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전쟁 사료를 수집하면서
 이이화 역사학자, 前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
필자는 1970년 끝 무렵부터 서울대 규장각에서 한국본 해제집(解題集)을 내는 작업을 맡아보았다. 이럴 때 필자는 많은 자료를 섭렵할 수 있었다. 특히 동학농민전쟁 관련의 사료에 관심을 집중하였다. 그리하여 <전봉준공초>(全琫準供招) 등을 면밀하게 살펴보았고 관변기록을 정리하였다.
이어 다른 도서관에 수장된 이 관련 사료를 조사하고 검토하기도 하였다. 특히 국사편찬위원회에서 1974년 간행한 <동학란기록>을 검토하였다. 그런 과정에서 이 작업을 진행하였던 실무자를 만나서 국편에 간행되지 않은 다른 관련 기록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하여 당시 박영석 국편위원장에게 부탁해 이를 찾는데 도움을 달라고 요청하였다. 박영석 위원장은 실무자를 시켜 국편 자료실을 샅샅이 뒤져 <오하기문> 복사본을 찾게 되었다. 당시에는 국편 소장의 사료들이 정리되어 있지 않고 산만하게 쌓여 있었다.
<오하기문>(梧下紀聞)이라는 표제를 단 사료에는, 갑오년의 모든 사실을 담았다. 나는 놀라마지 않았다. 그 동안 이 관련의 저술로 <매천야록>에, <동비기략>(東匪紀略)이 있다고 적혀 있었는데 <오하기문>이 바로 그 저술이란 판단이 들었다. 그런데 한문학자인 이민수선생이 번역해 펴낸 <동학란>(을유신서 17, 1984년)이 출간되었다. 이민수선생은 무슨 근거인지 부제를 <동비기략초고>라고 붙여 펴냈고 김창수교수가 쓴 해제에도 이런 설명을 하였다. 더욱이 뒷부분이 상당히 누락되어 있었다.
한편 전주대학교의 호남연구소에서 황현의 시문집 등 몇 가지 저술을 후손에게서 인수해 <황현전집>을 간행하였는데 거기에 실린 <오하기문>은 동학농민전쟁 부분은 빠지고 의병관련의 내용으로만 채워져 있었다. 오종일 교수가 이 일을 담당하였는데 전해지는 말로는, 김아무개 교수가 구례 매천사를 관리하는 매천의 종부에게서 <오하기문>을 빌려 갔다가 돌려주면서 쪼가리를 냈다는 소문이 들렸다. 이 소문은 지금도 확인되지도 않고 확인할 수도 없다.
필자는 역사문제연구소에서 이 <오하기문>을 교재로 삼아 강독하였다. 이때의 강독을 토대로 김종익씨가 번역해 역사비평사에서 간행하였다. 또 정창렬 교수가 이 소문을 듣고 자신이 국편에서 찾은 <오하기문>을 복사해 보내 주길래 대조해 보니 필자의 강독본과 똑 같았다. 현재 <동학농민전쟁사료총서>에 실린 <오하기문>이 바로 이 사료이다.
또 한 가지, 전봉준의 고시문과 관련된 얘기가 있다. 이 사료는 <동학란기록>에 실려 있는데 언문본이다.
그 제목은 “고시경군여영병이교시민”으로 되어 있는데 이를 두고 한우근 교수는 “告示京軍與營兵而敎示民”으로 해석하였다. 곧 “경군과 영병에게 고시하고 백성에게 교시하노라”라고 풀이한 것이다. 필자는 이에 대해 논문을 쓰면서 “告示京軍與營兵吏校市民” 곧 “경군과 영병과 이교와 시민에게 고시하노라”라고 풀이해야 맞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그 대본을 정창렬 교수가 국편에서 발굴하여 연구자들에게 보내주었는데 한자로 부기한 부분이 필자의 주장이 맞다고 인정하였다.
1994년 동학농민전쟁 100주년을 앞두고 역사문제연구소에서 부설로 동학농민전쟁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를 발족시키고 여러 기념사업을 펼치면서 사료총서(史料叢書)의 간행을 준비하였다.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사료를 한 곳에 모아 이용자들의 편의를 도모하려는 뜻이었다. 그리하여 먼저 연구자들이 수집한 사료를 모으기로 하였다. 그 편찬위원은 표영삼, 정창렬, 신용하, 이이화, 조광, 신영우, 강창일, 우윤, 박맹수, 왕현종 등이었다. 이들이 소장한 사료를 낼 때 정창렬 교수와 신영우 교수가 수집한 사료, 신용하 교수는 국편에 보존되어 있는 오지영 <동학사>의 필사본, 조광 교수는 무텔문서의 동학관련 문건, 박맹수 교수는 호남지방에서 수집한 사료, 표영삼 선생은 최제우 최시형 등 동학 관련 사료를 내놓았다.
한편 실무를 맡은 왕현종 교수는 아르바이트 학생 6-7명을 동원해 여러 도서관 사료를 수집하였다. 그리하여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양호전기> 등 귀중한 여러 건의 사료를 발굴하였다. 그런데 두어 가지 난관에 부딪쳤다. 고려대도서관과 연세대도서관 등에서 특정 사료를 전부 복사해 주지 않고 부분 복사만 해주었다. 그리하여 꾀를 짜낸 게 두세 사람이 한 사료를 각기 부분 복사해서 짜 맞추는 방법을 썼다. 이런 일을 당시 강사급인 차미희 교수(현 이화여대) 등이 동원해 봉사해 주었다.
<동학란기록> 등에 실려 있지만 원본 영인을 할 수 없는 사료는 워드를 쳐서 복원해냈다. 국편 편사실에서 이를 알고 오지영 <동학사> 필사본과 <오하기문>을 수록하지 말라는 연락이 왔다. 그래서 필자는 “국편은 공적 기관이다, 비영리 민간 학술단체에서 이를 이용해도 금지해서는 안 된다”고 소리를 쳤다.
한편 일본의 신문 잡지에 게재된 관련 사료는 당시 강창일 교수(배제대)가 일본 동경대학 박사과정을 다니면서 수집한 게 있어서 이를 담당하였다. 또 고석규 교수(목포대)가 일본에 있으면서 이 관련 사료를 수집해서 소장하고 있어서 이를 여기에 보충하기로 하였다. 뒤에 이종일 서지학자께서 일본 사료를 많이 입수하고 있었는데 이들 사료와 대조해 보더니 거의 차이가 없다고 말해 주었다.
또 편찬위원 몇 분은, 동학 또는 천도교 사료는 본편에 수록하지 말고 부록으로 다루여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필자는 조금 난처해서 이를 담당한 표영삼 선생에게 전달했더니 그런 주장이 있다면 따르겠다고 동의해 주었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에서 당시 100주년을 앞두고 지방에서 발굴한 사료를 모으는 일을 했다. 신순철 교수(원광대)가 발굴한 <석남역사>와 이상식 교수(전남대)가 발굴한 옥중편지 등 새로 발굴한 사료도 포함되었다.
총서의 분량이 워낙 많아 본격적 해제작업을 하는 건 조금 번잡하다고 여겨서 각 사료마다 간단한 해설을 붙이는 것으로 하자고 합의하였다. 그래서 편찬위원이 자신들이 발굴한 사료를 중심으로 나누어서 이를 작성하였다. 이 일을 열성으로 해준 편찬위원은 시간적 여유가 있었던 우윤과 왕현종 위원이었다. 또 <주한일본공사관기록>이나 관찬사서에 나오는 관련 부분은 널리 공간되어서 굳지 수록하지 않기로 합의하였다.
마지막 난관이 또 따랐다. 당시 국학 관련의 영인본을 많이 내는 여강출판사의 지원을 받기로 계약하였는데 <이조실록> 등 북한 관련 사료의 국내 출판이 여러 가지 사정으로 난관에 부딪쳐 재정적 어려움을 겪어서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우리가 목표로 한 100주년에 즈음해서 출간할 수 없었다. 그런 끝에 표영삼 선생이 이종학 선생과 천도교에 자료전신회를 연 적이 있었는데 이 총서의 영인 간행을 부탁하였다. 이종학 선생이 이에 흔쾌하게 동의해 주어서 모든 관련 경비를 부담해서 1996년 마침내 30책으로 출판하게 되었다.
마지막 두어 가지만 적어 보겠다. 이 총서를 강만길 교수(고려대)에게 증정하였는데 그분의 모든 사료를 북한의 역사연구소에 기증하였다. 왕현종 교수가 개성에서 고려사 관련 발굴 조사할 때 북한학자들과 만나 이 얘기를 했더니 열심히 읽고 분석한다고 말하더란다. 또 이종학 선생이 북한에 가서 사회과학원에 이 총서를 전달하면서 남쪽의 전공학자와 역사문제연구소 이이화 소장이 이를 발굴 편찬해 냈다고 말을 하니 알고 있다고 하면서 고맙다고 전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고 한다.
또 금강산에서 고구려 문제를 두고 남북역사학자대회를 가진 적이 있었다. 이때 내 팀에 북한의 아무개 소설가가 끼어 있었는데 갑오농민전쟁에 대해 소설을 준비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이 총서를 활용하라고 일러주었다. 필자는 북경대학도서관에서, 1945년 해방이 되던 해 북한에서 청소년용으로 펴낸 <갑오농민전쟁>을 열람한 적이 있었다.
그 동안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서는 <소모사실> 등 새로이 10여종을 발굴하였고 박맹수 교수는 일본 사료를 새로 찾아내서 펴낸 적이 있다. 더욱이 <사발통문> 등 세계문화유산 등재 신청을 앞두고 사료의 발굴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인식하고 꾸준하게 발굴 작업을 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