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전남지역 유적지를 찾아서
문병학 | 기념재단 기념사업부장

전남 장성군 / 조선의 최정예부대 경군(京軍)을 물리친 곳
광주광역시 / 나주 수성군 저지, 일본군 남해안 상륙에 대비한 든든한 후방기지
전남 장성군 / 1894년 정월 고부농민봉기를 도화선으로 무장에서 기포한 동학농민군은 고부관아를 재점령한 후 백산대회를 통해 대오를 확대재편하고 전주성 공략에 나섰다. 그러나 전라감영군 남진과 경군(京軍) 파병이라는 상황을 맞아 부대를 되돌려 남하(南下)하면서 황토현에서 전라감영군을 물리치고, 정읍 흥덕 부안 고창 무장 영광 함평 무안 등지를 거쳐 4월 22일 장성으로 들어왔다. 이어, 23일 장성 황룡에서 홍계훈이 이끄는 경군과 격전을 벌여 이학승(李學承, 경군 대관)을 전사(戰死)시키는 등 대승을 거두었다.
광주광역시 / 동학농민혁명 전체 전개과정에서 광주지역은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동학농민혁명 전체를 다루는 연구가 중점적으로 다루어지면서 상대적으로 광주광역시, 무안군, 영암군, 함평군 등지의 역사적 의미가 제대로 조명되지 못하였다. 이들 지역이 주목받아야할 이유는 이 지역 출신의 농민군이 많았다는 점 이외에도 나주지역을 중심으로 보수 세력의 힘이 강하여 농민군의 힘이 다른 지역에 비해 강하게 미치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따라서 광주지역은 동학농민군이 2차 봉기를 단행했을 때에도 손화중 휘하의 동학농민군이 북상하지 않고 이곳에 남아 나주 수성군을 제압하기 위해 침산, 선암, 두동, 죽산, 용진산 등지에서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던 장소이기도 하다.

황룡전승기념공원 전경
동학농민혁명군 승전기념탑 / 기념공원 (황룡전적지)

증좌승지이공학승순의비(贈左承旨李公學承殉義碑)
▣ 사적 제406호
▣ 전남 장성군 황룡면 신호리 산 1-1, 장산리 359 일대
고부농민봉기 후 무장에서 포고문을 공포한 동학농민군은 고부관아를 재점령한 후 백산에서 부대를 확대재편한 후 전라감영이 있던 전주성 공략에 나섰다. 그러나 전라감영군과 서울에서 경군이 파견되어 진압하러 내려온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동학농민군은 진로를 바꾸어 다시 남행하였다. 정읍 고부 흥덕 부안 고창 무장 영광을 차례로 석권한 농민군은 4월 16일 함평에 이르러 함평과 무안 일대에서 5일간 머물렀다. 이후 4월 21일 함평을 떠나 장성과 나주 쪽으로 향하다가 나주의 군사력이 더욱 강화되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장성으로 이동하였다. 이때 초토사 홍계훈은 4월 21일 영광에 도착하여 총제영(總制營)의 증원군 800명을 기다리면서, 22일 이학승(李學承)·원세록(元世祿)·오달 영(吳達泳)에게 총병력 470명 중 300명과 대포 2문을 내어주며 장성 등지로 가서 농민군의 정황을 살피게 하였다. 이렇게 하여 4월 23일 관군이 장성 월평(月坪)에 도착하였고, 황룡촌(黃龍村)의 농민군과 맞닥뜨려 오후 2~4시경 전투가 벌어졌다. 사기충천한 7~8천명의 동학농민군은 극로백(克虜伯, 크루프 소총) 등 압도적인 화력을 가진 관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대나무로 만든 장태 등을 이용한 이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은 관군의 선봉장 대관 이학승을 전사시켰는가 하면 대포 2문과 양총 100여 점을 탈취하였다.황룡전투는 농민군의 의식성장에도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황룡전투 이전까지 농민군의 의식수준은 대체로 “스스로를 지키는데 불과하였고, 감히 드러내놓고 관군과 대적하지 못하”거나 “어찌 감히 상명(上命)을 받은 경군에게 저항하겠다고 하십니까”라며 국왕의 군대, 곧 경군과의 대결을 의식적으로 피하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황룡전투는 농민군의 의식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매우 크다. 황룡전적지에는 1994년 장성군과 광주전남기념사업회가 기념공원(부지 10,223㎡)을 조성하였다. 기념공원에는 높이 30m, 직경 2.5m에 이르는 죽창 모양의 ‘승전기념탑’이 우뚝 서 있고, 진입로를 비롯하여 주차장, 테라스, 화장실 등 편의시설이 갖춰져 있다. 공원 옆 과일 밭에는 1897년 유림 측이 세운 대관 이학승 순의비가 서 있다. 한편 이곳은 1998년 국가사적(제406호)으로 지정되어 장성군에 의해 잘 관리되고 있다.
광주집강소 터 (관아 터)

광주관아 터 부근 / 현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부근
▣ 광주광역시 동구 광산동 13 일대
광주집강소가 설치된 곳은 광주관아 터였다. 이 같은 사실은 「순무선봉진등록」등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당시의 광주관아 위치는 현재 아시아문화전당과 옛 전남도청 부근, 옛 상무관 일대로 추정하고 있다.
동학의 광주지역 전파과정은 명확하게 확인되지는 않고 있지만 1894년 3월(음력) 26일경에 고부 백산에서 열렸던 백산대회 때 강대열, 박성동, 김우현 등이 많은 농민군을 인솔하여 참석한 것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갑오년 이전 광주지역에 동학이 전파되어 적지 않은 교도들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나아가 집강소 시기 광주지역은 손화중과 최경선이 통할했음을 알 수 있다. 1894년 9월 삼례 2차 봉기 단행 때 전봉준은 광주에서 집강소 활동을 벌이고 있는 손화중에게 삼례로 올라오라는 친필 편지를 보내기도 했으나 일본군이 바닷길로 해안을 공격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광주에 남겨두었다.(전봉준 공초)
용진산전투지

용진산 원경
▣ 광주광역시 광산구 선동 산69 / 광산구 지산동 산4 일대
광주광역시 광산구 소재 용진산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손화중이 이끄는 광주지역 농민군과 나주 수성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이 전투상황에 대해서는 「금성정의록」, 「난파유고」 등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집강소 시기 때는 최경선, 2차 봉기 이후에는 손화중과 오권선의 농민군이 나주를 공격했다가 실패하였다. 이후 10월 15일 무렵부터 나주 동쪽 20리 지점에 위치한 침산(砧山)과 송정리 옆 선암(仙巖)과 북쪽의 용진산(聳珍山) 일대에서 동학농민군과 나주 수성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으나 농민군은 패하여 광주로 후퇴하였다. 또한 11월 초에도 손화중, 최경선, 오권선 등은 또다시 나주성을 공격하기 위해 광주 두동 등지에 진을 치고, 손화중·최경선·오권선이 이끄는 농민군은 북쪽에서, 무안 배규인이 이끄는 농민군은 서남쪽의 함평 고막포에서 동시에 나주를 공격하기로 했다. 그러나 나주목사 민종렬이 11일 오후 수성군을 보내 용진산의 농민군을 선제공격하였다. 11월 13일 아침, 나주 수성군은 용진산 중봉(中峰)에 자리를 잡고 산봉우리에 있는 농민군을 향해 어지럽게 포를 쏘면서 공격하였다. 수적으로는 농민군이 우세하였으나 대완포와 천보총으로 무장한 수성군에 밀리고, 추위와 허기에 지친 농민군은 용진산 북쪽 사면을 타고 후퇴하였다.
침산전투지

마을 동쪽 건너편에서 본 침산
▣ 광주광역시 광산구 하산동 446-2
현재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하산 동곡동 침산마을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손화중이 이끄는 광주지역 농민군과 나주 수성군 사이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역사의 현장이다. 당시 나주는 호남에서 유일하게 농민군이 점령하지 못한 고을로 목사 민종렬 이하 향리가 중심이 되어 조직된 수성군이 인근 지역의 농민군까지 공격할 정도로 반농민군 세력이 강력하였다. 따라서 손화중은 나주성을 공략할 계획을 세우고 음력 10월 15일 경 이후 광주 농민군과 오권선이 이끄는 나주 농민군을 연합하여 나주 동쪽 20리 침산(砧山)과 송정리 옆의 선암(仙巖), 북쪽 용진산(龍珍山) 일대에 진출했다. 음력 10월 20일 나주목사 민종렬(閔種烈)은 농민군들이 나주를 공격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600여 명의 수성군을 출전시켰다. 이렇게 해서 10월 21일 나주 수성군 도통장 정태완은 침산에 도착하였다. 이때 농민군 수천 명은 침산 봉우리에 진을 치고 있었으나 나주 수성군이 쏘아대는 대포에 밀려 후퇴하고 말았다. 이어 11월 11일 손화중 휘하의 농민군은 나주 북쪽 40리 북창(北倉)등지에 모여 다시 전투를 벌였으나 정태완이 이끄는 나주 수성군에 밀려 후퇴하여 광주로 후퇴하였다.
광주동학농민혁명 기념공원


광주동학농민혁명 기념탑 (전경) 동학농민혁명기념비

이장마을 입구 표지석
▣ 광주광역시 남구 이장동(泥場洞) 216번지 일대
동학농민혁명기념비, 광주동학농민혁명기념탑 등이 세워져 있는 이 기념공원은 2016년 6월 3일 준공되었다. 중앙에 설치된 기념탑은 횃불을 상징하는 조형물로 제작되었고, 뒤편에는 검은 돌비를 설치하였다. 돌비에는 동학농민군 4개 강령, 동학농민혁명 역사적 의의 등이 새겨져 있다. 이곳 이장동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전투가 벌어진 현장은 아니지만 보수적인 향토정서가 강했던 나주에 인접한 곳이어서 농민군 활동이 주목되는 곳이다. 갑오년 당시 삼형제(고광문·고광인·고광동)가 나란히 동학농민혁명에 참가하였는데 그 삼형제의 고향이 바로 이곳 이장동이다. 삼형제 중 맏이었던 고광문의 증손 고영두 소유 땅에 광주광역시 남구청 등이 지원하여 기념공원이 조성되었다.
참고자료
· 『오하기문』, 역사비평사, 1994.
·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 역사비평사, 1997.
· 『동학농민혁명사 일지』, 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2006.
·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1』, 「兩湖招討謄錄」, 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2007.
·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8』, 「兩湖右先鋒日記」,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2010.
·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12』, 「全琫準 供草」,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2014.
·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및 기념시설물 현황조사』,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2011.
· 『전남지방 유적지 및 기념시설물 현황조사』,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20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