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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가을 61호
나주의 동학농민혁명 유적지-1

나주의 동학농민혁명 유적지-1


함박산전투지



함박산 원경


  동학농민혁명 제 2차 기포 때 손화중 장군과 최경선 장군은 일본군이 바다를 통해 전라도로 공격해 들어올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에 대비해 광주에 남았다. 그리고 나주목사 민종렬이 수차례에 걸친 동학농민혁명군(이하 농민군)의 공격을 막아낸 나주성을 점령하기 위해 여러 차례 공격했다. 정보대로 일본군이 바다를 통해 공격해올 경우 나주의 관군은 일본군과 연합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었다.


  1894년 10월 21일 농민군은 광주의 침산 일대에서 도통장 정태완이 이끄는 나주의 수성군과 전투를 벌여 패했으며, 11월 13 일 역시 광주의 용진산 전투에서 패해 후퇴했다.


  이후 11월 23일 손화중 최경선 장군은 광주지역 농민군을 이끌고 오권선 접주가 이끄는 나주의 농민군과 합세해 재차 나주성 공격에 나섰다. 『금성정의록』에는 ‘이날 수만 명의 농민군이 금안면에 있는 남산촌의 태평정 등지에 나아가 주둔하고, 읍과 10리 가량 떨어진 곳까지 와서 나주성을 도륙하겠다고 공공연히 말했다’라 언급되어 있다. 이들은 나주성 북문 밖 함박산까지 접근했으나 밤이 되면서 손가락조차 펴기 어려울 정도로 몰아닥친 강추위 때문에 남산촌 쪽으로 후퇴했다고 한다.


  수성군 측의 기록은 이와 차이가 있다. 이날 밤 수성군 측 막사에 불길이 옮겨 붙은 것이 화약에까지 번져 터지면서 대포를 연달아 쏘는 듯한 소리가 울려퍼졌는데, 농민군 측에서는 이를 관군 측의 대포 공격으로 오해해 남산촌으로 후퇴했다고 기록하고있다.


  다음날인 11월 24일 수성군 도통장 정진석이 남산촌으로 후퇴한 농민군을 공격하기 위해 출진했다. 수성군은 남산 앞에 당도해 풀숲에 몸을 숨기고 농민군의 동정을 염탐했다. 농민군은 소를 잡아 식사를 하려던 참이었다. 모두가 방심하고 있는 그 틈을 타서 수성군은 천보총을 쏘며 공격했고, 농민군은 갑작스런 공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큰 피해를 입고 후퇴했다. 나주의 유생 이병수는 ‘죽은 시체가 들판에 가득했고 흐르는 피가 냇물을 이루었다’고 농민군의 피해상활을 기록했다.


  11월 27일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아직 수만 명에 이르는 농민군을 이끌고 광주로 돌아온 손화중 장군은 12월 1 일 휘하의 농민군을 해산하고 광주를 떠났다. 이후 고창군 질마재에 있는 이모씨 재실에 숨어들었다가 12월 11일 주민들에게 붙잡혀 고창현에 수감되었다가 일본군에 넘겨졌다. 최경선 장군 역시 광주를 떠나 몸을 숨겼으나 12월 3일 화순 동복에서 체포되어 일본군에 인도되었다.


  이후 손화중 최경선은 전봉준 장군과 함께 나주에 수감되었다가 서울로 압송되었고, 일본의 사주를 받은 조선정부의 재판올 받고 1895년 3월 29일 사형이 선고된 후 교수형에 처해졌다.



나주목사 내아(內衛) 전봉준 • 민종렬 회담지



 

  나주목사 민종렬은 1894년 4월부터 나주에 수성군을 조직해 농민군의 공격에 대비했다. 수성군의 주요 간부직을 맡은 인물들은 대부분 나주를 대표하는 향리 가문 출신으로 이루어졌다. 대표적으로 도통장에 호장 정진석, 후군장에 김창균, 난후별장에 박재구 등이 있으며, 이들은 수성군에 필요한 재정을 지원하기도 했다.


  나주목사 민종렬은 조선정부측과 농민군 사이에 맺어진 전주화약에 따라 귀가하는 농민군의 신변을 보장한다는 약속을 어기고 32명의 농민군을 살해한 인물이다. 나아가 나주목사 민종렬과 그 휘하의 관군 등은 한양으로 진군하는 농민군의 후방에서 위협할 수 있는 위험한 적대세력의 근거지였다. 따라서 최경선 장군은 나주의 대접주 오권선과 합세해 1만여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7월 5일 서성문을 공격했다. 그러나 나주목사 민종렬, 도통장 오권선이 지휘한 수성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나주성 점령에 실패하고 말았다.


  전봉준 장군은 이후 최경선 장군에게 나주성을 공격하지 말 것을 재차 당부했고, 더불어 농민군에 호의적이었던 전라감사 김학진에게 복귀하는 농민군을 무단으로 살해한 나주와 금구의 수령을 파직할 것을 요구했다. 김학진은 이를 받아들여 7월 18일 나주목사 민종렬과 나주 영장 이원우를 파직했고, 19일에는 금구현감 김명수도 파직했다. 그러나 나주목사 민종렬 파직에 응하지 않은 채 후임자의 부임을 막아가며 농민군에 적대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전봉준 장군은 이 문제를 물리적 해결보다 합의를 통해 해결하고자 했다. 따라서 전봉준 장군은 8월 13일 전라감사 김학진의 서찰을 들고 비무장인 상태로 부하 10여 명과 함께 나주목으로 들어가 민종렬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전봉준 장군과 민종렬의 면담은 나주목 내아에서 이루어졌다. 면담에서 전봉준 장군은 전라감사와 합의된 관민상화에 따라 상호대립 해소를 위해 나주 수성군의 해산을 권고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회담에서 민종렬은 전봉준 장군의 제의를 거절, 회담은 무산되고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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