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좌도, 임실지역 유적지를 찾아서
문병학 | 기념재단 기념사업부장
이번 호는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맥락을 잘 보여주는 기념시설물이 건립·설치된 전라북도 임실군 지역의 유적지를 돌아보았다.
동학농민혁명의 현재적 의의를 설명할 때 일반적으로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은 공주우금치에서 일제의 근대적인 신무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쓰러져 미완의 혁명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만민평등과 구국애민정신의 표상인 갑오선열의 숭고한 정신은 을미년 항일의병, 3.1운동, 4.19혁명 등으로 면면히 이어져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꽃피우는 기틀이 되었다”고 말한다. 이 같은 역사적 맥락을 잘 보여주는 삼대혁명기념비(동학농민혁명·기미3.1운동·무인멸왜운동)가 임실군 쌍암면에 조성되어 있다.
이밖에도 임실군 지역에는 김개남의 외가(外家)이자 처가(妻家)였던 청웅면 향교리, 백산봉기시기 대접주 최봉성 휘하 농민군이 봉기했던 지천리봉기지, 동학 포교 시기와 동학농민혁명 제2차 봉기시기 해월 최시형이 머물렀던 제자 허선(許善)의 집터, 임실지역 동학 지도자였던 김영원이 후학을 양성하고자 설립한 삼요정(三樂亭), 김영원의 제자로 농민혁명과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1인으로 참여한 박준승(朴準承) 생가, 김개남 장군이 남원성에 유진(留陣)할 때 기도처로 활용했다는 성수산(聖壽山)의 상이암(上耳庵) 등의 유적지가 있다.
임실지역 동학의 전파는 아직 명확하게 규명되어 있지 않다. 『천도교임실교사』 기록에 따르면 1873년 3월 최시형이 청웅면 새목터(鳥項里)의 허선(許善)의 집에 왔을 때 최봉성(崔鳳成) 이 입도했다는 기록이 보이지만 이 무렵 해월 최시형은 ‘이필제난’(1871, 경북 영해)의 여파로 강원도 정선에 피신해있던 때라 신뢰하기 어렵다. 따라서 임실지역에 동학이 전파된 시기는 1889~91년 사이로 잡을 수 있다. 이런 사실은 1889년 최봉성과 그의 아들 최승우·김영원·김홍기·이병춘·이종현·엄민문·이종대·조석걸·성덕화, 1890~1891년 김춘성·이종근·박태준 등이 입도했다고 기록한 『천도교창건록』 『천도교회사월보』 「남원군 종리원사」 「순교약력」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남원·임실지역 동학교도가 급증한 것은 전라도 여타의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1892~93년 교조신원운동 단계로 보인다.
갑오동학혁명 기념비

| 전라북도 임실군 운암면 쌍암리 617-5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
이 기념비는 1983년 임실지역 유족회원 및 천도교인들이 각계의 지원과 후원을 받아 건립하였다. 이른바 ‘삼대혁명기념비’로 불리기도 하는 이곳은 운암초등학교 정문 옆에 자리하고 있는데, 좌측에 기미삼일운동기념비(己未三·一運動紀念碑), 중앙에 갑오동학혁명기념비(甲午東學革命紀念碑), 우측에 무인멸왜운동기념비(戊寅滅倭運動紀念碑) 세 개가 나란히 서 있다.
삼요정(三樂亭)

| 전라북도 임실군 운암면 선거리 713-6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
삼요정은 1883년 설립되었으나 설립자 김영원(金榮遠, 1853~1919)이 3.1 독립운동을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옥중 순국한 뒤 1921년 일제가 독립운동 발상지라는 이유로 강제로 철거했다. 이후 2002년 임실군과 지역주민들이 힘을 모아 현재의 위치에 재건, 2008년 10월 국가보훈처에서 현충시설로 지정하였다.
김영원은 1889년 동학에 입도한 후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 임실지역 농민군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1894년 11월 14~15일 벌어진 남원방아치전투, 관음치전투, 여원치전투 그리고 28일 남원성전투에서 운봉 박봉양의 민보군에게 패한 뒤 최승우 대접주 등과 순창 회문산으로 피신하여 살아날 수 있었다. 이후 1905년 갑진개화운동과 3.1운동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3.1운동 때는 고령인 탓에 문하생이던 박준승과 양한묵 두 제자를 민족대표로 천거하고, 자신은 고향 임실로 내려와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그 과정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다가 8월 26일 옥사(獄死) 하였다.
성밭마을

| 전라북도 임실군 청웅면 향교리 578-1 일대 |
이곳은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중 한 명이었던 김개남의 외가이자 처가마을로 김개남이 청년시절에 훈장을 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김개남은 19세 때인 1871년 결혼했으나 같은 해에 아내와 사별, 이듬해 성밭마을 전주이씨와 재혼하였다.
성밭마을 뒷산능선이 운암과 청웅면의 경계인데, 김개남은 이 재를 넘어 운암과 태인을 왕래했다고 한다. 김개남과의 연고로 청웅면 사람들은 1894년 3월 16일 청웅면 향교리에 모여서 3월 18일경 산외면 등을 거쳐 고부 쪽으로 나갔다고 한다.
지천리(芝川里) 봉기 터
| 전라북도 임실군 청웅면 지천리 329 일대 |
동학농민군이 1894년 3월 20일 무장포고문을 공포하고 23일 고부관아를 재점령하였다. 이곳에서 사흘을 머문 농민군은 26일경 백산으로 이동하여 이른바 백산대회를 열었다. 이 무렵 임실지역 농민군이 청웅면 지천리에 모여 봉기했다는 사실이 후손들의 증언과 역사학계 연구에 의해 밝혀졌다. 청웅면 속한 지천리는 1965년 운암댐이 건설되면서 수몰되어 마을이 사라졌고, 현재는 마을의 높은 지대 일부만 남아있다.
허선(許善)의 집터

| 전라북도 임실군 청웅면 옥석리(조항마을) 1093 |
동학 2세 교주 최시형이 1874년 무렵 허선의 집에 머물며 포교활동을 하였다.(『임실교사』) 또, 1894년 9월 18일 총동원령 이후 우금치전투 등 격전이 벌어지는 시기에도 이곳에 머물면서 상황을 주시하였다.
우금치전투에서 패배한 동학농민군은 11월 25일 원평구미란과 27일 태인 성황산 등지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패배하였다. 태인전투 패배로 주력군을 해산하고, 전봉준은 입암산성을 거쳐 순창 피노리로 들어갔으며, 손병희와 북접 농민군은 임실 조항리 허선의 집으로 찾아가 최시형과 합류하여 장수와 무주를 거쳐 충청도로 올라갔다.
상이암(上耳菴)
| 전라북도 임실군 성수면 성수리 산 85 |
상이암은 “고려를 건국한 왕건과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103일 동안 상이암에서 기도를 하고 왕이 되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한국의 발견』, 뿌리깊은나무, 전라북도편)고 전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김개남도 상이암을 찾았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매천 황현은 『오하기문』에 “7월 하순, 정예 기마병 백여 명을 데리고 임실 산중으로 들어가 상여암(上輿菴)에서 더위를 피했다”고 적고 있다. 시기적으로 전봉준과 전라감사 김학진 담판으로 관민상화 원칙에 따라 집강소를 설치하고 치안질서를 바로잡기로 합의한 이후인데, 남원성에 유진(留陣) 하던 김개남이 상이암을 찾았다는 사실은 눈여겨볼 필요성이 있다. “일설에 의하면 김개남은 김씨가 왕이 되는 새로운 왕조를 건설하려 하였고, 이미 대신 이하 관료들을 임명해 두었다는 소문이 있었다”(대판조일신문)는 기록이 전하는 것을 염두에 두면 더욱이나 의미심장하다.
참고자료
박맹수, 『최시형 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박사학위, 1996.
이진영, 『동학농민전쟁과 전라도 태인현의 재지사족」, 전북대학교, 박사학위, 1996.
박준성, 『작은 책』, 「왕이 되려고 기도하던 상이암과 농민군 지도자 김개남」, 2014.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편,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및 기념시설물 현황조사』, 20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