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2년 역사 현장을 찾아서
문병학 | 기념재단 기념사업부장

보물 제 1200호(1994.05.02.)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를 위해서는 1892년(임진년) 동학교단의 움직임을 찬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임진왜란 발발 300주기이기도 한 1892년은 세도정치에 따른 지방관의 가렴주구가 극심해지고, 강제로 체결된 조일통상장정(朝日通商章程, 1876)의 결과 곡물유출 등 일제의 노골적인 경제적 침탈로 백성들이 크게 고통을 받던 해였다. 나아가 1880년대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삼남지방(전라·경상·충청) 전역으로 동학이 확산되면서 교도들이 급격하게 늘어났고, 지방관들의 탄압 또한 극심해졌다. 이런 제반의 모순 속에서 1892년 8월 전라도 무장(지금의 고창군) 손화중 포(包)의 동학교도들이 선운사 마애석불비기를 탈취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동학교도들이 10월 20일 공주에서, 11월 1일 전라도 삼례에서 각각 집회를 열었다. 따라서 이번 호에는 동학농민혁명 전사(前史)를 이루는 1892년의 역사현장을 돌아보았다.
선운사 마애석불비기 탈취사건
|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618 |
이곳은 1892년 8월 동학교단 무장 대접주 손화중 포(包)에서 교세확장을 위해 마애석불 배꼽에 감춰진 비결(秘訣)을 탈취한 역사의 현장이다.
선운사(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618)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이다. 선운사는 577년(백제 위덕왕 24년)에 검단 선사와 의운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마애석불은 선운사 도솔암 서편 칠송대 바위 벽면에 새겨져 있다. 이 불상은 고려시대 혹은 조선 초기에 조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상 3.3m 높이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는 불상의 크기는 높이 5m, 폭 3m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마애불상이다.
전설에 따르면 미륵상은 3천 년 전에 살았던 검당선사(黔堂禪師)의 진상(眞像)이라고 한다. 미륵의 배꼽에 신비스런 비결이 숨겨져 있는데, 이 비결이 세상에 나오는 날은 곧 나라가 망하는 날이라는 소문이 전해져왔다. 1892년 8월 손화중 포에서 이 비결을 탈취하였고, 이후 동학교도가 급증했다고 한다. 비결 탈취사건을 계기로 세상이 바뀌기를 바라는 수많은 사람들이 동학에 입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학농민혁명은 동학의 사상과 조직이 농민전쟁과 연계되어 상호작용한 결과이다. 그래서 갑오년의 농민전쟁은 1860년 수운 최제우가 창도한 동학과 관련이 깊다.
시천주(侍天主)를 골자로 하는 동학사상의 중핵은 모심(侍)이다. 모심(나눔과 배려)을 바탕에 둔 동학의 평등은 서구의 평등과 차원이 다르다. 서구의 평등이 수평적인 평등이라면 동학의 평등은 상호간 상대를 높여서 이루는 상승적 평등이다.
수운은 제자들에게 시천주의 시(侍)를 “내유신령(內有神靈) 외유기화(外有氣化) 일세지인(一世知人) 각지불이자야(各知不移者也) -신령스러움을 모신 모든 존재는 서로 화합을 추구하면서 통일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이 스스로 깨우쳐 알아야 한다.”라고 가르쳤다. 모든 존재가 화합하는 삶을 이루기 위해서는 상호간의 모심(존중과 배려)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차원 높은 인본주의다.
공주 집회

| 충청남도 공주시 반죽동 197, 240, 241 일대 |
동학의 교세는 1880년대 후반부터 충청·전라·경상 등지로 크게 확산되었다. 동시에 동학교도에 대한 관의 탄압도 더욱 가혹해졌다. 충청·전라도의 교도들 가운데 체포·구금되는 자들이 속출하여 더 이상 견디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교조의 신원(伸寃)과 포교의 자유를 바라는 교도들의 열망도 고조되어 첫 번째 교조신원운동이 일어난 곳이 바로 충청감영이 있던 공주였다.
1892년 10월 동학교단은 충청감사 조병식에게 자신들이 축원하는 것은 광제창생(廣濟蒼生)과 보국안민(保國安民)임을 강조하면서 동학은 사학(邪學)이 아니라 유불선을 합일한 것으로 유교와는 대동소이하다는 점, 일본이 각 항구에서 통상을 통해 이익을 독점하고 전곡(錢穀)을 다 빼내어 가기 때문에 백성들이 어려움에 처해 있다는 점, 동학에 대한 가혹한 탄압을 중단하고 체포된 교도들을 석방할 것, 최제우의 신원을 조정에 계달(啓達)해 달라는 것 등을 요구하였다.
감사 조병식은 <제음(題音)>을 내려 동학은 이단일 뿐이며, 금단 여부의 문제는 조정에서만 처분을 내릴 수 있다고 하였으나, 10월 24일에는 각 읍에 <감결>을 내려 동학금단에 따른 폐해를 엄금토록 지시하였다. 이러한 반응은 사학으로 규정되어 극심한 탄압을 받던 동학의 입장에서 볼 때 고무적이었다. 이에 따라 동학교단에서는 11월 1일의 전라도 삼례에서 다시 집회를 가지게 되는 등, 공주집회는 이후 광화문 복합상소, 보은·금구집회 등 교조신원운동과 척왜양 운동의 출발점이 되었다.
삼례집회

|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읍 삼례리 1074-8 |
삼례는 1892년 11월 1일부터 교조신원운동의 일환으로 동학교도들의 집회가 열렸던 곳이자 1894년 9월(음력) 동학농민혁명 제2차 봉기가 일어난 곳이다. 집회가 열렸던 당시 삼례역은 현재 삼례 동부교회가 들어서 있는 곳이다.
삼례는 동학농민혁명 전사단계(前史段階) 때는 물론이고, 제2차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곳으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위상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동학농민혁명이 지닌 반외세 민족항쟁으로서의 역사적 의미를 철저히 거세하는 과정에서 그 위상도 역사의 뒤안길에 묻히고 말았다.
다행스럽게도 혁명 1백주년을 전후하여 전북을 비롯하여 전국 각 지역에서 동학농민혁명사를 바로세우기 위한 노력이 기울여지면서 1996년 10월 26일 사단법인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에 의해 삼례천변에 <동학농민혁명 삼례봉기 기념비>가 건립되었고, 2000년대 완주군에서 삼례읍 신금리 완주군문화체육센터 부근에 <삼례봉기 역사광장>을 조성하여 많은 관람객이 찾고 있다.
동학교단은 1890년 전후하여 입교자가 늘어나자 1892년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동학교단측은 11월초 전라감사에게 동학교조 최제우의 신원과 포교의 자유를 요구하기 위해 삼례집회를 개최한다. 이때 동학교도들이 모인 장소가 바로 삼례역이었다. 한편, 1894년 6월 일본군의 경복궁 무단점령, 친일내각수립, 청일전쟁 도발을 지켜보던 동학농민군은 고조되는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삼례에서 제2차 봉기를 단행, 전국적인 반일항전의 횃불을 들어올린다. 이때에도 동학농민군은 삼례역에 대도소를 설치하였다.
참고자료
표영삼, 『동학2』, 통나무, 2005.
오지영, 『東學史』, 대광문화사, 1984.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편,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및 기념시설물 현황조사』, 20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