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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가을 61호
전주화약, 그 의미를 되살리자

전주화약, 그 의미를 되살리자


 

김양식 충북발전연구원 수석연구원


  그동안 논란이 되었던 동학농민혁명 기념일이 전주화약이 체결된 5월 8일(양력 6월 11일)로 주무부서인 문화체육관광부에 건의되었다. 이를 둘러싼 논란이 현재 진행형이고 앞으로도 이어지겠지만, 일단 전주화약일이 기념일로 건의된 만큼 이 날에 맞춰 기념사업을 추진하면서 기념일을 둘러싼 담론을 이어가는 것이 바람직할 것으로 보인다.


  먼저 전주화약의 과정을 살펴보면, 1894년 3월 20일 무장에서 기포한 동학농민군은 4월 27일(양력 5월 31일)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홍계훈이 이끄는 정부군도 전주성을 포위하고 동학농민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긴장된 순간의 연속이었다. 이에 놀란 조정은 4월 29일 순변사 이원희에게 증원군을 이끌고 전주로 내려가도록 하였다.


  더욱이 정권의 위기를 느낀 조정은 청국에도 지원병을 요청하였다. 그에 따라 청국군이 5월 7일 충청도 아산에 도착하였는데, 이는 일본에 군대를 파병할 구실을 만들어 주었다. 일본도 5월 7일에 해군 420명을 서울에 주둔시켰다. 언제 어떻게 한반도에서 국제전쟁이 일어날지 모르는 급박한 순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동학농민군과 홍계훈 부대는 전주성을 사이에 두고 4월 28일과 5월 3일에 대대적인 공방전을 벌였다. 이 싸움에서, 특히 5월 3일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은 크게 패하였다.


  5월 3일 패전으로 동학농민군 중에는 크게 동요하고 도망하는 자가 속출하였다. 그러자 전봉준은 점을 쳐서 “사흘을 지나 아무 시간에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니 여러분은 걱정하지 마라. 이미 여러분은 나를 믿고 따랐으니 전쟁터에 들어와서 내 말에 따라 조금만 더 참지 못하겠는가.“ 하고 동학농민군들을 달랬다. 이 같은 상황에서 원래의 목표대로 농민군이 서울로 진격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홍계훈이 이끄는 정부군과 결사항전을 전개할 처지도 아니었다.


  결국 전봉준은 여러 사정을 감안해 정부의 철수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드디어 5월 8 일 이른 아침 양쪽 사이에 전주화약’이 체결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동학농민군은 전주성에서 철수하고, 홍계훈이 이끄는 정부군은 무사히 전주성을 수복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동학농민군과정부사이에는 일정한타협이 있었으며, 그것은 전봉준과 홍계훈 사이에 이루어졌다. 타협 조건은 농민군이 제시한 폐정개혁조항 27개조를 국왕에게 보고하여 고치겠다는 것과 동학농민군의 신변보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러한 전주화약은 동학농민군이 아무런 소득 없이 전주성에서 철수한 것처럼 평가될 수도 있지만, 동학농민군의 존재가 정부의 타협 대상이 될 정도로 성장한 점, 전주성 철수 시 동학농민군의 조직과 무장력이 거의 그대로 유지된 점, 폐정개혁에 대한동학농민군의 의지가보다 현실적으로 확인된 점 등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이것이 오히려 정부쪽에서 얻어낸 전주성 철수조건 그 자체보다도 동학농민군이 전주성 점령과 철수 과정에서 획득한 성과물이라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전주화약은 이후 집강소의 기반이 되었으며 국가적 위기에 처한 국난을 당해 민족적 대동단결이라는 민족공동체의 가치를 부각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더욱이 전주화약은 장기 동태적인 관점에서 볼 때 무지랭이 농민 대중들이 역사의 주체로 나서는 전환점이었을 뿐 아니라, 한 나라의 주체로 자리매김 되고 역사의 전면에 나서는 출발점이 되었다. 또한 그것은 21세기 바람직한 정치모형인 관민협치의 첫 한국사례이자, 수평적 정치역학을 역사적으로 증험해보인 소중한 역사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따라서 전주화약으로상징되는동학농민혁명 기념일은일반대중들이 역사의 주체가 된 기념일로, 민중적 민족공동체의 상징으로, 잘못된 정치와 사회를 바로잡아 정의사회를 구현하는 실천의 날로 승화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동학농민혁명 기념일이 있어, 국민 모두가웃을수 있고 민족이 행복한 날이 되 었으면 한다.



※ 본문에 실린 외부 집필자의 글은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의 공식적인 입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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