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의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 3

전주객사
전주 객사
객사(客舍)란 객관(客館)이라고도 불렸으며, 고려·조선시대에 각 고을에 설치했던 관사(館舍)를 뜻한다. 고려까지는 외국 사신이 방문했을 때 묵거나 연회를 갖는 것이 객사의 주된 기능이었으나, 조선시대에는 객사에 위패를 모시고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향해 예를 올리기도 하고 나라에 경사나 국상 등에는 관민이 모여 의식을 거행했으며, 새로 도임한 관리가 가장 먼저 배례하며, 왕명을 받은 신하가 머물면서 교지를 전하는 등 여러 용도로 사용되던 곳이었다.
객사는 중앙에서 파견한 관료가 주재하는 곳이면 거의 빠짐없이 지어져 전국적으로 상당수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되나 오늘날 남아 있는 것은 드물며 그중 보물로 지정된 것은 전주객사(보물 제583호)와 여수 진남관(보물 제324호) 둘뿐이다.
전주객사의 창건시기는 기록이 없지만 성종 2년(1471년) 전주사고를 창건하고 남은 재목으로 서익헌을 동익헌과 같은 규모로 고쳤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원래 주관과 그 좌우에 동익헌·서익헌·맹청·무신사 등 건물이 있었으나, 1914년 북문에서 남문에 이르는 관통도로의 확장공사로 좌측의 동익이 철거되고 현재는 주관과 서익만 남게 되었다. 해방되면서 서쪽광장이 경찰학교로 쓰였으며 서익 건물 바짝 밑까지는 사유지로 매각되어 고층건물이 들어서기도 했다. 북쪽의 넓은 공터도 주관 처마 밑까지 개인에게 매각되어 체신청 건물이 세워지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으며, 이 과정에서 추녀 끝을 잘라내어 원형이 훼손되기도 했다.
전주객사는 풍남문에서와 마찬가지로 전라감영(구 도청)의 권위와 명예를 상징하는 매우 중요한 뜻을 지닌 문화재다.
주관 정면에는 ‘풍패지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풍패란 한나라 고조의 고향 지명으로 왕조의 본향을 일컫는 말로 쓰인다. 전주가 조선왕조를 개창한 전주 이씨의 본향이기에 이를 본떠 전주를 ‘풍패지향’이라고 부르는 데서 연유한 것이다.
객사가 동학농민혁명 관련 자료에 직접 명시된 사례는 거의 보이지 않지만, 이곳 선화당에 동학농민군 전라좌우도 대도소가 설치되었던 것으로 미뤄보아 적지 않은 관계를 가졌던 곳으로 보인다. 현재는 소실된 선화당의 복원과 더불어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안내판의 설치가 필요하다.
이두황의 묘와 묘비
이두황은 서울의 상인 출신으로 가난했다. 그는 1882년 임오군란 이후 무과에 급제해 여러 관직을 지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양호초토영에 배정되어 초토사 홍계훈의 휘하의 대관으로 농민군 진압을 위해 전라도로 내려갔다. 1894년 7월에는 장위영 참령관, 8월에는 장위영 부영관으로 승진했고, 9월에는 죽산부사에 겸임 발령되었으며 10월에는 죽산부사겸 양호도순무영우선봉이 되어 농민군 진압에 앞장섰다.
재봉기 당시에는 공주를 향해 내려가던 중 목천 세성산에 주둔하고 있던 농민군을 격파했으며, 이후 해미, 홍성 등 내포지역에서 농민군을 진압했다. 이두황은 공주 우금티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나 여기에서 패배해 후퇴하던 농민군을 공격해 진압하기도 했다.
1895년 10월에는 훈련대 제2대 대대장으로 재임 중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했다. 체포령이 내려지자 1897년 1월에 아들과 함께 부산으로 도주해 일본으로 망명했다.
망명한 10여 년 동안 일본열도를 여행하다 1907년 특별사면 되어 귀국했다. 친일파를 확보하려는 이토 히로부미의 배려로 귀국한 해에 중추원부찬의가 되었으며 1908년 1월에는 전라북도의 관찰사가 되었고, 같은 해 2월에는 전라북도 재판소판사를 겸임했다. 이후 전라북도 장관으로 임명받아 1916년 사망할 때까지 재임했다.
전주 기린봉에 위치한 기린사 입구에 위치한 이두황의 무덤은 2m가 넘는 묘비가 함께 세워져 있으며, 묘비의 내용 중 후손이나 친일관련자들의 이름은 삭제되어있다. 묘비에 친일파라는 낙서 등 일부 훼손되어있으나 대체적으로 잘 보존되어 있다.


좌 초록바위, 우 이두황의 묘와 묘비
초록바위
초록바위는 완산칠봉에서 동북 쪽으로 1km정도 떨어진 전주천변에 자리하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초록바위는 깎아지른 절벽이었으며, 을창한 숲이 조성되어있었고 빛깔이 푸르스름해 초록바위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이곳은 조선시대에 죄인을 처형하는 장소로 활용되었으며 그중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인 김개남 장군이 참형을 당한 것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전봉준 장군이 이끄는 동학농민혁명군이 공주에서 우금티 전투를 치를 무렵 김개남 장군은 부대를 이끌고 청주성 일대에서 관군과 일본군의 연합군과 맞서 싸웠으나 패배했고 충청도 연산 일대에서 전봉준 장군과 합류해 전라도 쪽으로 후퇴했다. 김개남 장군은 전주까지 전봉준 장군과 동행했으나 전주에서부터는 남원방면으로 퇴각했다. 그는 12월 1일 태인 산내면 종송리에 매부의 집에 피신해 있던 중 옛 친구인 임병찬의 밀고로 인해 관군에게 체포되었다.
체포된 김개남 장군은 전주로 압송되어 서울로 이송되어야 했으나 전라감사 이도재가 동학농민군들이 김개남 장군을 구하러 올 것을 두려워해 임의로 초록바위에서 처형해버렸다. 처형된 날은 1894년 12월 13일로 김개남 장군의 나이는 42세였다. 김개남 장군의 머리는 서울로 보내져 서소문 밖에 3일간 효시되었으며 남은 시신은 남원 일대의 양반 토호들이 몰려들어 분풀이에 이용했다고 하니 강경파였던 김개남 장군에게 원한을 품고 있던 이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초록바위는 1936년 제방공사를 하면서 상당부분 깎여나간 상태다. 바로 아래의 도로변에는 초록바위를 소개하는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