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석헌(曺錫憲) : 태안지역의 대표적 동학농민군 지도자
서강대 현대한국학연구센터 조재곤
충청도 서북상황과 동학입도 과정
조석헌(1862~1931)은 창녕 조씨로 충청도 태안군 원북면 신두리에서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재산이 그다지 많지는 않았으나 원북면 지역에서는 비교적 명망이 있었던 집안이었다. 충청도 서북지역은 1880년대 이 지역을 대표하는 동학지도자 박인호와 박희인의 입도와 포교로 동학이 활발하게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1893년 보은취회 이후 동학교단의 조직이 재정비되면서 박희인의 예포(禮包)와 박인호의 덕포(德包)로 나뉘어져 활발하게 활동하였는데,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예포와 덕포에 본격적으로 입도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최시형의 동학교단의 영향을 받고 있던 북접 계열이었다.
조석헌은 상암 박희인(일명 덕칠)을 통해 남들보다 비교적 늦은 1894년 3월에 입도하였는데, 때는 전라도 무장에서 전봉준이 기포한 기간이었다. 그는 그해 5월 태안접주에 임명되었고 둘째 형 석승도 서산접주에 임명되었다. 셋째형 석훈도 동학에 입도하였다. 또한 이후 조석헌의 아들 명승은 태안지역의 또 다른 동학농민군 지도자인 문장준의 장녀와 혼인하였고, 장녀는 박희인의 장남 문규와 혼인을 하였다. 동학 입도 이후 조석헌은 최시형의 지침을 받은 박희인의 지시를 받아 태안 일대에서 포교에 치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던 중 8월 평양전투 승리로 2만 여명의 청국군 주력을 격파한 일본군이 동학농민군 토벌 방침을 본격적으로 천명하는 한편 조선정부군과 지방군과 연합하여 대대적인 탄압작전을 준비하게 되었다. 이에 전봉준 등은 전라도 삼례에 모여 재봉기를 결의하였고, 이후 최시형도 청산대회 직후 전국 교단조직에게 기포령을 내렸다.
농민군으로서의 활동과 피신
이로부터 전국적인 동학농민군의 재봉기가 본격화되었는데 이는 태안 지역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정부 측의 강력한 대응으로 충청도 서북 지역의 경우 태안군수 신백희와 안무사 김경제의 동학교도들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로 귀결되었고, 태안군수와 서산군수가 체포한 내포지역 농민군 지도자 30여명을 처형한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이에 태안지역 동학농민군 지도자들은 서로 연락을 취해 9월 30일 방갈리의 접주 문장로의 집에 모여 대규모 봉기를 결의하였다. 조석헌은 마침 어머니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장례를 잠시 미루고 참여하였다.
「본 포에서 징을 울리면 그 소리를 듣고
바로 응하여 일제히 우리 포(包) 관내는
일시에 전광과 같이 모이며,
한편으로 각처에 갇힌 두목을 일일이
방출하기로 약속하니 9월 그믐이었다.」
이날 모인 수백명은 다음날 태안읍에 모였고, 관아를 점거하는 한편 태안군수와 안무사를 칼로 처형하고 동료들을 구출하였다. 이때 서산군수 박정기도 처형하였다. 이들은 무기고를 탈취한 후 예포 대접주 박희인이 있는 목소리의 예포 대도소에 집결하고 대도소 산하에 개별적으로 도소를 설치하는 등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준비하였다. 이후 태안과 서산의 농민군들은 해미 승전곡으로 옮겨 정부군과 민보군과 싸워 크게 승리하였고, 예산신례원에 다시 집결하였다. 그러나 농민군들은 홍주성 전투에서 홍주목사 이승우 주도의 일본군, 관군, 민보군으로 이루어진 연합토벌군의 공격을 받았다.
그 결과 크게 패하여 수많은 사람이 전사하였고, 체포된 사람들도 총살되거나 참수형으로 목을 잘리는 등 잔인한 학살과 보복이 시작되고, 겨우 목숨을 건진 사람들은 각지로 흩어지게 되었다. 농민군 가족들도 이와 별반 다름이 없었다.
조석헌 집안의 경우 둘째형 석승은 11월 체포 후 처형되었고, 다행히 셋째형 석훈과 그는 겨우 목숨을 구하여 피신에 들어갔다. 이후 조석헌의 생활은 일생동안 피신의 연속이었다. 이는 1994년 손자 병철의 증언록에도 자세히 나타나 있다. 이때 조석헌은 대접주 박희인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고 그를 따라 일정 기간 동행하였다. 그 과정에서 유회군을 만나기도 하였고, 잠시 집에 들렀다가 관군의 수색을 받기도 하였으나 천우신조로 위기를 면한 적도 있었다.
교단재건과 자전적 회고록 저술
1965년 문원덕 주도로 천도교 태안교구에서 작성한 갑오동학혁명 순도한 순도자 명단에는 조석헌에 대해, 「갑오동학혁명 당시 참전 후 대접주 상암(湘菴) 박희인(朴熙寅) 선생 수하로 해월신사(海月神師) 모시고 10여년 풍운 속에서 수난을 보내시다가 햇빛을 갑진(甲辰)에 보자 예산(禮山) 지방으로 이거하시여 종신(終身)토록 교목 접주 교장 등으로 종신(從身)타가 환원(還元)하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석헌은 박희인이 만들어준 경고문 등을 지니고 다니면서 뿔뿔이 흩어진 교인들을 모으기 시작하였고, 피신 과정에서 1895년 강원도에서 최시형을 직접 만나지는 못했으나 그의 지시를 전달받아 본격적으로 조직을 정비하였다. 이때 그는 포교를 위해 갑오년에 많은 재산을 잃어버린 후 얼마 남지 않은 가산도 정리하였다. 조석헌은 1896년 수접주에, 1897년 교수에 임명되었고, 1898년 최시형 순교 이후에도 수령 직임과 교첩을 여러 읍에 나누어주는 등 해체위기에 있었던 교단 조직재건에 혼신을 다했다.
그는 1905년 천도교 창건 이후 1907년 천도교 교령, 1908년 대정을, 1913년 이후 포덕사, 예산교구장, 종리사 등으로 활동하였다. 1927년에는 낙암(樂菴)이란 도호(道號)를 받았고 이후 1931년 70세를 일기로 사망할 때까지 포덕사와 천도교 종리원 감사원, 도사 등을 하였다. 사망 직전까지 조석헌은 자신이 그간 경험한 내용을 『조석헌역사』라는 회고록으로 남겼다. 사돈지간인 문장준의 기록 『문장준역사』와 함께 일지 형식의 이 책은 지금도 충청도 서북지역 동학농민군 역사와 후기 동학농민운동사⋅천도교사 이해와 복원을 위한 중요한 연구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