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인(李熙仁, 1846~1894) : 천안 세성산 전투를 지휘한 동학농민군 지도자
조재곤 서강대학교 연구교수
교조신원운동의 핵심 인물
현재 천안시로 되어 있는 충청도 목천은 2세 교주 최시형의 지시를 따르는 북접 계통의 동학이 활발히 활동하던 곳이었다. 이 지역에서도 1894년 동학농민군의 2차 봉기 시 교단의 총동원령에 따라 적극 호응하여 봉기하였다. 이 때 목천지역 농민군 봉기를 지도한 인물이 이희인과 김복용이었다.
후일 1919년 유관순 열사와 3・1운동으로 유명한 목천현 병천면 지역의 병천리 개목마을에 살고 있던 이희인은 양반 출신의 향촌 지식인이었다. 그가 동학에 언제 입도하였고 어떤 활동을 하였는지는 기록상 정확히 확인할 수 없으나 이미 동학농민혁명 이전부터 중앙정부에 의해 그의 이름과 활동이 파악되고 있었을 정도로 비중이 있는 인물이었음은 분명하다.
그것은 1893년 3월 동학의 초대 교주로 이전 1864년 처형된 최제우의 억울함을 풀고, 자유로운 포교를 위해 2대 교주 최시형을 비롯한 동학교도 수만 명이 보은 장내리에 모여 선무사 어윤중에게 청원서를 올린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때 올린 청원서는 자신들은 선왕조의 적자(赤子)로 삼강오륜(三綱五倫)과 화이(華夷)를 분별하며, 의를 드높여 왜양(倭洋)을 물리칠 것이며, 이러한 뜻을 임금에게 알려 의로움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달라는 내용들로 되어 있다. 이 청원서는 창의유생 허연, 이중창, 서병학, 이희인, 송병희, 조재하, 이근풍 등 7명의 명의로 작성되었다. 당시 김복용도 이 모임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세성산 전투를 주도
이듬해인 1894년 9월 동학농민군의 2차 봉기 무렵에 가면 전국 기포령에 따라 이희인은 동학 좌우도(左右道) 도금찰(都禁察)의 직책으로 김복용과 함께 목천에서 농민군을 규합하여 의거를 일으켰다. 이들 북접 계열 동학농민군들은 목천을 비롯하여 천안, 전의의 관아를 습격해 무기를 빼앗고 곡식을 징발하여 세성산과 작성산에 운동의 거점을 마련하였다. 9월 말에는 농민군 4천여 명이 추가로 합세하였다.
그러자 조선정부는 10월 14일 목천현감 정기봉을 소모관으로 임명하여 봉기한 농민들을 진압케 하였다. 또한 죽산부사 이두황이 이끄는 토벌군도 같은 달 18일 세성산으로 이동하였다. 21일 아침 이곳에 도착한 이두황은 세성산과 그곳에 근거한 농민군에 대해 “삼면이 심한 절벽이고 한 면만이 조금 평지였는데 진지가 매우 견고하고 넓었다. 깃발이 숲처럼 서 있었고 포성이 들판을 울렸다”고 적고 있다. 21일 하루 종일 세성산을 둘러싼 농민군과 이두황 관군의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힘에 부친 농민군들은 전투에서 패하고 그날 저녁부터 흩어지기 시작했다. 농민군으로부터 빼앗은 총과 창은 428자루, 화살 5,300촉, 탄환 2만 5천여 개, 곡식 700석 등이었다. 관군의 추격과 패잔 농민군 체포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살해되었는데, 이두황은 17명이라고 기록하였다. 그런데 세성산은 산 모양의 사자가 앞발을 딛고 응사하는 모습처럼 되어 있어 전쟁이 나면 시체가 쌓일 것이라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었다 한다. 실제로도 당시 시체가 많이 쌓여 지금까지도 ‘시체가 쌓여 이루어진 산’이라는 뜻의 ‘시성산(屍成山)’으로, 골짜기도 ‘피골’이라 부르고 있다.
전봉준과 오지영의 기억에 남아있는 인물
세성산 전투는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혁명군이 벌인 공주전투 이전인 1894년 10월 21일 이희인과 김복용이 이끄는 천안 목천 일대의 농민군이 죽산부사 이두황 부대에 맞서 싸운 전투이다. 전투 과정에서 김복용은 체포되어 현장에서 처형되었고, 이희인은 세성산에서 가까운 마을로 달아나 숨어 있었으나 지역민의 밀고로 다음날인 22일 소모관 정기봉에게 체포되었다. 이때 체포된 사람은 60여 명이었다. 그는 한철영 등 체포된 12명의 부하들과 함께 24일 북면 사기실에서 총살되었고, 그가 살던 개목마을은 불태워졌으며 가족과 지역민들도 곡식과 재물을 빼앗기는 등 심한 고통을 받았다.
동학농민혁명이 좌절된 직후 1895년 2월 11일 농민군 총 대장 전봉준은 공초(供招)에서 천안의 연루자를 사실대로 고하라는 강요를 받게 된다. 이는 이희인 혹은 김복용 등을 가리킨 것으로 전봉준과의 관계를 떠보려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전봉준은 그런 사실이 없다고 부인하였다. 이는 살아있을지 이미 죽었을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동지를 보호하려는 전봉준의 결연한 의지로 보인다. 『동학사(東學史)』의 저자로 유명한 오지영도 전봉준이 체포될 무렵 이희인과 김복용이 관군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후 심문을 받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동학농민혁명이 지난 지 한참 후에도 오지영은 이희인과 김복용이 전봉준과 함께 1895년 3월 17일 경성감옥에서 교수형에 처해진 것으로 알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