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150주년을 생각하며
한양대학교 한국언어문학과 명예교수 윤석산
지난 갑오년은 갑오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지 120년이 되는 해였다. 120년이라는 숫자보다 더 의미를 지닌 것은 두 갑자를 맞았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관계되는 기관들이 두 갑자를 맞아 많은 행사를 기획했고, 또 실천했던 한 해였다.
동학농민혁명 두 갑자를 맞이하고, 또 이 해를 보내며, 실은 많은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20년 전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에 비하여 참으로 많은 것들이 축소가 되고, 또 관심의 면에서도 현저하게 떨어졌었음을 실감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동학농민혁명의 100주년 때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지니고 접근을 했고, 또 수만은 기관과 매체가 동학농민혁명을 다루었다. 속되게 이야기해서, 일컫는바 글줄이나 쓰는 사람이면 거의 한 사람도 빠짐없이 ‘동학’을 이야기 했고, 매체는 매체마다 동학에 관한 글을 세상에 내놓았던 것이 지난 100주년 때의 일이었다.
그러나 지난 해 동학농민혁명 120주년, 아닌 두 갑자 때에는 그렇지를 못했다. 사회적 관심의 면에서도 현저히 떨어졌고, 매체 등에서의 관심 역시 100주년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런가 하면, 예술 분야에서도 새로운 움직임이 거의 없었다. 100주년을 맞아서는 동학농민혁명이나 동학을 주제로 하는 소설이나 시가 수없이 출간이 되었고, 영화, 뮤지컬, 창극, 연극 등 다양한 분야에서 동학, 동학농민혁명이 다루어졌다. 또한 지난 한 해 동안에 벌어진 여러 학술세미나에서도, 학자들이 새로운 자료를 찾는 수고를 하였고, 또 다양한 논의를 벌였지만, 세간의 증폭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음이 사실이다. 이러함이 관심의 부재라는 시대적인 모습 때문에서인지, 혹은 발표된 글들이 관심을 일으키기에 충분하지 못해서인지는 알 수가 없다.
어떠한 원인에 의한 것인지는 알 수가 없어도, 100주년 기념에 비하여서는 현저히 떨어지는 관심의 밖에서 대부분이 진행되었음이 지난 한 해의 동학농민혁명 120주년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어느 학술세미나에서 동학농민혁명을 중심으로 소설을 쓰는 작가가 참가를 해서 하는 소리가, 그 말이 그 말인 논의만이 되풀이 되는 세미나이기 때문에 참가한 의미도 없고, 참으로 지루했다는 불평 섞인 평가를 내리는 것을 들은 적도 있다. 이러한 모습이 결코 전부는 아니었지만, 대부분의 논의가 동학농민혁명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세간의 평을 듣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된다. 따라서 이와 같은 모습과 함께 동학농민혁명 120주년 기념행사에도 진일보하는 모습을 보이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므로 세간의 관심을 끌 수 있는 행사다운 행사 없이 지나간 한 해가 되고 말았다.
물론 의미 있는 행사가 전혀 없었다는 평가는 아니다. 전반적인 동학농민혁명 120주년의 행사나 진행된 각종 세미나가 20년 전에 비하여 크게 발전이나 전환을 이루지 못했다는 뜻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여러 원인들이 있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20년 전,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때에는 100주년이라는 시간성의 의미가 크게 작용을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왠지 100주년이라는 의미는 남다르게 다가오기 때문이리라. 그런가 하면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고 본격적으로 조명을 받은 그 첫 번째가 바로 100주년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관심의 대상이 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더구나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이 되던 1994년은 우리나라가 민주화의 열망과 함께 그 불꽃이 치열하게 타오르던 그러한 때였다. 그러므로 동학농민혁명이 지닌, 반봉건과 반외세의 기치는 시대적 이슈와 참으로 어울리는 테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런가 하면, 당시의 변혁을 촉구하던 시대적 열망과 함께 새로운 한국적 민주주의나 현대화의 모습이 요구되던 시대였다. 그러므로, 동학. 동학농민혁명은 이와 같은 당시의 시대적 열망을 흔들어주고 또 채워주기에 참으로 적절한 사유이며 운동이었지 않았나 생각하게 된다.
20년의 시간은 우리사회를 많이 변화시켜 놓았다. 변화와 함께 안정을 추구하는 사회. 다시 말해서 안정 속에서의 변화를 추구하는 사회로 그 모습이 바뀌어가고 있다. 그런가 하면, 한 사회를 관류하는 사유 역시 많은 변화를 하였다. 근대, 혹은 현대성에의 논의에서 자연스럽게 탈근대의 모습으로 바뀌었는가 하면, 보다 조화와 균형의 사회를 이루려는 데에 글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은 깃발을 들고 죽창을 든 동학의 모습보다는 동학의 사유가 깃들어진 동학적 조화와 균형의 삶이 더 필요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은 서로가 싸우고 싸우므로 분열과 갈등을 야기하고자 일어난 혁명이 결코 아님을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안다. 동학농민혁명의 근저에는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이며, 그러므로 무너진 질서에 의하여 야기된 부조화와 불균형의 삶을 조화와 균형의 삶으로 이루려는 열망의 시대적, 역사적 표현이었다.
어떤 사건이나 중요한 이슈에 있어 사상적인 배경 없이 일어난다는 것은 거의 없다. 시대적 사건이나, 역사적 분기점을 이룬 사건에는 분명한 사상이 그 배경에 자리하고 있다. 그 사상이 어디에서 배태가 되고 또 어떻게 형성이 되었는지는 다양하다. 동학농민혁명은 부패한 정권과 외세의 침략으로 인하여 무너진 삶의 질서를 새로운 차원으로 이끌고자 하는 열망에 의한 혁명이었다. 그런가 하면 이 열망의 궁극적인 도달점에는 모두가 함께 잘 사는 균형 잡힌 삶을 이룩하는 데에 있음이 당연하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기 30여 년 전에 경주에서 수운 최제우 선생에 의하여 일어났고, 또 해월 최시형 선생에 의하여 전개된 동학은, 세상의 모든 존재가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시천주(侍天主).’ 그러므로 모든 존재를 한울님으로 대하고 섬기므로,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강조되는 ‘사인여천(事人如天)’, 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만유를 공경하므로 우주적 조화와 균형의 삶을 이루고자 하는 ‘삼경사상(三敬思想)’,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사람과 신어 서로 상생과 공생의 삶을 이루고자 하는 ‘이천식천(以天食天)’ 등의 가르침을 세상에 펼쳤다. 따라서 이와 같은 가르침과 함께 조화와 균형, 상생과 공생의 삶을 지상에서 이루고자 당시의 수많은 사람들이 동학에 모여들었고, 그 모여듦은 이내 커다란 힘으로 작용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동학의 민중적 작용이 바로 척양척왜의 기치를 든 교조신원운동이었고, 동학농민혁명이었다. 1890년대라는 19세기 후반, 동학이 이 땅에 그 가르침을 편지 30여년이 지난 그 당시, 동학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사회적 정치적 운동은 다름 아닌 동학사상의 사회적인 실천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보다 동학농민혁명이 지닌 궁극적인 의미를 올바르게 찾아가기 위해서는 ‘동학사상’에 대한 탐구가 무엇보다도 긴요하고 필요하다고 하겠다. 동학의 사상이 어떻게 그 혁명의 불꽃을 지폈으며, 당시의 민중들을 운집하게 하였으며, 동학농민혁명이 지향하는 삶은 어떠한 것인가를 고찰하는 것이 바로 동학농민혁명을 바르게 바라고보 또 이해하는 길이라고 생각이 된다.
모든 역사의 추동력에는 그 힘을 이끌어내는 사상이 자리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은 바로 동학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민중들이 집결하고, 또 추진이 되었고, 동학적이 이상과 목표가 분명하게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확산이 될 수 있었고, 한국근대사의 크나큰 한 획을 그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에서 다시 20년이라는 시간이 더 지나, 우리는 동학농민혁명의 두 갑자를 맞았지만, 이 20년 동안 동학농민혁명의 의의가 지닌 역사의 바퀴를 거의 움직여 놓지 못한 통한을 스스로 느끼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부터 30년이 더 지난 150주년을 어떻게 맞이해야 하느 과제를 우리는, 우리 스스로 무겁게 안고 있다.
어느 학자가 토로한 심정적 고충은 오늘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을 것으로 사료된다. 이 학자가 동학 천도교에 관한 중요한 논문을 써놓고도, 더 그 이상의 진전을 못하고 있는 것은, 동학 천도교의 사상이나 교리에 관한 공부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고백이 그것이다. 그렇다, 동학농민혁명이 지닌 역사적 위의가 보다 분명해지기 위해서는 동학사상과의 연계속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역사적 중요한 사건과 함께 그 사건이 추동되는 데에 결정적인 배경과 힘이 되었던 사상을 함께 고찰하므로, 동학이 펼친 동학농민혁명, 그 혁명의 진정한 의의를 찾아갈 수 있고, 나아가 우리는 30년 이후의 동학농민혁명 150주년을 보다 뜻 깊게 맞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