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발행처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56149)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동학로 742

TEL. 063-530-9400 FAX. 063-538-2893

E-mail. 1894@1894.or.kr

COPYRIGHT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FOUNDATION.

ALL RIGHTS RESERVED

목차열기
2017년 봄 27호
파랑새의 꿈, 전봉준의 국가통치체제 구상

파랑새의 꿈, 전봉준의 국가통치체제 구상


김정기 前서원대학교 총장


  1895년 2월 18일 전봉준이 돌연 서울에 나타났다. 님의 생포를 명령한 당시 개화파 정권의 실세, 이노우에(井上) 공사를 공사관에서 대면하고 일본기자들을 스친 뒤 영사관 수사청에 갇혔다. 南토벌사령관의 극비특명 호송대가 10일 넘어 어느 날 나주를 출발한 것. ‘도적 전가놈’에게 몰아친 열풍에 왕도 서울은 요동쳤다. 현장보도를 보자. (2월20일 서울발, 3월5일자 東京朝日新聞)..“어제 전녹두가 영사관에 넘겨졌다는 소식에 온 도성이 떠들썩하게 알리기 시작, 희귀한 위인을 보려고 영사관 앞(충무로 진고개)은 삽시간에 흑산이 되었다.” ‘흑산’은 검은머리 백성의 인산인해. 님은 벌써 대원군을 대체한 백성의 영웅이 되었다. 이튿날 님은 수사청의 고위 경찰과 인터뷰를 결단했다. 그 전문을 읽자(20일 서울발, 3월6일자 위 신문). “동학수령과 합의정치(제목) 오늘 법무아문에서 참의 이재정과 주사 한명이 영사관에 와서 전녹두를 조사하던 중 일본경부가 물었다. ‘네가 경성을 공격해 들어와서 누구를 추대하려 했나?’. 이에 답하기를 ‘일본병을 몰아내고 악질관리를 쫓아내 임금님 곁을 깨끗이 한 뒤 나라의 기둥과 주춧돌 같은 몇몇 선비(柱石之士)를 억지로라도 내세워 정치를 하도록 하고 우리들은 즉각 귀농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가장 심각한 것은 국사를 모조리 한명의 세력가(섭정대원군 임금을 지칭, 필자)에게 맡기는 것이 큰 폐해가 됨을 알기 때문에 수인(數人)의 유명한 선비(名士)가 협의해서 의견을 모으는 합의법(合議法)에 따라 정치를 담당하게 할 생각이었다’고”.


  이 내용은 늘 죽음에 직면한 절망 속에서도 집념의 열기로 담금질하고 벼르기를 끊임없이 반복하여 완성한 사색의 정수였다. 놀랍게도 분노의 여지조차 찾을 수 없이 탈색된 기사가 짧고 쉽게 읽히지만, 단서 없이는 님의 사로(思路)에 들기가 어렵다. 여기에 님을 골수 근왕주의자로 낙인찍은 편견이 추가되면, 수인명사합의법의 정체파악은 그야말로 안개 속이다. 때문에 다양한 해석이 난무했다. 농민군세력 대원군〜 척사유림〜 온건개화파〜(단, 친일개화파〜은 제외)을 놓고 여러 조합을 이루는 연합정권론이 그 주류이고, 집단지도체제론·유사의회론·군민공치론 심지어 합의법 자체를 부정하는 해석도 공존한다. 그런데 공통점은 임금의 권력이나 지위변화에 한결같은 침묵.


  합의법의 실상을 정조준 하는 가늠자는, ①임금의 전권이 섭정대원군에게 이양되고 ②다시 군에게서 수인명사에게 이전되는 경로파악이다. ①의 사례는 1882년 7월 임오군인항쟁 때. 봉급쌀의 사기지급으로 폭발된 도성방위군과 백성의 연합군이 궁궐을 점령, 대원군을 섭정으로 추대했다. 민척정권은 붕괴되고 ‘포로’ 고종은 전권을 대원군에게 모두 이양, 자신은 왕의 자리만 유지하는 ‘허세’로 전락했다. 이는 백성의 힘으로 정권교체를 이룬 조선 최초의 장쾌한 드라마였다. 님의 혜안이 예서 번쩍였을 터. 군은 집권 34일 만에 청으로 납치되었고(3년 뒤 귀국) , 썩은 정권이 복귀했다. 이때부터 반청의식과 함께 ‘대원군의 신화’가 백성의 가슴마다 불을 지폈다. 1894년 봄 황토치 대승에서 치솟아 내내 지속된 백성의 왕 대신 대원군열망론[監國論]이 전국을 달굴 때, 님은 ‘군 독재의 큰 폐해’를 직시했다. 예컨대 토지·신분제의 개혁외면, 공포정치, 노년의 권력중독증, 인명경시 등등. ②의 사례. 1894년 7월 일본군의 경복궁강점으로 개화파정부가 섰을 때. 신설된 한시적 권력핵심기구, 군국기무처의 의원 십수명이 임금전권을 이양 받았다. 의원의 결정사항을 고종은 수정 없이 재가하고 섭정 군은 보고만 받는 ‘꼭두각시들’. 특히 일본에 투항한 군의 매국행위는 자신의 몰락을 촉진하는 매체였다. 합의법의 의안처리 과정은 군기처의원의 다수결 원칙과 집강소의 집강과 의원 약간 명 간의 협의방식을 모방했다.


  이상을 요약하면, 임금은 지위만을 유지하는 형식적인 국가원수, 중앙은 임금의 전권을 전국차원의 학덕을 겸비한 선비 몇 명에게 균등분배 하는 소수명사합의체제[과두명사감국체제], 지방은 집강소체제, 이 삼자의 결합이 님 체제구상의 핵심이다. 이것은 조선군주제의 폐기선언이자 혁명적인 국가체제전환의 천명이었다.


  압제와 수탈에 시달려 내일이 없는 무지렁이 백성에게 신나게 펼쳐 보인 ‘됴흔세상’의 청사진, 님이 황홀한 이곳을 향해 백성과 함께 치켜든 희망의 돛이었다. 님(1855~95)은 4월24일 새벽 처형을 맞이했다. 분명 홀가분하게.



김정기 (前서원대학교 총장)

서울대학교에서 무역학, 사학을 공부, 1996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원대학교 총장, 제주교육대학교 총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제주도 유수암마을 명예이장으로 선임되어 활동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 연구자로서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위원회 위원, 사단법인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이사장을 역임하는 등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선양하는데 많은 기여를 하였다.



정기구독 신청

발행처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56149)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동학로 742

TEL. 063-530-9400 FAX. 063-538-2893

E-mail. 1894@1894.or.kr

COPYRIGHT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FOUNDATION.

ALL RIGHTS RESERVED

2025년 겨울 62호
목차
目次 cont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