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송대화의 손자 송기평

문) 이번 호 유족 인터뷰에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고부에서 대접주로 활동하신 참여자 송대화의 손자 송기평 선생님을 모셨습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먼저, ‘녹두꽃’ 독자를 위해 선생님 본인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답) 우선 ‘녹두꽃’ 인터뷰를 요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송두호의 증손자이자 송대화의 손자인 송기평입니다. 고향을 떠나 살다가 20년 전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동학농민혁명 발상지 정읍시 고부면에 거주하고 있으며, 동학농민혁명유족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문) 선생님, 동학농민혁명이 지난 한 세기 동안 반란사건으로 축소되고 왜곡된 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가 2004년 특별법이 제정되었고, 지난 2월에는 마침내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이 제정되어 지난 5월 11일에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정부주관으로 기념식이 성대하게 거행되었습니다. 아울러 지난 봄부터 중앙방송사에서 동학농민혁명을 주제로 드라마 ‘녹두꽃’이 제작·방영되었습니다. 이런 분위기로 인해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대중적인 역사인식이 많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적 변화를 보면서 참여자 후손으로서 감회가 남다르실 것 같은데 어떠신지요?
답) 동학농민혁명은 역사적으로도 참 좋은 일을 한 건데 그동안은 역적의 후손으로 인식되어 제대로 말도 못하고 참 힘든 시절이 많았습니다. 예전에는 동학농민혁명 유족이라고 내놓고 말하기도 좀 그랬습니다. 제대로 인정을 못 받았었거든요. 지금은 동학농민혁명이 국가기념일도 되고 드라마 ‘녹두꽃’도 방영됨으로써 혁명가의 후손이라는 것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서 기분이 참 좋습니다. 또 전국적으로 여러분들이 알아주시고 전화도 해주시고 해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쉬운 점은 동학농민혁명을 ‘반란’이 아닌 ‘혁명’으로 인정받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연세가 많으신 유족들이 많이 돌아가셔서 함께 기쁨을 나누지 못해 안타깝습니다. 그리고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가세가 기울어 힘들게 여생을 보냈던 부모님 생각도 많이 났습니다. 이번 국가기념일 제정을 계기로 더 많은 유족들이 자긍심을 가졌으면 합니다.
문) 조부님(송대화)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사실을 언제 처음 알았는지요? 그리고 어떤 경로를 통해 알게 되셨나요?
답) 아마 제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정도였을 거예요. 일본 대학생이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연구를 한다며 저희 집에 취재를 온 적이 있었어요. 그때가 동학혁명모의탑을 1969년에 건립했으니까 아마 그 무렵쯤이었을 거예요. 저의 고모님이 일본 대학생에게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많은 말씀을 해주셨는데, 그때부터 저도 사발통문과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관심도 없었고, 자료 발굴을 위해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는데 일본 대학생이 관심을 갖고 취재를 하는 것을 보고 좀 의아하면서도 인상 깊었습니다. 그때 고모님이 여든을 훌쩍 넘기셨을 때였는데 동학농민혁명의 산증인으로 저희 집안의 내력과 동학농민혁명에 활동하셨던 증조부(송두호)님과 조부(송대화)님에 대해 자세히 말씀해 주셔서 저희 집안이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문) 선생님의 조부(송대화)님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어떠한 활동을 하셨는지요? 그리고 선생님의 집안에서 사발통문이 발견되었고, 동학혁명모의탑도 선생님 집안에서 사비를 내서 건립을 도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런 부분에 대해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답) 네, 할아버지께서는 대접주로 활동하셨고 대접주 임명장과 할아버지 이름이 들어간 사발통문이 1968년에 저희 집안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사발통문이 발견된 후 1969년에 마을(정읍 고부면 신중리 주산마을) 입구에 동학혁명모의탑을 사발통문 거사계획에 참여했던 후손들이 뜻을 모아 건립하였습니다. 이 탑을 건립할 때 저희 집안이 많이 힘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께서 많이 도우셨습니다. 그 탑을 깎는 석공 네 명을 저희 집에서 다 수발을 들었습니다. 이 내용은 제 집사람이 더 잘 알고 있습니다.
답) (송기평씨의 부인) 증조부님(송두호)께서는 저희 집안 차 종손인데요. 증조부님한테는 저희 바깥양반(송기평)이 제일 큰 증손자입니다. 저희 시어머니께서는 바깥양반이 외부 일로 많이 바빴기 때문에 며느리인 저에게 많은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어머님은 저한테 “내가 너한테 부탁한다. 너도 꼭 알고 있어야 한다”고 하면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던 저희 집안에 관한 이런 저런 얘기를 많이 해주셨습니다. 동학혁명모의탑 건립할 때가 1968년 가을이 지나고 12월 겨울이었는데 석공 네 명이 어머니 집에서 생활을 하셨다고 합니다. 지금은 돌을 전기기계로 돌탑 모양이나 글씨를 다 파지만 그때만 해도 정으로 일일이 쪼아서 작업을 했습니다. 어머님이 음식 솜씨가 좋아서 두 달 동안 석공들에게 밥을 해 주시면서 뒷바라지를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문) 선생님께서는 2004년 「동학농민혁명참여자등의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이 제정된 이듬해 2005년에 유족등록 신청을 하셨는데요. 유족 심사조서에 선생님의 조부님께서 고부관아를 점령한 후 1894년 겨울 나주전투에서 패배한 후 진압군의 총에 관통상을 입고 야간에 전라도 임피로 피난간 것으로 기록되어있습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조부님의 활동과 임피로 피신한 후 행적에 대해 들으신 내용이 있으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조부님은 나주전투에서 일본군한테 팔에 관통상을 입고 토물 방죽 위 진등(농민군 훈련장)에 쓰러졌는데, 그 옆에 여러 구의 시체가 있었답니다. 죽은 척하고 누워있었는데 일본군이 확인사살을 하러 2명이 왔답니다. 그 중 1명이 많은 시신을 한 번에 치우지 못하니 거적으로 덮어두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할아버지는 관통상을 입은 팔을 소나무의 송진을 따서 바르고 몇 날 며칠을 걸어서 포구로 나가 배를 타고 군산 임피로 피신했다고 들었습니다. 피신한 후에는 성씨를 증조모님의 성(姓)을 따라 ‘장(張)’으로 바꾸고 성(姓)을 팔았다고 해서 이름을 ‘성팔(姓八)’ 그래서 ‘장성팔(張姓八)’이라는 이름으로 머슴살이를 했다고 합니다. 머슴살이를 하다가 사람을 보내 고향집이 있는 고부의 정세를 살핀 후 임피로 피신한지 11년만인 1905년에 고향으로 돌아오셨다고 합니다.
문) 아, 네. 할아버지께서 다행히 살아남으셔서 고향에 돌아오셨군요. 대부분의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던 후손들은 이후로도 줄곧 관의 감시를 받아야 했고, 재산을 약탈당해서 가세가 기울어 힘들게 사셨다고 하는데, 조부님께서 고향에 돌아오신 후 집안 형편은 어떠하셨나요?
답) 할아버지(송대화)는 고향에 아내(송기평의 조모)와 어린 딸을(송기평의 고모)을 두고 피신했습니다. 일본 놈들이 할머니와 고모에게 와서 할아버지가 어디로 피신했는지 말하라며 모진 고문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대나무로 만든 바늘로 손톱 밑을 찌르는 고문이 가장 고통스러웠다고 고모님과 부모님께 들었습니다. 할아버지가 다행히 고향으로 돌아오셨지만 집안이 이미 쑥대밭이 되었다고 합니다.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기 전에는 증조부(송두호)님의 집안은 고부군 일대 마을에서는 증조부님의 땅을 밟지 않고 지나다닐 수 없을 정도로 천석꾼 집안이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굶거나 끼니를 해결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많았는데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 증조부님께서 고부관아에 곡물을 엄청나게 바쳤다고 합니다. 증조부님은 65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동학농민혁명에 가담하셨고, 1894년 나주전투 이후 도피생활을 하시다가 진압군에게 피체되어 1895년 1월 6일에 형사(刑死)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사일이 1월 5일 피체일입니다. 증조부님의 뜻을 따라 조부님도 동학농민혁명에 앞장서서 활동하셨고 다행히 살아남으셔서 고향에 돌아왔지만 고향에 돌아와 보니 집도 소실되고, 전 재산을 몰수당해서 살기가 어려웠답니다. 동네 사람들이 힘을 모아 세 칸짜리 흙집을 한 채 지어 줘서 그곳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그 집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저의 아버님 그리고 저도 살았는데 어려운 형편이 나아지지는 않았습니다. 아버님(송후섭)도 힘들게 사셨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송기평)인 저를 대학도 못 가르친 것을 어머님은 두고두고 마음 아파했습니다. 그 많던 땅을 다 빼앗겨 자식들 고생시키고 역적으로 몰려 숨죽이고 산 세월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 송대화 대접주 임명장

▣ 동학혁명모의탑 앞

▣ 무명동학농민군위령탑 앞(정읍시 고부면 주산마을)
문) 가슴이 먹먹해지네요.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던 분들이 항일의병, 3.1운동과 반일항쟁과 독립운동에 많이 참여하신 것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우리민족의 위대한 스승인 백범 김구 선생님을 비롯해서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중 9명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였다는 사실만 보아도 그 숭고한 애국애족정신이 면면히 이어져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선생님의 조부님께서 고향에 돌아오신 후 어떠한 일들을 하셨는지 혹시 들으신 내용이 있으면 말씀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답) 할아버지께서 3.1운동에 참여하셔서 옥고를 치렀다는 기사가 경향신문에 나온 적이 있었는데요. 정확한 문헌은 찾지 못했습니다. 우리 유족 분 중 한분인 고(故) 김영중 선생님한테 할아버지(송대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유족 분들이 모이면 이런 저런 얘기를 많이 하시는데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분들이 3.1운동에 많이 참여하셨고 저희 할아버지도 참여했다고 들었습니다. 할아버지께서 1905년에 고향으로 돌아오셨는데 돌아오신 후에는 천도교 487 교리강습소를 재건하여 포교활동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할아버지가 고향에 돌아왔을 때 동네 사람들이 “왔다네, 왔다네, 대화가 돌아왔다네”라며 환대했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할아버지께서 덕을 많이 쌓으셨구나 생각했습니다.
문) 1920년대 중후반에 집필되어 사료적 가치가 높이 평가되는 『東學史』(초고본)과 사발통문에도 송대화 조부님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혹 다른 자료나 문헌이 있으신지요?
답) 할아버지(송대화)에 대한 기록이 엄청 많았었대요. 자료가 싸리로 만든 상자 15개 정도는 돼 보였다고 고종사촌 형님한테 들었습니다. 하지만 역적으로 몰렸기 때문에 후손들이 해가 입을까봐 많은 자료를 없앴고, 아버님(송후섭)께서도 제가 묻지 않으면 거의 말씀을 안 해 주셨습니다. 다행히 아버님께서 족보 속에 사발통문, 대접주 임명장 등을 보관하시고 계시다가 1968년에 문중회의 때 공개했고, 그 문헌은 역사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에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 기증하셨습니다.
문) 동학농민혁명 기념일도 제정되고 드라마 ‘녹두꽃’이 방영됨에 따라 많은 분들의 관심이 높아졌는데, 주변에서 유족 등록에 관한 문의가 있으신지요?
답) 얼마 전에도 전주에 사는 분한테 문의가 온 적이 있었는데요. 벌써 100년이 넘은 일이기 때문에 자료가 제대로 보존되지가 않아 실제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어도 유족으로 인정되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 참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사발통문에 이름이 있는 사람은 증명이 되지만 사발통문에 안 나오는 사람은 증명하기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조사할 때 여러 방향으로 조사를 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유족이 아닌 사람을 유족으로 등록하는 사례는 없어야 할 것입니다. 유족 등록하는 데 있어서 재단에서 각별히 신경을 써주셨으면 합니다.
문) 긴 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끝으로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면 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제가 유족회를 나간지가 20여 년 되는데요. 항상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제가 유족회 이사로 있는데 유족회에서 전국에 있는 행사에 참여하고 싶어도 예산이 부족해서 집행부 몇 분만 참여하는 실정입니다. 유족 분들이 연세도 많으셔서 숫자도 많이 줄고 있어 안타까운 마음이 많이 있습니다. 되도록 많은 유족 분들이 여러 행사에 참여할 수 있도록 예산에 좀 신경을 써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기념일도 제정되고 분위기가 많이 좋아져서 앞으로 점점 좋아지리라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 송기평씨 가족|무명동학농민군위령탑 앞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