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 보은지역 유적지를 찾아서
문병학 | 기념재단 기념사업부장

보은취회(報恩聚會) 터

| 충북 보은군 장안면 장내리 32-1번지 일대 |
이곳은 1893년 3월 11일부터 4월 2일까지 보은취회가 열렸던 장소이다. 동학교단의 지휘 아래 열린 이 취회는 민회 (民會) 형태의 대중적인 정치 집회로 전국에서 수만 명의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참가하였다. 한 달 가까이 전개된 집회에 참가한 동학교도들을 통제하기 위해 교단은 집회 장소 근처에 도회소(都會所)를 설치하기도 했고, 집회에 참가한 사람들은 이곳 주변에 반 장 높이로 사방 1백여 보에 이르는 돌성 (石城) 쌓아 훈련도 했다. 또한, 이곳은 동학농민혁명 제2차 봉기 때 많은 농민군들이 집결한 장소이기도 하다. 1894년 9월 18일 최시형은 총동원령을 내린 후 각 접주들에게 군중을 인솔하고 대도소가 있는 장내리로 집결하라고 지시했고, 이곳에 모여든 수만 명의 거처를 마련하고자 초막(草幕) 4백여 채를 짓기도 했다.
충청북도 보은지역 동학농민혁명 전개양상_
▣ 보은취회(報恩聚會) - ①
19세기 조선은 내부적으로 소수 문벌에게 중앙권력이 독점된 세도정치라는 비정상적인 체제 아래에서 매관매직, 조세수취제도 문란 등으로 조선왕조의 통치 질서가 무너져 백성들의 삶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외부적으로는 산업혁명으로 인하여 서구 제국주의가 출현하여 원자재와 상품판매시장 확보 및 자본투자 대상지를 찾아 세계 각국을 침략하였다. 이 과정에서 드넓은 대지와 인구 집중도가 높은 중국과 인도에 대한 침략이 노골적으로 자행되었다.
이와 같은 세계사적인 격동 속에서 동아시아 대륙의 연안이자 태평양의 허브인 조선과 일본은 태풍의 눈으로 부상하였고, 일본은 세계사적 조류에 편승하여 서둘러 산업화의 길로 진입, 제국주의를 추구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급변하는 세계 정치정세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채 1876년 일본에 의해 불평등한 조약을 맺고 개항하였고, 연달아 1880년대 미국, 영국 등 서구 제국주의 열강에게 문호를 개방하였다.
이로써 안으로 탐학한 관리들의 가렴주구에 시달리던 조선의 농민들은 제국주의 열강의 경제적 침탈까지 가중되어 그 삶이 처참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러한 때 1860년 경북 경주에서 수운 최제우가 동학을 창도하여 평등사상이 주창되었다. 이에 놀란 조선정부는 수운 최제우를 붙잡아 좌도난정(左道亂政)의 죄목으로 참수(斬首)하였다. 그러나 동학은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에 의해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1880년대 중반 전국으로 확산된 조직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자 동학교단 본부인 도소(都所)를 설치하였다. 도소가 설치된 곳이 바로 소백산맥자락 속리산 입구인 충북 보은군 장내리(帳內理)이다.
충청북도 보은지역 동학농민혁명 전개양상_
▣ 보은취회(報恩聚會) - ②
세력이 크게 확장된 동학교단은 충청도 공주(1992. 10)와 전라도 삼례(1892. 11)에서 교조신원운동에 나섰고, 1893년 2월에는 서울 광화문 앞에서 임금에게 상소를 올리는 ‘복합상소’를 단행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노력에도 동학교단은 실질적인 성과를 얻지 못하자 마침내 1893년 3월 보은군 장내리에서 대중적인 정치집회인 보은취회를 개최하였다.
보은취회 시기 전라도 금구·원평에서도 김덕명, 손화중, 김개남, 전봉준 등을 중심으로 대중적인 정치집회가 열렸다. 보은취회와 금구·원평취회 때는 이전의 교조신원운동 때와 달리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 기치가 전면에 등장하였다. 이는 광화문복합상소(1993. 2) 전후시기 서울에 소재한 외국 공사관 벽면 등에 척왜양(斥倭洋)을 주장하는 글이 게시된 것과 그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1893년 3월 11일부터 4월 2일까지 전국의 동학교도 수만 명이 집결한 보은취회는 조선정부를 상대로 강력하게 민의를 전달하는 시위 형태로 진행되었다. 이는 이전시기 민중항쟁이 병란(兵亂)이나 민란(民亂)의 형태로 이루어진 것과는 달리 민회(民會) 형식으로 전개되었다는 특성을 갖고 있으며, 1894년 촉발된 동학농민혁명의 전사(前史)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김소촌가(金昭村家)
| 충청북도 보은군 보은읍 누청리 123-6 |
1894년 12월 17일 북실전투 직전에 북접의 지도자들이 모여 있다가 관군의 기습을 받았던 곳이다. 최시형과 북접지도부가 김소촌가에 머문 사실과 일본군과 민보군이 이곳을 기습한 사실을 「소모사실」 등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김소촌가의 소촌(所村)은 사람 이름이나 명(名) 혹은 호(號)가 아니라 소촌찰방(小村察訪)을 지낸 김세희(金世熙)의 집을 뜻한다. 김세희는 당대에 부를 이루어낸 입지전지적인 인물로, 닭과 같은 집짐승이 유달리 잘 자라 밑천을 얻은 후, 재산을 크게 증식시켜 북실 일대에서 가장 큰 집을 지었다. 그의 집은 당시 고루거각(高樓巨閣)이라 표현될 정도로 잘 지어진 집이고, 김세희는 300백석지기, 혹은 천석지기로 불릴 만큼 부유한 인물로 알려진 사람이다.
보은 동학농민혁명 기념공원
| 충북 보은군 보은읍 성족리 산 16번지 일대 |
기념공원은 보은군에서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미를 선양하고자 2003년 기본계획을 수립하여 2007년에 완공하였다. 동학농민혁명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유적지는 아니지만 북실전투지와 누청리 김소촌가(家)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속리산으로 들어가는 길목이라는 위치상의 장점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알리는데 효과적이라는 판단에 따라 이곳이 기념공원 조성지로 선택되었다고 한다. 총 98,000여㎡ 부지에 사업비 6,960백만원 (국비18억, 도비 5억4천, 군비 32억2천, 기타 14억)이 투입된 기념공원은 동학농민혁명기념탑, 기념동상, 인내천정 (人乃天亭) , 충의정 (忠義亭) , 민중광장, 죽림광장, 동학동산, 하늘길 등으로 내실 있게 구성되어 있다.
2016년 현재 보은군은 동학농민군들이 장안면 장내리 보은취회 이후 농민군이 북진했던 장내리 취회지↔선병국 가옥(장안면 장내리)↔운봉서각(장안면장재리)↔김소촌가(보은읍 누청리)↔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보은읍 성족리)↔북실 전투지 (보은읍 종곡리)를 잇는 총 45㎞ 구간을 동학길로 조성하고자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충청북도 보은지역 동학농민혁명 전개양상_
▣ 보은 북실전투 - ③
공주 우금티전투에서 패배한 남·북접 연합농민군은 후퇴하던 중 벌어진 원평 구미란전투(11. 25)와 태인전투(11. 27)에서 또다시 패배하여 주력군을 해산하였다. 이후 남접농민군은 정읍, 광주, 나주를 거쳐 서남해안 바닷가 장흥과 진도로 밀려났고, 북접농민군은 손병희의 인솔 하에 태인에서 내장산 갈재, 순창 복흥을 거쳐 임실로 향하였다. 임실 청운면에서 최시형과 합류한 후 장수, 무주, 영동, 황간, 용산, 청산을 거쳐 12월 16일 보은에 이르러 관아를 점령하였다. 이때 농민군 행렬이 30리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대규모였다. 이튿날인 12월 17일 북실마을[종곡리, 鍾谷里]로 들어간 동학농민군은 그날 밤부터 18일까지 일본군, 관군, 민보군 등과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다.
북실전투 때 동학농민군을 토벌한 핵심 병력은 총 279명으로, 일본군 43명, 상주소모영의 유격대장 김석중이 이끄는 민보군 200명, 용궁현의 포수 20명, 함창 포수 19명 등이었다. 일본군과 상주 유격병대가 보은의 농민군에 대해 공격을 개시한 것은 12월 17일(양력 1895.1.12) 밤이었다. 일본군과 민보군 등은 먼저 최시형 등 지도부가 모여 있던 누청리 김소촌가를 공격한 후 곧바로 보은 북실마을 일대에 진을 치고 있던 농민군을 공격하였다.
북실전투에서 희생된 동학농민군이 수천 명이었음을 알 수 있다. 기록들에는 300여명, 2,400여명,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등으로 다르게 전하고 있다. 일본군은 국제법상의 문제 등을 염두에 두었는지 300여 명이라고 턱없이 적은 수를 기록했고, 상주 소모사 정의묵(鄭宜黙)은 총에 맞아 죽은 자가 395명이며, 골짜기와 숲속에 널린 농민군 시체가 몇 백 명인지 알 수 없을 정도라고 기록했다. 김석중은 총으로 죽인 자가 2천여 명, 야간전투에서 죽인 자가 393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북실 전투지


| 충청북도 보은군 보은읍 종곡리 산 14~17 일대 |
동학농민혁명 당시 공주에서 후퇴했던 북접농민군이 다시 북상하여 일본군 및 관군·민보군 등과 치열하게 전투를 벌인 곳이다. 1993년 충북대 호서문화연구소에서 북실전투 관련 유적과 농민군 집단매장지 등을 확인하는 연구조사를 실시하기도 했다. (『보은 종곡 동학유적-북실전투 및 관련유적과 집단매장지 조사』, 1993.)
보은관아 통고 [報恩官衙 通告]
1893년(癸巳) 3월 11일 동학인이 삼문 밖에 방문을 세움.
지금 왜(倭)와 서양이라는 적이 마음속에 들어와 큰 혼란이 극에 달하였습니다. 진실로 오늘날 나라의 도읍지를 살펴보면 마침내 오랑캐들의 소굴이 되어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임진왜란의 원수와 병인양요의 수치를 어찌 차마 말할 수가 있으며, 어찌 차마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지금 우리 동방 삼천리강토는 모두 짐승의 자취로 가득하고, 5백 년 종묘사직은 장차 기장밭서직(黍稷) 또는 서리지탄(黍離之歎)이 될 것이니, 인(仁) ·의(義) ·예(禮) ·지(智)와 효(孝) ·제(悌) ·충(忠) ·신(信)은 지금 어디에 남아 있습니까? 하물며 왜적은 도리어 원한의 마음을 품고 재앙이 될 빌미를 숨겼다가 그 독기를 뿜어내고 있어, 위급함이 아침저녁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태연하게 생각하여 편안하다고 말하니, 지금의 형세는 어찌 불이 붙은 장작더미 위에 앉아 있는 것과 다르다고 하겠습니까? (보은관아통고 부분)
「취어(聚語)」,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3권), 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2007.
보은 동학농민혁명기념탑 뒤 벽면




참고자료
배항섭, 「동학농민전쟁 연구」, 고려대 박사학위논문, 1996.
신영우. 「1893년 보은 장내리의 동학집회와 그 성격」, 『충북학』제5집, 충북학연구소, 2003.
「취어」(聚語),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1』, 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2008.
「 토비대략」(討匪大略), 「 소모일기」(召募日記),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3』, 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2008.
「 소모사실」(召募事實),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9』, 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2011.
『충청북도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 기본계획』, 충청북도, 2007.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및 기념시설물 현황조사』,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20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