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연락과 정보 수집을 담당한 동학농민혁명군 김영달
김범중 참여자 김영달의 증손

 
문) 김범중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녹두꽃 독자 분들께 본인의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답) 네, 안녕하십니까? 저는 30여 년간 공직생활을 하다 명예퇴직한 후 초등학교 교사로 6년가량 일했으며, 현재는 고창지역 동학농민혁명 해설사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문) 증조부께서 동학농민혁명 당시 활동하신 내용에 대해 알고계시는 점을 말씀해 주십시오.
답) 증조부님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사실에 대해서는, 오래전 중앙일보에 실렸던 김흥섭 옹의 인터뷰내용을 보고 알게 되었습니다. 김흥섭 옹께서는 동학농민혁명에 직접 참여하셨던 분으로, 저희 증조부님과는 동문수학한 사이라고 합니다. 이후 동학농민혁명에 관심을 갖고 여러 자료를 접하면서 증조부님의 활동사항을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증조부께서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창의소와 농민군과의 문서연락을 담당하셨다고 합니다. 몸이 날래고 변장술에 능하셔서 황하장수(여러 일상용품을 메고 다니며 판매하는 장사꾼)로 변장해 정보를 수집하는 등의 일에 뛰어나셨다고 합니다. 2차 봉기 이후에는 동학농민군 지도자 송문수를 따라서 무장과 영광 등지에서 활동하셨다고 합니다.
문) 증조부님의 활동사항에 대해 어떤 분 또는 어떤 경로를 통해 알게 되셨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답) 저희 조부님께서는 자주 두루마기를 입고 외출하시곤 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웃 마을인 무장면 원촌리 송산마을에 사시던 김흥섭 옹을 찾아가셨던 것이었습니다. 조부님께서는 김흥섭 옹께 증조부님의 생사여부와 돌아가셨다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시신은 수습할 수 있는지 여부 등을 여쭤보러 다니셨던 것입니다. 조부님께서 증조부님의 유골을 찾아 수습하기위해 무진 애를 쓰셨지만 결국 찾지 못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돌아가신 김이남 숙부님께서 증조부님의 활동사항에 대해 전해주셨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던 증조부님의 활동사항에 대한 내용은 대부분 숙부님께서 말씀해주셨습니다.
문)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신 증조부께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아시는지요?
답) 앞서 말씀드렸듯이 증조부께서 재봉기 당시 송문수 장군과 함께 무당과 영광 등지에서 활동하셨습니다. 그러다 우금티에서 주력농민군이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부 퇴로로 후퇴하셨으나, 도중에 영광에서 관군들에게 체포되어 1894년 12월 27일에 영광관아 네거리에서 참수되셨다고 합니다. 현재 증조부님과 증조모님의 합장묘가 무장면 강남리 석수마을 후등에 위치해 있는데, 증조부님은 유해를 찾지 못해 대추나무패를 깎아 이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매년 한식날 묘를 찾아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문) 집안에 증조부님 외에도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신 분이 계십니까?
답) 증조부님 외에 집안 어른들이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셨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연배 지긋하신 분들 중 조부님이나 증조부님들의 유골이나 묘지가 없는 분들은 동학농민혁명의 희생자이실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고창지역에서도 수천 명의 동학농민군의 희생되었는데 유족등록을 받아보니 종이 한 장도 채우지 못했을 정도였다고 들었습니다. 단지 증거가 없을 뿐, 보이지 않는 사실에 더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 특별법이 제정되어 그 정신선양사업이 추진되고 있는데, 참여자 후손으로서 감회를 말씀해주십시오.
답)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동학농민혁명이 일정부분 복권되고,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설립됨으로서 정신선양사업도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유족으로서 거는 기대가 아주 큽니다. 현재 국가보훈법은 독립유공자의 범위를 을미의병, 즉 1895년의 의병활동부터로 한정하고 있다고 합니다. 동학농민혁명 관련단체나 정부 부처들이 노력하여 이를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로부터 앞당겨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일제의 침략에 맞서 적게는 10만에서 30만까지 초개같이 목숨을 바친 분들입니다. 동학농민혁명군도 국가유공자에 포함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문) 더 하시고픈 말씀이 있으실까요?
답) 동학농민혁명 기념일이 지난 10여 년간의 허송세월을 보낸 후에도 여전히 제정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약 동학농민혁명기념일이 잘못 제정된다면 훗날 역사를 배우는 후손들이 우리들에게 뭐라고 하겠습니까? 특히 동학농민혁명을 기념하는 사람들은 후손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을 것입니다. 유족의 한 사람으로서 이 문제가 지역다툼의 문제를 넘어서 정당한 기념일이 제정될 수 있기를 진정으로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