 지나 가장 먼저 보이는 영상실에는 15분가량의 교육영상이 정해진 시간마다 상영된다. 해당 영상은 동학농민혁명의 전체적인 내용과 장흥의 동학농민혁명, 그리고 석대들 전투까지 전체적인 부분을 아울러 설명하며, 실사영화와 만화영화를 넘나드는 구성을 통해 다양한 세대의 흥미를 끌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전시실은 전시물과 각종 기록물, 영상을 통해 장홍 동학농민혁명을 집중적으로 소개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농민군과 일본군의 모형을 통로 양쪽으로 전시해 석대들 전투를 재현해 둔 부분에서는 마치 역사 현장의 한복판에 서 있는 듯 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특히 전시실 마지막을 장식한 [영원의 불]코너는 중앙에 홀로그램으로 표현된 불꽃 너머로 이름이 밝혀진 석대들 전투 희생자 457명의 명단이 보이는 구조가 인상적이었다. 이대흠 운영실장은 아직도 많은 희생자 분들이 밝혀지지 못한 상태지만, 이정도 숫자의 명단을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은 장흥사람들에게 흐르는 역사적 핏줄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라 언급했다.
체험실은 사발통문에 이름 새기기, 장태 굴리기, 윤성도 뱃사공 되어보기 등 아동청소년들이 역사체험을 할 수 있는 공간이며, 바로 옆에 위치한 토론실은 현재 동학농민혁명 관련 강의를 진행하는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기념관의 미래
이대흠 운영실장은 앞으로 기념관의 운영에 대해 체험학습의 중요성을 먼저 언급하였다. 현재 역사에 대한 체험학습 할 수 있는 곳은 매우 드물다. 이런 상황에서 기념관이 역사적 체험학습을 충분히 기획할 수 있을 정도로 시설이 잘 갖추어져있으며, 체험실, 토론실 등을 적극 활용해 역사체험교육을 활발히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기념관 주위에 향교, 장홍동학농민혁명기념탑 등 역사적 의미를 간직한 곳이 산재해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이를 연결해 역사탐방길 조성을 계획하고 있다. 이대흠 운영실장은 이 역사탐방길이 조성되면 방문객들이 역사체험을 통해 하루를 뜻 깊게 보낼 수 있는 공간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전망했다.

 
대담 이후 기념관 입구에서 기념관 건립의 실무를 수행한 대담자 두 분의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기념관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서 소박하지만 단아하고 강인한 우리 산하의 들꽃이 가득 머금은 진한 향기가 피어나는 것만 같았다. 긴 겨울의 한파를 이겨낸 뿌리, 줄기, 가지의 노고가 있었기에 꽃이 피고 탐스러운 열매 맺을 날을 맞이할 수 있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