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기드문 ‘평민지도자’ 차치구(車致九)
성균관대학교 교수 배항섭
오지영의 『동학사』에 따르면 차치구는 동학농민군의 제1차 봉기 당시 손여옥, 임정학 등과 함께 정읍 지역에서 일어난 농민군 지도자였다. 농민군 지도자들 가운데는 중농 또는 향반 출신들이 많았지만, 차치구는 보기 드문 평민 출신이었다. 차치구는 정읍 입암면 마석리에서 가난한 집 아들로 태어났다. 가난한 데다 신분도 평민이어서 서당에도 다니지 못했지만, 키가 7척의 거구인 데다 기개가 남달라 장수감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고 한다. 그는 스무 살 안팎에 이웃마을 대흥리로 옮아가 살았는데 흥미로운 일화가 전해진다.
대흥리와 이웃마을인 지선동에 임 감역(監役은 벼슬 이름)이라는 천석꾼 부호가 살고 있었다. 전라도 남쪽 지방에 많은 땅을 가지고 있던 임 감역은 그 땅 대부분을 소작을 주었는데, 작인 가운데 양반 끄트머리인 소작인들은 위세를 빌려 도조를 내지 않았다.
임 감역은 청년 차치구를 불러 “도조를 받아 마음대로 쓰라”고 일렀다. 차치구는 그곳에 가서 소작인들을 모두 모아놓고 그중 힘센 듯한 두 사람을 제압한 후 “양반인 주제에 도조를 안 내는 도둑놈 짓을 하느냐”고 호통을 치고 위협을 가했다. 이렇게 해서 도조 수백 섬을 거두고 나서는 소작인들에게 술과 고기를 잘 대접하고 말했다. “갑자기 도조를 내느라 무리했을 터이니 3분의 2는 도로 가져가시오. 다음부터 도조는 꼬박꼬박 내시오.” 그리고 나머지는 동네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한다. (손자 용남의 증언)
이 일화는 그의 기질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언젠가 전봉준이 대흥리로 차치구를 찾아와 함께 거사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차치구는 “우리 군의 수령을 내쫓는 일은 할 수 있으나 다른 곳에 가서 거사하면 역적이 된다”고 거절했다 한다. 이에 전봉준이 “나라를 위해 일어나야 한다”고 끈질기게 권유하자 전봉준을 따라 고부 봉기에도 참여했고, 이어 전주 입성에도 앞장섰으며, 전봉준의 후군(後軍)대장이란 호칭을 얻었다고 한다. 관군측 기록에는 그의 활동상에 대해 “대장기와 숙정패(肅靜牌)를 세우고 포군 4~5백여 명을 거느리고서 좌우도를 두루 다니면서 관장을 능욕하고 이민을 노략질한 것이 끝간 데가 없었다”(이두황의 「양호우선봉일기」)고 했다. 실제로 집강소 시기에 흥덕현감 윤석진이 농민군 집강소에 협조하지 않고 그곳 농민군 두령 고영숙을 잡아 가두자 차치구가 이끄는 농민군은 흥덕 관아를 들이쳐서 고영숙을 구하고 윤석진을 혼낸 적이 있다.
정읍 지역을 무대로 활동한 차치구의 이러한 활약상은 지역 유생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었고,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1894년 11월 농민군이 일본군과 관군의 공격을 받고 패배를 거듭하자 곳곳에서 수성군과 민보군이 일어났는데, 정읍·흥덕·고창지방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 지방의 토호로 악명이 높은 강영중과 현감 벼슬을 샀던 은수룡 등은 이른바 ‘창의문’을 돌리고 농민군 탄압에 나섰다. 그들이 남긴 『거의록』에 따르면 “지금 도둑의 형세는 갈수록 뻗어가고 심지어 수령을 죽이기도 하며 군현을 함락하고 성지(城池)를 점거하기도 한다. 하물며 동학의 도둑 차치구는 관아에 들어가 행패를 부리고 삼강오륜을 깡그리 저버리고 있으니 일이 매우 절박하다”고 하였다.
그는 2차 봉기 때에도 많은 농민군을 이끌고 공주와 논산전투에도 참전했고 이어 전봉준의 주력군이 원평·태인전투를 벌일 적에도 일선 행동대로 활약했다. 전봉준과 끝까지 행동을 같이한 것이다. 전봉준이 태인전투를 끝으로 부하 10여 명과 함께 순창 피로리에 몸을 숨길 때도 차치구는 전봉준과 동행했는데 그의 어린 아들 경석도 데리고 다녔다 한다.
차치구는 피로리에서 전봉준과 헤어져 용케 고향땅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마석의 뒷산인 국사봉 토굴에서 숨어 지냈으나 결국 마을 사람의 고발로 체포되었다. 흥덕 수성군의 토포유사인 김재구가 군사를 이끌고 이 토굴을 덮치자 차치구는 두려움 하나 없는 몸짓으로 당당하게 걸어 나왔다. 그의 손에는 칼 한 자루와 담뱃대 하나가 들려 있을 뿐이었다. 수성군들이 그를 묶으려 하자 “비겁하게 도망치지 않겠다. 이대로 같이 가자”고 호통쳤다 한다.
현감 윤석진은 그를 닦달했다. 그리고 그동안의 행적을 심문하고 동조자를 불라고 회유와 고문을 섞어 몰아쳤다. 차치구는 “네 소행으로 보아 죽이고 싶었는데 살려 주었더니 끝내 너에게 당하는구나”라고 소리치며 기세가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그러나 끝내 윤석진에 의해 불법적으로 처형되고 불에 태워졌다. 후손들은 차치구의 제사를 12월 29일로 잡아 지내고 있다. 사형장에 내팽개쳐져 있던 그의 사체는 어린 아들 경석(京石)이 밤에 몰래 수습, 30리를 달려 선산 아래에 가매장했다고 한다. 이 차치구의 아들이 바로 1910~30년대 크게 교세를 떨친 보천교의 교주가 된 차경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