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도 지역 동학농민군 지도자 최유현
성균관대학교 교수 배항섭
최유현은 황해도 해주에서 활약한 동학농민군 지도자이자 1920년에 간행된 『시천교역사』를 지은 인물이다. 1894년 가을 항해도 일대에서도 많은 동학농민군이 기포하였다. 『천도교회사초고』와 『동학도종역사』 등에 따르면 이때 기포한 황해도 접주로는 임종현, 정종혁, 문학수를 비롯하여 『동학도종역사』를 쓴 송화 접주 강필도(康弼道), 역시 송화접주인 방찬두, 장연의 정량, 재령의 오영창, 문화의 윤기호, 봉산의 김응종 배천의 변승명, 강령의 성재석 등이 있었으며, 최유현은 접주로서 오응선과 같이 해주에서 기포하였다.
황해도의 동학농민군의 활동은 1894년 가을부터 시작되었다. 9월 27일(양력 10월 25일)농민군 수만 명이 장연에서 일어나 해주성에 들어가 군기를 빼앗고 감사 김춘희를 협박하였다. 이때 각 촌의 엽수(獵手) 800명이 가담하여 함께 성문을 지켰다. 10월 6일에는 농민군 수만 명이 해주 서쪽 취야장에 모여 읍폐민막(邑幣民瘼)의 시정과 동학 포교의 허용을 요구하였다. 이에 대해 해영(海營)에서는 민막은 지금 혁파하겠으나 동학은 조정에서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엄단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동학농민군은 곧 해산하였으나 임종현(林宗鉉)의 지휘 하에 다시 모여들어 수만 명의 규모를 이루었다. 이들은 강령을 습격하여 무기를 획득한 뒤 해주성에 진입하였다. 해주부에 들어간 농민들은 관가를 부수고 군기를 탈취하였을 뿐만 아니라 해영의 관공문서에 불을 지르고 중군과 판관 비장 등을 끌어내 구타하고 관찰사를 강제로 끌어내렸다. 이들은 11월 6일까지 해주부에 주둔하였다. 이들이 감영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임종현이 감사 자리에 앉고, 성재식을 강령현감, 이용선을 안악군수, 최득주를 해주 판관으로 임명하였으며, 그 밖에 중군, 병졸 등을 임명한 도록이 발견되기도 했다.
약 한달 동안 이들의 기세는 대단하였으나 곧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해주성이 함락되자 감영에서는 금천에 있던 일본군병참부에 구원병을 요청하면서 일본군의 황해도 지역에 대한 본격적인 진입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해주 감영을 점령하고 감사 행세를 하였던 임종현은 11월 6일 감사 정현석에게 사과한다고 하면서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동서로 나누어 해주성에서 철수하고 말았다. 임종현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11월 13일경 다시 취야장으로 집결하여 해주성을 공격하였으나, 일본군의 반격을 받고 참혹한 패배를 당하였다. 11월 23일에도 역시 취야장에 모인 농민군 2천여 명이 일본군 및 관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농민군 12명이 전사하며 패배하고 말았다. 다음날인 11월 24일 일본군이 해주를 떠나 연안으로 가자, 다시 수만 명의 동학농민군들이 해주에서 서쪽으로 30리 떨어진 안현에 모여들었다. 이들 역시 25일 새벽 해주성의 포군 200명의 공격을 받고 퇴각하고 말았다. 그러나 농민군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 이들은 11월 27일 해주성 남쪽과 서쪽에 다시 집결하였다. 산포수를 앞세운 농민군은 연안으로 갔다가 농민군이 재집결한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해주로 돌아온 일본군 및 관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당시 농민군 병력은 재령ㆍ신천ㆍ문화ㆍ장연ㆍ옹진ㆍ강령 등의 농민군이 합세하여 3만 명에 이르렀다. 전투는 5시간에 걸쳐 벌어졌으며 오후 2경에 끝났다. 이 전투에서 농민군은 20명이 전사하고 15명이 포로가 되었다. 이후에도 12월 7일과 19일, 22일, 23에도 해주성을 둘러싼 농민군과 일본군 및 관군 사이에는 공방전이 이어졌다. 이어 1895년 3월에도 수 차례에 걸쳐 해주 일대의 농민군과 일본군 사이에는 교전이 일어 났으며, 장수산성 농민군은 7월말까지 활동하는 등 황해도 농민군은 가장 늦게까지 일본군 및 관군과 대적하며 활동을 전개하였다.
동학농민혁명 이후 임종현이 종적을 감춘 것과 달리 최유현은 동학교단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1901년 그는 황해도에서 같이 활동하였던 원용일 등과 함께 서울 등지에서 김낙철과 관련한 활동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으며 1909년 3월에도 수도한 모습이 눈에 띈다. 그는 이때 아마도 시천교 측에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이때 최유현은 김낙철, 김연국을 따르고 있었는데 김연국은 이미 1908년 초에 천도교 대도주를 내놓고 시천교 대례사로 떠난 경우가 있었다. 최유현도 아마 이때 시천교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이용구가 죽고 송병준이 시천교본부 대주교를 차지하자 김연국은 시천교총부를 따로 설치하였다. 이때 역시 최유현은 김연국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후 김연국은 1918년 최유현으로 하여금 『시천교역사』를 짓도록 하였으며, 1920년에 발간하였다. 시천교역사는 박형채의 시천교종역사와는 다른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이용구, 송병준 계열의 시천교 및 시천교종역사는 친일적인 요소가 많은 것이었음에 비해 김연국, 최유현 계열이 쓴 시천교역사는 친일적 요소가 강하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