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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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봄 23호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손상옥의 손자 손영성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손상옥의 손자 손영성



 

문) 손용채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본인 소개 부탁합니다.


답) 저는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손상옥 할아버지의 손자 손용채입니다. 밀양손씨로 할아버지 손상옥은 32대 손이고, 저는 34대 손입니다. 동학농민혁명유족회에는 유족회가 창립된 1994년에 가입했습니다. 그때는 제 이름이 손용채였는데, 2008년도에 손영성으로 개명(改名)을 했습니다. 그동안에 제가 유족회나 동학농민혁명에 관련된 활동을 많이 했으면 이름이 손용채에서 손영성으로 바뀐 것을 사람들이 많이 알텐데 활동을 많이 하지 못해서 유족회나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 관계자분들이 아직 잘 몰라 개명 이전의 이름인 손용채로 알고 있습니다. 이름을 늦게나마 계명한 이유는 조카들이 여러 명 있는데 조카들의 항렬이 <채>자 항렬이라 이름을 변경한 것입니다.



문) 조부님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셨는데, 활동하신 내용이나 조부님의 활동사항에 대해 어떤 분 또는 어떤 경로를 통해 알게 되셨는지요?


답) 동학농민혁명 당시 활동내용이 담긴 자료는 찾기가 어렵습니다. 할아버지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신 것에 대해서는 아버지에게 들었습니다. 아버지 말씀으로는 아버지가 3살 되던 해부터 동학농민혁명 참여하였다가 섬진강 전투 때 돌아가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할아버지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사실을 아버지는 당신의 어머니 그러니까 제 할머니한테 들었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90이 넘어서 돌아가셨는데, 아버지께 “니 아버지는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셨다가 억울하게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자주 하셨다고했습니다. 그때는 별 감정 없이 들었는데 1994년도에 100주년 기념사업을 한다고 지역 방송이나 중앙 방송에 나오고, 전남일보에도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연재기사가 나오고 해서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 무렵 제가 MBC에 전화를 걸어 할아버지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더니 섬진강 전투지에 가서 촬영하자고 해서 방송에 나가기도 했습니다.



손용채 씨가 운영하고 있는 슈퍼마켓


문) 섬진강 전투라고 하면, 하동 고승당산에서 벌어진 일본과의 전투 이후에 연달아 섬진강 부근에서 일어난 전투를 말하는 것 같은데... 조부님에 대한 가족들이나 주변인들의 기억은 어떤가요?


답) 할아버지께서 섬진강 전투에 참여했다는 것은 들어서 아는데 정확하게 어느 전투를 말하는지는 잘 모릅니다. 할머니께서는 아버지에게 전해주시고 아버지께서 저한테 들려주신 것에 따르면 그 당시 할아버지께서는 말을 타고 다니실 정도로 부유하게 사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고향에서 유림의 학자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동학을 남들보다 빨리 접하셨다고 그렇게 들었습니다. 할아버지 고향은 경상남도 진주이고 동학농민혁명 당시 사시던 곳은 전라남도 광양군 옥룡면이었다고 합니다. 할아버지께서 집을 나가신 때가 1893년 12월 24일이었다고 하는데, 그 후로 집으로 돌아오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문) 조부께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아시는지요?


답) 섬진강 전투 때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그때 우리 할아버지는 도포라고 해서 삼베옷을 입고 말을 타고 다니셨는데, 전투에도 도포를 입고 나가셨다고 합니다. 그 후 할아버지께서 돌아오지 않자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찾으려 돌아다니다가 섬진강 전투에서 돌아가셨다는 소문을 들었답니다. 전투가 끝나고 일본군들이 큰 구덩이를 파서 전사자들을 그곳에 몰아넣고 시신 위에 기름을 뿌리고 불태웠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할머니는 그 구덩이를 뒤져서 할아버지가 입고 계시던 도포를 알아보고 찾아냈다고 합니다. 도포가 덜 타고 남아있는 부분을 발견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할아버지를 집으로 모셔오려고 인부를 사서 다시 구덩이에 갔는데 구덩이가 다시 메꿔져서 할아버지를 찾지 못하고 그냥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때는 미신이 많은 때라서 할머니는 집에 오신 후 밤나무로 체백(시신을 본뜻 것)을 만들어서 묘를 썼다고 합니다.



 

문) 조부님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신 것 때문에 후손들이나 집안에 피해를 입은 것은 없는지요? 선조들이나 주변 분들로부터 전해들은 것이라도 얘기해주십시오.


답) 그 당시 전투가 끝나고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다고 해서 자손들이 어떤 행사나 일에 나서지 못하고 피해 다녔다고 합니다. 그때 할아버지 큰집이 전남 광양 옥룡에 아랫마을에 살고 있었는데 우리 집에서는 살지 못하고 큰집으로 피해서 살았다고 했습니다. 큰 집에 잠시 피해 있다가 상황이 좀 조용해지면 다시 집으로 돌아오고, 시끄러워지면 다시 다른 곳에 가서 살다가 돌아오기를 수없이 반복했다고 합니다.



문)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신 조부님께서 남긴 서책이나 기타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유물 등 전해져오는 것은 없는지요?


답) 그때 당시에는 집에 여러 종류의 서책이나 다양한 형태의 나무괘짝 등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서책이나 괘짝들은 모두 사라지고 지금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는 상태입니다.



문) 특별법이 제정되어 기념재단을 중심으로 전국에서 갑오선열들의 숭고한 구국애민 정신을 기리는 선양사업이 추진되고 있는데 참여자 후손으로서 감회는 어떠신지요?


답) 동학농민혁명 참여자가 반역자, 죄인으로 몰렸다가 명예회복이 되니 감회가 새롭고 남다른 점이 있습니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정을 계기로 해서 어느 정도는 참여자들의 명예회복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직 미흡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선조들은 당연히 국가에서 유공자로 지정해서 그에 따른 보상도 해주어야 하지않습니까?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은 분들이 반란군으로 몰리면서 후손들이 받은 고통이 엄청난데 그 후손들에게 나라에서 보상을 해줘야지 안 그러면 앞으로 나라가 위태로울 때 누가 나서서 나라를 위해 충성을 하겠습니까? 안 그런가요?



문) 네, 참으로 가슴 아픈 현실입니다. 어서 빨리 갑오선열님들에 대한 예우가 제대로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오랜 시간, 아픈 얘기인데도 찬찬히 말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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