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협심을 가지고 홍주성 전투에 접주로 참여하다
참여자 김양권의 손(孫) 김영규

 
문) 김영규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조부이신 김양권 열사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조부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답) 네, 안녕하십니까? 조부님에 대해 말씀드리기 전에 집안에 내력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 집안은 김영 김씨로 신라 김씨나 후 김씨라고도 합니다. 김수로왕의 후손들이죠. 고조부 때부터는 태안군 수룡리 근홍면에 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고조부께서는 당시 호조참판이라는 정3품의 벼슬에 계셨습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경제부 차관 정도의 직함을 가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또 불심이 깊으셔서 “나만 배부르게 세상을 살면 안 된다. 굶주리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양보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하셨다고 합니다.
조부께서는 고조부께 한학을 배우시면서 여러 면에서 영향을 받으신 것 같습니다. 밤에 당나라 시를 읊으시거나 시조를 자주 부르시곤 하셨고 마을의 만사(輓詞)를 직접 써주시는 것도 보았습니다. 사정이 어려운 젊은 사람들을 모아두고 훈학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또 항상 의협심을 가지고 계셔서 한 번씩 태안 장에 들르시는 날에 건달들이 눈에 띄면 그냥 넘어가지 못하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키가 6척이 넘으셨으니 당시에는 체골이 장대한 편이셔서 건달들도 함부로 대들지 못했을 것입니다. 마을에서 싸움이 일어나면 싸운 사람들을 크게 혼내기도 하셨습니다.
한편으로 남에게 관대하고 잘 베풀기도 하셨습니다. 흉년이 들면 자신은 죽을 해서 먹는 한이 있더라도 쌀가마를 열어 이웃에게 쌀을 퍼주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우리는 죽을 먹어도 있는 것을 남에게 줄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하냐?”고 말씀하셨던 것이 아직도 생각납니다.
문) 조부님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어떻게 참여하게 되셨을까요?
답) 저희 조부님의 장인, 즉 진외조부께서는 병마첨절제사(병마절도사에 속한 종삼품 부관 벼슬)를 지내시던 중 동학에 입도하셨다고 합니다. 그분께서는 조부님이 계시던 수룡리 근처의 마금리에 거처하셨는데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을 때 “이렇게 세상 사람들이 다 죽어가고 있는데 우리만 가만 있을 수 없다. 함께 일어서자.”고 조부님을 설득하셔서 함께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게 되셨다고 합니다.
문) 조부님께서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어떤 활동을 하셨을까요?
답) 조부님은 동학에 입도하지는 않으셨지만 접주로서 활동하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진외조부님과 조부님은 홍주성 전투에 참여하셨는데, 당시 지휘관으로는 참여하셨기에 편의상 접주라는 용어를 사용하신 거 같습니다. 당시 농민군은 크게 패배하고 말았지만 두 분께서는 목숨을 보존해 집으로 돌아오셨다고 합니다. 조부께서는 동학농민혁명뿐 아니라 6.25전쟁도 겪으셨는데, 당시 제게 이런 말씀을 해주셨던 것이 기억납니다. 지금 전쟁에서 죽는 것은 별거 아니다. 폭탄을 던지고 총으로 쏘고 하면 본인 스스로가 죽는 것도 잘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동학농민혁명 당시에는 무기가 발달되지 않아서 죽창, 몽둥이, 쇠스랑 등을 가지고 전투를 벌였는데 훨씬 서슬 시퍼렇고 무서운 싸움이었다고 말씀하였습니다.
문)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사실로 인해 집안에 피해를 입으신 분들이 계신가요?
답) 제가 스물여섯이 되던 해에 돌아가셨던 저희 조모께서는 명절만 되면 항상 눈물을 보이셨습니다. 낮에는 참는 기색을 보이시다가 밤이 되면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눈물을 흘리셨지요. 그럴 때마다 저도 가슴이 먹먹해지곤 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진외조부께서는 동학농민혁명에 지도자로 가담하셨고, 그 참여 사실로 인해 저희 외가는 하루아침에 멸문지화를 당했습니다. 관군들이 집으로 쳐들어와 어린이, 어른 할 것 없이 외가 가족을 전부 밧줄로 결박해 집안에 가둔 뒤 집을 통째로 불질러 화형시켰다고 합니다. 조모님은 명절만 되면 그때의 참상이 생각나 눈물을 보이셨던 겁니다.
또 제가 조부님과 함께 살던 당시, 한 번씩 저를 데리고 산책을 나가시곤 했는데 이럴 때면 논에서 일하던 농부들이나 지나치던 사람들이 동학 할아버지, 접주 할아버지 지나간다고 수군대곤 했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이 끝난 지 오랜 후에도 사람들은 동학란에 참여했던 역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문) 동학농민혁명 이후 조부께서는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답) 많은 동학농민군이 그랬듯 먼저 섬으로 피신하셨다고 합니다. 가회도라는 섬에서 피신해 계시다 다시 집으로 돌아오셨는데, 관군에게 요시찰인(要視察人)으로 감시를 받아 도저히 이곳에서 지낼 수 없게 되자 다시 강원도로 유랑을 떠나셨습니다. 강원도에 족보 없는 집이 있으면 찾아가서 족보를 만들어 주고, 제사지내는 집의 축문을 대신 읽어주시고, 어린애들이 있으면 훈학을 해주고 하시면서 노잣돈을 마련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조부께서 기골이 장대하셔서 눈에 띄는 분이셨기 때문에 한 곳에 오래 머무르면 발각될 확률이 높아 변성명(變姓名)을 하고 한달 정도 단위로 강원도 이곳저곳에 옮겨 다니셨다고 합니다. 또 여기저기 글만 써주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고 누군가 의심해 밀고를 할까봐 정을 하나 사서 맷돌 만드는 기술을 배워 그걸로 생계를 이어가기고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게 오랜 기간 피신하시다 잠잠해질 때가 돼서야 다시 집으로 돌아오셨다고 합니다.
문) 조부님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셨던 것에 대해 어떻데 생각하고 계십니까?
답)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하층민들이 먹고 입을 것이 없어 들고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그런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저희 조부님도 양반이셨고 그분께서 제게 몰락양반들도 많이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다고 말씀해 주셨던 것으로 보아, 분명 나라를 바로 세우고자 했던 뜻으로 모여든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조부님의, 동학농민군의 이러한 뜻이 올바로 평가받아 서훈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