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소문 역사공원 중심에 ‘동학농민혁명사’가 있다
채길순 (명지전문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서울 서소문 밖에 ‘서소문 역사공원’이 계획되고 있다
우리 역사에서 서소문 밖은 어떤 곳이며, ‘서소문 역사공원’에 무엇을 담아야할까? 조선 500년 역사에서 조선 후기는 개혁과 변혁의 기운이 강하게 일어났던 시기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봉건지배 계층의 무능을 보여줬고, 이로 인해 농촌경제는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이런 절망의 시기에 국토를 일구고, 침체된 생산력을 높인 것은 직접 생산을 담당했던 민중이었다. 농업 생산량 증가와 함께 수공업 광업이 발달했고,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했다. 이런 상공업 인구 증가와 경제력 향상은 조선후기 사회 계급 구조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새로운 계층으로 서민지주, 부농, 반실업인 빈농, 독점상인인 도고(都賈), 소상인, 수공업자 등 다양한 계층이 등장했다.
이 시기에 평등과 개혁을 앞세운 동학이 등장했고, 천주교가 유입되면서 민중들의 사회 구조 개혁에 대한 목소리가 점차 높아가고 있었다.
이렇게 봉건 지배층의 지배질서가 민중세력의 강력한 도전에 직면해 있을 때 일본 및 서구 열강의 침략 위협도 함께 닥쳤다. 1860년 영국과 프랑스군에 의해 북경이 함락되어 동양의 문호가 개방됨으로써 한반도 개방을 압박하여 후기 조선은 세계열강의 각축장이 되고 말았다.
이런 위기의 시기에 최제우가 민족 민중 종교인 동학을 창도하게 된다. 이에 위협을 느낀 보수 반동 지배 계층은 사회 개혁은커녕 개혁주의자나 인간 평등을 내세운 동학교도와 천주교도를 처형하는데 급급했다. 이들은 서소문 및 서소문 밖에 감옥과 처형장이 있어서 민중들을 가두고 목을 쳐서 서소문밖 저잣거리에 머리를 내걸어 민중들을 겁박했다.
이런 조선후기 반봉건 개혁운동의 중심에 1894년 동학농민혁명사가 있었다. 정월 고부에서 탐관오리 조병갑의 폭정에 시달리던 민중들이 봉기의 횃불을 올렸고, 동학농민군은 3월 무장에서 기포하여 파죽지세로 전주성을 함락하는 등 호남지역을 석권한다. 그러나 부패한 정권이 청나라 군사를 끌어들여 이 땅에서 청일전쟁이 일어나게 되고, 동학지도부는 할 수 없이 전주화약을 맺는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군이 경복궁 침탈로 조선침략 야욕을 드러내자 동학지도부는 9월에 재기포를 선언하여 조선팔도의 동학농민군이 일제히 일어나 동학농민혁명이 최고조에 달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많은 동학교도의 머리가 서소문 밖에 내걸렸다. 1871년 영해에서 교조신원운동을 벌였던 이필제가 군기시 앞길에서 모반대역부도죄로 능지처사되었고, 함께 체포된 정기현, 정옥현도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형에 처해졌다.
1894년 6, 7월에 서울 도성 안에서도 동학농민군의 움직임에 호응하여 임금을 몰아내고 새로운 정부를 세우려는 ‘경성습격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의 주모자 24명에 대한 재판이 1895년에 4월 19일에 있었는데, 박준양을 비롯한 5명의 동학당 주동자들이 처형되어 서소문 밖에 효시되고 나머지는 유배형을 받았다.
12월에는 호남의 동학지도자 김개남, 황해도의 성재식, 경기 수원지역의 안교선, 최재호가 서울로 압송 처형되어 서소문 밖 저잣거리에 효시 되었다. ‘고종실록’에 네 지도자의 머리를 서소문 밖에다 경계하라는 기록이 전해졌고, 영국의 여행가 비숍의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에 ‘동학의 지도자들 효시’에 대한 목격담이 기록되었다. 효시된 모습을 두 일본인 기자가 사진 촬영했고, ‘동학수괴 실견(東學首魁 實見)’이라는 신문기사를 남겼다. 김개남은 전주 감영에서 처형되어 머리만 올라왔는데 안교선, 성재식, 최재호 세 두령의 버려진 몸통에 대한 비숍의 목격담이 있다. 이밖에 서소문 밖 처형과 효시에 대한 역사 기록은 많다. 1618년에 허균이 서소문 밖에서 처형되었다. 1811년에 평안도 지역에서 난을 일으켰던 홍경래와 민란의 주동자들이 처형되었고, 임오년(壬午年, 1882)에는 부패한 관리를 처단하기 위해 난을 일으켰던 훈련도감의 군병들이 일어났다가 서소문 밖에 효시되었다. 갑신년(甲申年, 1884)에 정치 개혁을 위해 정변을 일으켰던 선각자들의 머리가 서소문 밖에 내걸렸다. 일본이 한일합방을 위해 강제로 군대를 해산하자 이에 반발한 조선군과 일본군 사이에 서소문 일대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수많은 조선군이 희생되었고, 시체가 서소문 밖 만초천 변에 한 달 동안 방치되었다.
이렇게, 서소문 밖은 조선 후기에 사회 변혁을 위해 저항한 민중의 혼이 살아 숨쉬는 역사적인 장소다. 동학농민혁명을 비롯한 민중 수난사는 후손들을 일깨우는 소중한 문화 역사적인 유산이다. 서소문 역사공원은 보편타당한 역사적인 안목을 바탕으로 계획되어, 역사의 총체적인 의미가 담긴 명실상부한 ‘민중의 광장’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필자약력
청주대학교 국문학과 동 대학원 박사
1983년 충청일보 신춘문예 당선
1996년 한국일보 광복50주년기념 1억원 장편공모 <흰옷 이야기> 당선, 소설가로 활동
현 명지전문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저 서
장편소설
『어둠의 세월』 상·하 (도서출판 마루, 1993),『흰옷이야기』①-③ (한국문원, 1998),
『동트는 산맥』①-⑦ (신인간사, 2000),『조캡틴 정전』(화남, 2011) 『웃방데기』(모시는사람들, 2014 )
기타저서
『소설창작 여행 떠나기』(모시는사람들, 2013), 『소설창작의 길라잡이』, (모시는사람들, 2010),
『동학기행1』(모시는사람들, 20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