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서부지역 유적지를 찾아서
문병학 | 기념재단 기념사업부장

 
▣ 경남 서부지역 동학농민혁명 전개양상 - ①
동학농민혁명은 19세기말 한반도에서 동양문명과 서양문명, 중세문명과 근대문명의 중층적인 충돌 과정에서 일어난 일대 사변이었다. 산업혁명으로 인한 기계화로 상품의 대량생산이 이루어지면서 인류는 역사상 유래 없는 거대한 변화를 맞았다. 특히, 19세기로 넘어오면서 선박(船舶) 제조기술과 항해법(航海法) 발달, 무기산업의 발전으로 제국주의가 출현하여 세계사를 격동시켰다. 조선은 이처럼 급변하는 세계사적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채 소수 문벌(門閥)에 의해 중앙권력이 독점된 세도정치라는 비정상적인 정치체제 하에서 통치질서가 붕괴되고 있었다. 이로써 당시 농민들은 삼정문란(三政紊亂)으로 통칭되는 조세수취제도의 폐단에 따른 관리들의 가렴주구에 시달렸다. 여기에 일제와 서구 열강의 노골적인 국권침탈과 경제적 수탈이 더해지면서 농민들의 삶은 도탄(塗炭)으로 빠져들었다.
세계사적인 격동과 국내정치의 혼란은 수많은 농민항쟁을 불러왔다. 경남 서부지역은 조선후기 농민항쟁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진주민란’(임술농민항쟁)의 발상지이다. 진주농민항쟁은 1892년(철종13) 임술년(壬戌年) 2월 4일 진주에서 시작되어 곧바로 경상도·전라도·충청도 등 전국 70여 고을로 확산된 일대 사변이었다.
동학농민혁명 영남지역 발상 기념비

 
| 경남 산청군 내대리 |
산청군 내대리는 1894년 4월 경남 서부지역에서는 최초로 동학농민군이 기포한 역사적인 곳이다. 2010년 11월 천도교인들이 경남 서부지역 유적지 답사를 하면서 <기념비 건립>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후 2014년 9월 ‘산청동학농민혁명기념비건립추진위원회’(위원장 하재호)가 출범하여 각계각층의 정성과 후원을 모아 2015년 10월 20일 현재의 위치에 기념비를 건립· 제막하였다.
▣ 경남 서부지역 동학농민혁명 전개양상 – ②
경남 서부지역에 도저하게 흐르던 농민항쟁의 역사적 전통은 한 세대 후에 일어난 동학농민혁명 때 다시 한 번 크게 용솟음쳤다. 1894년 정월 전라도 고부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나자 경남 서부지역에서도 1월 12일 함안, 16~17일 사천, 3월말 김해 등지에서 농민들이 봉기했고, 4월 초순에는 진주 덕산(德山, 現 경남 산청군 시천면)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동학교단의 대접주 백낙도(白樂道, 道弘)를 주축으로 농민항쟁의 횃불이 올려졌다. 이후, 갑오년 6월 21일 일제가 경복궁을 무단으로 점령하여 친일내각을 수립하였다. 나아가 부산에서 경북을 거쳐 한양에 이르는 구간에 병참부를 설치하고 청일전쟁을 도발하자 동학농민군은 7월 15일 남원대회 등을 통해 항일투쟁 준비에 들어갔다.
한편, 9월이 되자 경남 서부지역 동학농민군은 전라도 금구(現 전북 김제시 금산면)에서 내려와 순천(順天)에 영호도회소(嶺湖都會所)를 설치하고 세력을 떨치던 김인배 대접주의 지원을 받아 하동부 점령, 진주성 점령 등 강력한 활동을 전개했다. 9월 14일 손은선이 이끄는 진주지역 동학농민군은 관아를 쳐들어가 옥문을 부수고, 100명 혹은 1,000명씩 무리를 지어 보수적 활동으로 일관하던 옥천사를 공격하였다. 또 9월 15일에는 여장협(余章協)이 이끄는 하동지역 농민군 수천 명이 곤양 읍성으로 들어가 무기를 탈취하는 등 사천·남해·고성·곤명 등지를 휩쓸었다.
이렇게 세력이 강성해진 동학농민군은 9월 17일 마침내 경남 서부지역의 중심부인 진주성을 점령하고, 이튿날 영호대접주 김인배 장군이 1천여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진주성에 들어와 질청(秩廳, 또는 작청作廳)에 대도소를 설치하였다. 진주성을 점령한 동학농민군은 성 둘레에 오색 깃발을 내걸었고, 성루 맨 앞 큰 깃대에는 붉은 색 바탕에 보국안민(輔國安民)이라고 쓴 대형 깃발을 내걸었다.
진주 농민항쟁 기념탑

 
| 경남 진주시 수곡면 창촌리 349-4번지 |
이 기념탑은 2012년 6월 24일 진주시농업인단체협의회에서 총사업비 6억 원을 투입하여 건립·제막하였다. 1962년(철종13) 임술년에 일어난 이른바 ‘진주민란’(진주농민항쟁)의 역사적 의미를 기리고, 항쟁 과정에서 희생당한 참여자 후손들을 위무하고자 건립되었다. 1862년 2월 14일 진주에서 시작되어 전국 70여 군현으로 확산된 진주농민항쟁은 조선후기 조세수취제도의 문란(紊亂) 등에 따른 경상도우병사 백낙신(白樂莘)의 가혹한 수탈에 저항한 조선후기 대표적인 농민항쟁이다.
1876년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로 조선이 개항한 이후 일본과 청나라, 서구 열강의 경제적 침략이 가속화하면서 농민들의 삶은 극도로 피폐해졌다. 이런 속에서 1880~90년대 전국에서 수많은 농민항쟁이 일어났고,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그 정수(精髓)라고 말할 수 있다.
▣ 경남 서부지역 동학농민혁명 전개양상 – ③
동학농민군이 경남 서부지역을 휩쓸며 실질적으로 지방권력을 장악하고 세력을 떨치던 무렵 경북지역 동학농민군도 일본군 낙동강병참부가 설치된 지역(예천·상주·선산 등)에서 위력을 떨쳤다. 이에, 일제는 조선 정부군과 관군을 끌어들여 9월 24일 부산과 대구 등지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일본군을 경남 서부지역으로 배치하여 동학농민군을 공격했다. 이 과정에서 경남 서부지역 곳곳에서 접전이 벌어졌는데, 10월 중순에 벌어진 곤양 금오산전투, 10월 14일 진주 수곡의 고승산(高僧山) 전투를 그 대표적인 전투로 들 수 있다.
이처럼 1894년 10월 경남 서부지역 동학농민군은 순천·남원·구례지역 동학농민군 지원을 받아 대구와 부산에서 파견된 일본군·관군 연합부대와 수차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동학농민군 4~5천여 명은 10월 14일(양력 11. 11.) 진주 수곡면 고성산(고승당산)에서 일본군 대위 스즈키가 이끄는 일본군과 접전을 벌였으나 일본군의 근대적인 신무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패배하였다. 고성산전투 이후에도 경남 서부지역 동학농민군은 하동 갈록치(渴鹿峙)와 고하 등지에서 일본군에 저항하였으나 무기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였다.
진주, 대도소(大都所) 터
| 경상남도 진주시 평안동 111번지 |
전라도 순천에 영호도회소(嶺湖都會所)를 설치하고 세력을 떨치던 김인배 장군은 1894년 9월이 되자 하동부와 진주를 공격하였다. 하동부를 장악한 동학농민군은 9월 17일 진주성마저 점령하였다. 진주성을 점령한 이튿날 김인배 장군은 1천여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진주에 들어와 질청[秩廳]에 대도소를 설치하였다.
갑오년 당시 동학농민군이 대도소를 설치했던 진주성(晉州城)의 질청[秩廳]은 현재 ‘보리한의원’ 자리이다. 질청은 관청의 부속 건물로 지방관청의 육방을 비롯한 하급 관리들이 사무를 보던 곳이다. 작청(作廳) 또는 연청(椽廳)이라고도 부르기도 했다.
옥천사(玉泉寺)
| 경상남도 고성군 개천면 북평리 408번지 |
□ 동학농민혁명 당시 진주지역 농민군들이 공격하였던 사찰.
□ 경상남도 기념물 140호
□ 동학농민혁명 이전부터 현재까지 그 자리에 위치해 있다.
옥천사는 신라의 의상대사가 <화엄전교 십찰>의 하나로 창건된 절이다. 조선후기에 옥천사는 부찰(富刹)이었다. 사찰답 800여 두락을 인근 농민들에게 소작을 주어 5:5의 비율로 도지(수)를 받으면 1,000석을 거둬들였다고 한다. 산도 560정보로 산지기가 5~6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진주의 대찰 옥천사”라고 불릴 정도로 진주의 권문세가들이 시주하여 불사를 일으킨 일이 많았고, 진주목과 경상우도의 감영·삼도수군통제영·고성현 등 관아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이런 까닭에 옥천사는 1862년 진주농민항쟁 때 탐관오리들의 세곡미(稅穀米) 수탈에 반발한 진주농민들에게 공격을 받았다. 또한 1894년 9월 14일 경상감사가 올린 「장계(狀啓)」를 통해 동학농민혁명 때로 옥천사가 공격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하동군 동학혁명군 위령탑
|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대곡리 산66-15, 산66-1, 북방리 산 13-30 |
□ 경상남도 기념물 제142호
동학혁명군위령탑이 서 있는 고성산은 1894년 10월 14일 영남과 호남지역 동학농민군이 일본군을 맞아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던 전적지이다. 이곳에 건립된 위령탑은 천도교중앙총부에서 문화재 보호구역이던 이곳 고성산성 일대 임야 500평을 매입하여 1995년 11월 11일 제막하였다. 하동군은 40백만 원을 들여 2007~8년 [고성산성의 역사성 연구용역]을 실시하였고, 2016년 9월 현재 [고성산성 성역화를 위한 기본계획] 수립을 위한 용역을 진행 중이다. 하동군은 향후 이곳에 총 150억 원을 투입하여 전적지 정비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진주농민항쟁 기념탑 안내문

 
조선시대 말기에 조세제도가 문란해지고 수령과 아전의 비리와 토호의 수탈이 심해지자 이에 대항해 주민들이 장시를 철거하고 집단 시위에 나서게 되었다. 진주농민항쟁은 1862년 2월 14일 덕산장 공격을 계기로 진주목 전 지역으로 확산되다가 2월 23일 농민군이 해산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이 항쟁의 핵심세력은 농민, 그중에서도 초군(樵軍)이었다. 이 항쟁을 이끌었던 지도자로는 양반 출신인 류계춘 등이 있었다. 이 항쟁을 계기로 농민항쟁은 삼남지방을 비롯한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이는 단순히 수탈에 대한 불만에 의해 폭발되었던 것만은 아니다. 그 밑바닥에는 당시의 사회체제를 바꾸려는 운동의 흐름이 있었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농민층의 사회운동은 더욱 거세어져 1894년 동학농민전쟁으로 이어지고 이어 일제시기 농민운동으로 발전해간다. 이 탑이 세워진 곳은 당시에 수곡장이 서던 곳이다. 무실(수곡)장터는 항쟁이 시작되기 전인 2월 6일 많은 대중들이 도회(都會)를 열어 항쟁의 방향을 철시와 시위로 결정하고 이 여론을 주위로 확산시켜 나간 중요한 곳이다.
참고자료
김양식, 「지리산권 동남부지역 동학농민혁명 전개와 특징」, 『지리산권 동학농민혁명』, 순천대학교 지리산권 문화연구원편, 2014.
김준형, 「서부 경남지역의 동학군 봉기와 지배층의 대응」, 『慶尙史學』7· 8, 경상대학교 사학과, 1992.
이이화, 『대접주 김인배 –동학농민혁명의 선두에 서다』, 푸른역사, 2004.
임형진, 「동학초기 경상도 일대의 포조직과 혁명군 지도자 연구」, 『동학학보』제35호, 2015.
표영삼, 「경상 남서부 동학혁명」, 『교리사연구』제6호, 천도교중앙총부, 2000.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편,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및 기념시설물 현황조사』, 20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