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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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봄 27호
고부농민봉기(古阜農民蜂起) 현장을 찾아서

고부농민봉기(古阜農民蜂起) 현장을 찾아서


문병학 | 기념재단 기념사업부장


동학농민혁명의 도화선(導火線), 고부농민봉기(古阜農民蜂起)


  고부농민봉기는 1894년 1월 10일 전봉준(全琫準), 김도삼(金道三), 정익서(鄭益瑞) 등을 중심으로 군수 조병갑(趙秉甲)의 가렴주구(苛斂誅求)에 항거하여 고부의 농민들이 말목장터에 집결한 후 수탈의 상징인 ‘만석보’(萬石洑)를 부수고 고부관아를 점령한 뒤 말목장터와 백산 등지에 주둔, 두 달 넘게 이어간 농민항쟁을 말한다.


  역사학계는 19세기에 일어난 조선의 수많은 농민항쟁과 임진년(1892) 10월부터 계사년(1893) 3월 사이 동학교단이 주도한 교조신원운동 등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사발통문(沙鉢通文) 거사계획을 파악하면서 고부농민봉기를 동학농민혁명의 도화선으로 인식하고 있다. 나아가 고부농민봉기가 19세기 농민항쟁의 한계였던 국지성(局地性, 군현단위 경계境界를 벗어나지 못함)을 극복하지는 못했으나 전봉준을 중심으로 지도부가 형성되었다는 점, 민군(民軍)을 조직하고 무장(武裝)을 했다는 점, 두 달 넘게 항쟁이 지속되었다는 점 등에서 이전시기 농민항쟁과는 차원을 달리한다고 보고 있다.



만석보유지(萬石洑遺祉)



만석보유지                                                                                          ‘만석보’ 시비(詩碑, 양성우 시인의 시)


● 전북 정읍시 이평면 하송리 659-3번지

● 전라북도 기념물 제33호


  보(洑)는 농사에 물을 사용하기 위해 냇물에 둑을 쌓은 것을 말한다. 이곳은 1894년 1월 고부농민봉기 발발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던 만석보(萬石洑)가 있던 자리이다. 현재 이곳에는 건립시기가 각기 다른 네 가지 종류의 기념비 5기가 세워져 있다. 맨 처음 세워진 기념비는 만석보유지비(萬石洑遺祉碑, 1973)이고, 두 번째로 세워진 기념비는 만석보유지정화기념비(萬石洑遺祉淨化記念碑, 1987), 세 번째로 세워진 기념비는 만석보시비(萬石洑詩碑, 1999)이다. 이후 2000년대 들어와 네 번째로 만석보유지(萬石洑遺祉)라는 기념비 2기가 세워졌는데, 1기는 원래 만석보가 있던 강둑(기존의 만석보유지비와 만석보유지정화기념비가 있는 곳에서 서북방향으로 약 1km 떨어진 지점)에 세워져 있고, 1기는 만석보 터 입구 도로변 표지석으로 세워졌다.


  원래 정읍천 하류에 민보(民洑) 인 예동보(禮洞洑)가 있어서 주민들이 이보의 물로 농사를 지었다. 그런데 1892년 조병갑이 고부군수로 부임한 이후 정읍천과 태인천이 합류한 바로 아래 부분에 만석보를 축조했다. 1973년 만석보유지를 정비할 때 명확한 고증에 의해 체계적으로 정비사업이 추진되지 못하면서 원래의 만석보 터가 아닌 곳에 기념비가 세워졌다. 이후 원래의 만석보 터를 알리고자 2000년 5월 정읍시와 이평면이 고증을 거쳐 새롭게 만석보유지(萬石洑遺祉)라는 돌비를 세웠다. 이 비석 뒤편 강바닥에는 겨울철에 물이 빠지면 만석보 축조 당시 시추한 것으로 추정되는 목침이 드러난다.


  만석보를 축조한 뒤 홍수가 나면 냇물이 범람하여 상류의 논까지 피해를 입혔고, 보를 쌓기 전에는 수세를 징수하지 않겠다고 해놓고 보를 쌓은 후 그 약속을 어기고 한 두락 당 상답 2말, 하답 1말씩 700여 석의 수세를 걷어 농민들의 원성을 샀다. 조병갑의 가렴주구에 고부농민들은 전봉준·김도삼·정익서 등을 중심으로 고부관아와 전라감영 등에 수세감면을 진정했으나 강제로 쫓겨났다.


  급기야 1893년 11월 전봉준을 중심으로 사발통문 거사계획을 준비하는 등 고부군민들의 민심이 심상치 않자 전라감사 김문현은 조정에 보고하여 조병갑을 다른 곳으로 발령을 낸다고 했다. 그러나 익산군수로 전임된다던 조병갑이 1894년 1월 9일 고부군수로 잉임(仍任, 유임)되었다. 이런 사실이 장날(말목장 1. 8.)을 전후하여 군민들에게 알려지면서 민심은 격앙되었고, 1월 10일 새벽 전봉준의 지휘 아래 1천 여 농민들이 봉기하여 만석보를 부수고 고부관아를 점령하였다. 이처럼 만석보는 고부농민봉기 발발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조병갑(趙秉甲)은 어떤 사람인가?


  조병갑(趙秉甲, 1844-1911)은 동학농민혁명의 도화선이 된 고부농민봉기 당시 고부군수로 재직하면서 농민봉기를 유발시킨 장본인이다. 본관은 양주이고 태인군수를 역임한 조규순의 서자이자 대원군 집권기에 영의정을 역임한 조두순의 조카이다. 조선 후기의 문신(文臣)으로 예산현감, 천안·보성·함양군수, 김해부사 등을 거쳐 1892년 4월 고부 군수로 임명되었다.


  전봉준 체포 후 심문받을 때 열거한 조병갑의 주요한 악행(惡行)은 ①주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만석보를 막으면서는 수세를 안 받겠다고 약속해놓고 축조 후 수세를 강제로 징수한 일 ②개간한 진황지에 대해서는 세금을 받지 않겠다고 약속한 후 추수 때 세금 2만량을 거둔 일 ③일찌기 태인현감을 지낸 자기 아버지의 비각(碑閣)을 건립한다고 1천여 냥을 강제로 징수한 일 ④대동미를 징수할 때 정백미(精白米)를 돈으로 환산하여 징수한 후 상부에 상납할 때는 하품의 쌀을 납부하면서 그 차액을 착복한 일 ⑤불효(不孝) 불목(不睦) 음행(淫行) 잡기(雜技) 등의 죄목을 날조하여 부민에게서 돈 2만 냥을 빼앗은 일 ⑥보를 쌓을 때 수백 년 묵은 나무를 강제로 베어다 쓴 일 ⑦고부 경내에 집을 짓고 첩을 사서 살게 하였는데, 집을 지을 때 백성을 사역하면서 심하게 닦달한 일, ⑧ 흉년이 들었을 때 감영에 보고하여 전세(田稅)를 탕감 받았으나 도리어 3배나 무거운 세금을 수탈한 일 등등이다.


  고부농민봉기가 일어난 후 조병갑은 고금도로 유배를 갔으나 1898년 1월 법부 민사국장에 임용되면서 관직에 복귀, 고등재판소 예비판사까지 겸임했고, 같은 해 7월 고등재판소판사로 승진하였다.


  이 무렵인 1898년 5월 동학 2세 교주 해월 최시형이 체포,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7월 20일 형이 집행되었는데 이때 조병갑이 고등재판소 판사로 관여하였다. 이후 조병갑은 정3품 비서원승으로 영전했다가 1904년 5월 의원면직할 때까지 고위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좌측 : 만석보유지정화기념비, 우측 : 만석보유지비



만석보혁파 선정비(萬石洑革罷善政碑)



만석보혁파선정비 & 비각


● 전북 정읍시 이평면 하송리 예동마을 189-4


  이 비는 1898년 9월 고부군수로 재직하던 안길수가 만석보를 완전히 철거한 것을 기념하여 주민들이 [군수 안후길수 만석보혁파 선정비](郡守 安侯吉壽 萬石洑革罷 善政碑)를 세웠다. 그로부터 100여 년 동안 방치되어 비문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풍화에 훼손되자 동학농민혁명 100주년(1994)을 맞아 지역주민들이 성금을 모아 비각(碑閣)을 건립하였다.



동학농민혁명 최초 봉기 상징 조형물



동학농민혁명 최초 봉기 상징조형물 &
만석정(萬石亭)


● 전북 정읍시 이평면 하송리 예동마을 189-4


  이 조형물은 동학농민혁명의 도화선이 된 고부농민봉기를 기념하기 위해 정읍시와 갑오농민동학혁명유적보존회가 건립하였다. 2015년 공사를 시작하여 2016년 2월 15일 완공, 제막되었다.



19세기, 농민항쟁의 역사적 맥락-1

조선의 마지막 100년(1800년대)은 ‘민란(民亂)의 시대’


  정조(正祖) 때 추진되었던 개혁은 정조의 급작스런 서거로 빛을 잃고 역사의 수레바퀴가 거꾸로 돌았다. 정순대비의 수렴청정과 안동김씨 문벌정치가 들어서면서 기호지방(畿湖地方) 거점의 노론(老論) 중심 파벌정치가 역사의 후퇴를 더욱 부추겼다. 이렇게 중앙정부의 권력이 특정 지역과 특정 문벌에 의해 독점되면서 권력밖으로 밀려난 지역과 백성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다.


  한편, 19세기 중반 영국과 청나라 사이에 제1차 아편전쟁(1839)과 제2차 아편전쟁(1856)이 벌어졌다. 산업혁명 이후 출현한 서구 제국주의가 동아시아 심장부를 공격한 것이다. 조선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그 과정에서 벌어진 일들이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이다. 이처럼 대내외적으로 고조된 위기 속에서 1863년 고종을 등극시킨 조선의 권력층은 쇄국정책으로, 기층에서는 1860년 동학(東學) 창도로 대응하였다.


  대내외적으로 조성된 위와 같은 위기 속에서 조선의 조정은 무능하고 부패하여 백성들의 삶은 더욱 곤궁해졌다. 이에 따라 서북지방은 물론이고 영남과 호남지방의 불만이 날을 따라 높아졌다. 그 결과 1811년 서북지방의 관서농민전쟁, 1862년 영남을 비롯한 삼남지방의 임술농민항쟁, 고종(高宗) 재임 기간에 수많은 농민항쟁이 일어났다.



19세기, 농민항쟁의 역사적 맥락-2

동학농민혁명, 19세기 농민항쟁의 정수(精髓)


  민족적 위기 앞에서 시천주(侍天主), 후천개벽(後天開闢) 사상을 골자로 동학(東學)이 창도되어 조선정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급격하게 성장하였다. 특히, 1880년대 후반으로 넘어오면서 동학교단의 조직은 충청도·전라도·경상도 등으로 크게 확장되었다. 마침내 1892년 동학교단 주도로 대중적인 정치집회인 교조신원운동(敎祖伸冤運動)이 전개되었고, 이 과정에서 사회변혁을 지향한 세력의 조직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실제로 전봉준은 1892년 11월 삼례 교조신원운동 때 전라감영에 소장을 올리는 역할을 자원했고, 이듬해 2월 서울 광화문 복합상소 전후시기 외국공관 등의 괘서사건과 3월 금구·원평집회 등을 주도하면서 조직적 역량을 강화해나갔다. 이런 흐름이 사발통문거사계획(1893. 11.), 고부농민봉기(1894. 1.)로 이어졌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인하여 동학농민혁명은 19세기 농민항쟁의 정수로 평가되고 있다.



말목장터유지비&말목정&말목장터 감나무



말목장터유지비                                                      말목정


● 전북 정읍시 이평면 두지리 191-2 일대


  말목장터유지비는 1998년 1월 8일 고부농민봉기와의 관련성 등을 알리고자 정읍시와 갑오농민봉기유적탐구회에서 건립하였다. 말목정과 창건기념비는 1994년 11월 ‘三· 五회’회원들의 발의로 말목장터 감나무 인근에 건립되었다. 그러다가 2002년 7월 말목장터 일대에 이루어진 유적지정비사업으로 말목정과 창건비가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고, 말목정이축비도 세워졌다. 말목장터 일대는 전북기념물 제110호(2001. 4.)로 지정되었는데, 이곳에 서 있던 감나무가 2003년 태풍 ‘매미’때 쓰러져 지금은 황토현전적지에 자리한 전라북도 동학농민혁명기념관 1층 로비 벽면에 전시되어 있다.


  말목장터유지비 비문에 따르면 말목은 원래 말두(斗), 못지(池) 두지였으나 그 뜻이 말의 목(마항, 馬項) 형상이라 하여 말목으로 변천되었다고 한다. 1910년 이전까지는 두지리(斗池里)에 3일과 8일에 장이 섰고, 이후 군이 통폐합되면서 4일과 9일장으로 바뀌면서 장의 명명도 마항장(馬項場)으로 바뀌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전봉준 고택


● 전북 정읍시 이평면 조소리 1길 20(장내리)

● 사적 제293호(1981. 11. 28.)


  이 집은 전봉준 장군이 동학농민혁명 전후시기에 거주하였던 집이다. 1894년 고부농민봉기 당시 안핵사 이용태에 의해 일부가 소실되었으나 완전히 불태워지지는 않았다. 이후 1974년 정읍군에서 국비와 군비를 들여 크게 보수하기 위해 해체하던 중 “戊寅 2月 二十六日”이라는 상량문이 발견되어 1878년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전봉준은 천안 전씨가 여러 대에 걸쳐 대대로 살아오던 고창현 죽림리 당촌에서 1855년 12월 3일 태어나 13살 무렵부터 고부군 남부면, 전주군 봉상면, 태인현 감산면, 태인현 동곡리 지금실 등지로 이사를 다녔다. 전봉준 공초에는 “태인(泰仁)에 거주(居住)하다가 고부(古阜)로 이주(移住)한 지 수년(數年)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해방 이후 촌로들이 증언을 기록한 것에 따르면 태인에서 고부 궁동면 양교리로 이사했다가 다시 조소리로 옮겨 살았다고 한다. 이곳에서 서당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전봉준 단비



전봉준 단비


● 전북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 조소마을


  전봉준 고택에서 500여 미터 떨어진 산자락에 단비가 세워져 있다. 이곳에 서 있는 작은 돌비에는 갑오민주창의통수천안전공봉준지단(甲午民主倡義統首天安全公琫準之壇)이라 새겨져 있다. 동학농민혁명 1주갑(一週甲)이던 1954년 천안전씨 문중에서 건립한 것으로 확인된 단비는 농민군 측을 기념한 최초 기념시설물이라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1945년 해방을 맞은 후 천안전씨 문중에서는 전봉준 사당을 건립하려고 사업을 계획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사업이 관으로부터 불허되면서 이 단비를 세운 것이라고 알려지고 있다.



황토현전적지



전봉준선생상


● 전북 정읍시 덕천면 동학로 742

● 사적 295호(1981. 12. 10.)


  황토현전적지는 1981년 사적 제295호로 지정되었다. 계곡을 사이에 두고 두승산과 천태산으로 이어지는 황토재는 해발 35미터의 낮은 구릉지다. 이곳에서 1894년 4월 6일 밤부터 7일 새벽 동학농민군이 전라감영군을 맞아 대승을 거두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기념탑이 갑오동학혁명기념탑(1963)이다. 이 기념탑은 민중지향성을 함축하는 ‘농민’이라는 용어가 포함되지 않아 아쉬움이 남지만 ‘동학란’으로 불리던 갑오년의 역사를 ‘혁명’으로 격상시켰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고 있다. 기념탑 아래에는 1983년부터 추진된 황토현전적지 정화사업 일환으로 이루어진 황토현전적지관리사무소(1884)와 1987년 건립·설치된 (구)기념관, 전봉준선생상, 제민당(濟民堂), 구민사(救民祠) 등이 자리하고 있다.


  황토현전적지관리사무소(舊기념관) 맞은편에는 2004년 5월 개관한 전라북도동학농민혁명기념관과 교육관이 자리하고 있다. 이 기념관과 교육관은 2011년 1월부터 문화체육관광부 특수법인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전라북도로부터 위탁받아 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동학혁명모의탑, 무명동학농민군위령탑


● 전북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 주산마을


  주산마을 입구에 서 있는 동학혁명모의탑은 1969년 사발통문 거사계획 참여자 후손들이 건립하였다. 이 마을에서 동학농민혁명 거사를 계획한 사발통문이 작성되었다. 조병갑의 온갖 수탈과 학정에 못이겨 고부군의 농민들은 수차례 조병갑에게 진정서를 내고 호소하였으나 도리어 쫓겨나기를 거듭했다. 이에, 1893년 11월 전봉준 등 20명은 고부군 서부면 죽산리(현 정읍군 고부면 신중리 주산마을) 송두호의 집에서 조병갑의 학정에 대한 대책을 모색하고 거사계획을 작성하였다.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면 무명 동학농민군위령탑이 세워져 있다. 대뫼마을 녹두회관 앞에 세워진 위령탑은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이던 1994년 정읍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에서 무명(無名) 농민군의 뜻을 기리고자 건립하였다. 사발통문 모양의 둘레석 안에 5미터 크기의 주탑과 그 주위를 둘러싼 1-2미터 크기의 보조 탑 32개로 되어 있다. 보조 탑에는 각각 무명농민군을 상징하는 얼굴, 무기로 사용했던 농기구 등이 새겨져 있다.



고부관아 터



고부관아터


●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 교동 3길 14(고부리)

● 전북기념물 제122호(2005.06.03.)


  고부는 드넓은 호남평야와 인근 서해안을 접해 농산물과 해산물이 풍부한 지역을 관할하는 중요한 관청이었다. 당시 고부관아 자리에는 고부초등학교가 들어서 있는데, 교문 입구에 <고부군 관아지(官衙址) >라는 표석만 있을 뿐 관련 유적은 남아있지 않다. 다행히 고부초등학교 옆에는 1403년 건립된 향교가 남아 있어서 그나마 옛 자취를 가늠할 수 있다. 고부관아를 둘러싸고 고부리 마을 북쪽 성황산 언덕에 긴 타원형으로 그 둘레가 1,050미터에 이르는 고부읍성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군자정



군자정


● 전북 정읍시 고부면 영주로 532-7(고부리)

● 전북유형문화재 제133호(1990.06.30.)


  군자정은 고부농민봉기 당시 고부군수 조병갑이 기생들과 어울려 놀았던 곳으로 알려진 곳이다. 전북유형문화재 제133호로 1990년 6월30일 지정된 누정(樓亭) 인 군자정이 언제 건립되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다만, 이 정자가 황폐해져 현종 14년(1673) 고부군수 이후선(李厚先)이 연못을 파내고 정자를 새로 고쳤다는 기록이 있고, 영조 40년(1764)에 군수 이세형(李世馨)이 중건했으며, 1900년 초에 군내 인사들이 힘을 합해 다시 고쳤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이 정자는 예로부터 고부 고을의 운세와 관련된 설화가 깃든 정자로, 연정 (蓮亭)이라고도 부른다. 연정이란 이 정자가 원래 연못의 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까닭에 사방이 연꽃으로 둘러쌓여 있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언제부턴가 정자의 이름이 연정에서 군자정으로 바뀌었는데 이는 연꽃이 ‘꽃 가운데 군자’라는 옛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자료

· 최현식, 『갑오동학혁명사』, 신아출판사, 1980.

· 오지영, 『동학사』, 대광문화사, 1984.

· 정창렬, 「갑오농민전쟁 연구」 - 전봉준의 사상과 행동을 중심으로, 연세대 박사학위, 1991.

· 배항섭, 「동학농민전쟁 연구」, 고려대 박사학위, 1996.

· 고성훈, 『민란의 시대』 - 조선시대 민란과 변란들, 가람기획, 2000.

· 이이화, 『민란의 시대』 - 조선의 마지막 100년, 한겨레출판, 2017.

· 「 수록」(隨錄),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3』, 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2008.

· 「동비토록」(東匪討錄),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3』, 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2008.

· 「임하유고」(林下遺稿),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5』, 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2009.

· 「 석남역사」(石南歷史),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5』, 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2009.

· 「감오약력」(甲午略歷),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5』, 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2009.

· 「전봉준공초」(全琫準供草),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12』,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2014.

· 『한국정치외교사 논총』, 한국정치외교사학회, 1995.

·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및 기념시설물 현황조사』,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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