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시형과 동학의 푸른꿈을 함께한 손천민 (孫天民, 1857-1900)
김양식 충북발전연구원 수석연구위원
동학농민혁명 시기 동학교단을 이끈 지도자는 2대 동학교주 최시형이란 사실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의 오른팔 역할을 하면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함께 나눈 손천민에 관해서는 잘 모르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아니, 잊혀진 인물인지도 모른다. 손천민은 최시형의 최측근에서 조언을 아끼지 않았고 각종 문서를 작성하는 등 핵심 참모역할을 하였던 인물이다.
1880년대에 들어와 동학은 충북 전역으로 들불처럼 퍼져나갔다. 뒷날 동학농민혁명을 이끈 충북 출신의 출중한 인물들이 이 무렵 대거 동학에 들어왔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손병희(1861-1922). 서장옥 (1851-1900) 등이다. 손천민(1857-1900)도 그 중의 하나이다.
손천민은 충북 청주시 서원구 남일면 신송리 솔뫼마을 출생으로, 학식과 문장이 매우 뛰어났으며 철저히 동학의 길을 걸은 인물이었다. 그는 아전의 아들로 태어났다. 동학에 들어온 것은 1882년으로, 그 이후 최시형, 손병희와 함께 열심히 동학을 포교하였다.
손천민은 동학교조신원운동에도 앞장을 섰다. 동학교단은 1892년 7월부터 대대적인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하였다. 해월 최시형은 서장옥과 서병학 두 사람의 요청을 받아들여, 청주 솔뫼마을 손천민의 집으로 거처를 옮긴 뒤 교조신원운동 전개에 필요한 사항을 지시하였다. 동학도들은 공주와 삼례 등지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고 교주 최제우의 신원을 정부에 요청하였는데, 1893년에 들어와 광화문 복합상소가 추진되었다. 이때 상소문을 비롯한 거의 모든 문서는 문장이 뛰어난 손천민이 작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광화문복합상소는 청주솔뫼에 있는 손천만 집에서 1차 준비를 끝낸 뒤, 1893년 2월 서울로 울라가 추진되었다. 중책을 맡은 인물은 손천만을 비롯해 손병희 · 김연국 등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온건하고 합법적인 광화문 상소청원 운동이 정부에 의해 수용될 가능성은 없었다. 남은 것은 실력행사 뿐이며, 그것이 바로 1893년 3월부터 추진된 보은 장내리 집회였다. 이때 26명의 대접주가 임명되었는데, 손천민은 청의대접주로 청주 일대를 관할하였다. 전라도에서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최시형은 부정적으로 대응하였다. 최시형은 손천민 등을 통해 동학농민군의 봉기를 만류하기도 하였다.
1894년 8월 민족적 위기가 가중되자, 전봉준은 9월 10일 삼례에 대도소를 설치하고 일본을 상대로 한 싸움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최시형에게도 사람을 보내 같이 봉기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때 동학교단 내부에서도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자고 최시형을 설득하였는데, 그 중심 인물이 서장옥 · 황하일이었다. 손천민도 최시형을 설득하는데 협조하였다.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동학교단 소속 동학군은 손병희가 직접 인솔해 전봉준부대와 연합하기 위해 논산으로 향하였다. 그 무렵 청의대접주로 활동하던 손천민은 서장옥과 함께 휘하 동학도를 인솔해 청주성 공격을 감행하였다. 손천민은 자신의 집이 있는 솔뫼마을에서 청주성 공격을 위한 준비작업을 하였다.
솔뫼마을에 모여든 동학도들은 화승총과 칼 · 화약을 마련하고 마을 뒤쪽 골짜기에서 훈련도 하였다. 동학군은 9월 23일경부터 청주성을 공격하였다. 1만명은 족히 되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관군은 동학 근거지로 지목된 솔뫼마을 등을 철저히 소탕하였다. 이때 손천민의 집도 불탔을 것이다.
그뒤 손천민은 최시형을 모시고 남진하였다. 최시형은 동학교단 보위차 전투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다. 손천민은 해월을 모시고 남진한 뒤, 12월에 들어와 다시 북상하였다. 손천민은 해월과 함께 무주를 거쳐 영동을 지나 보은에 도착한 것이 갑오년 12월 17일이었다. 이들은 보은 북실에서 머물렀는데, 이를 안 일본군과 민보군 등이 습격하여 밤새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다행히 손천민은 해월을 모시고 피신할 수 있었다.
이들은 12월 24일 음성 무극의 되자니에서 일본군의 공격을 받기도 하였으나, 무사히 몸을 숨길 수 있었다.
그뒤 최시형은 1985년 겨울 원주 치악산 밑 수례마을에 거처를 마련하였다. 그 자리에는 손천민, 손병희, 김연국 등이 함께 하였다. 해월은 세 사람에게 각각 송암, 의암, 구암이라는 호를 내려 동학의 도를 이어가도록 하였으나, 1897년에 해월이 의암 손병희에게 도통을 전수하면서 동고동낙하던 세 사람의 운명도 달라졌다.
그뒤 해월이 1897년에 잡혀 이듬해 처형되자, 손병희는 손천민을 성도주(誠道主), 김연국을 신도주(信道主), 박인호를 경도주(敬道主)로 삼아 동학을 이끌고자 하였으나 오히려 분열만을 자초하였다.
손천민은 해월이 처형된 뒤 부하 서우순과 함께 청주 산외면 서상옥의 집에 있으면서 포덕에 열중하다가 끝내 체포되어, 18년 동안 동학을 포덕한 죄로 1900년 교수형에 처해졌다.
손천민이 해월을 도와 이루고자 하였던 푸른 꿈은 무엇이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