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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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가을 61호
전주의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1

  전주의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1 



풍남문



  동학농민군전주입성비



좌측은 동학전적지비, 우측은 동학농민군전주입성비이다. 


  완산칠봉을 오르다 보면 정자가 위치한 등산로 좌우로 비석이 서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두 비는 각각 동학농민군 전주입성비, 동학전적지비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으며, 동학농민혁명군이 1894년 4월 27일 전주에 입성한 것을 기념하는 것이다. 전주성의 점령은 1893년에 작성된 사발통문에서부터 계획되었던 것이며, 무장기포 당시 포고문에도 언급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894년 4월 23일, 장성 황룡촌에서 경군과 전투를 벌여 격파한 동학농민혁명군은 그 기세를 몰아 전주를 향해 진격했다. 그리고 전주성을 점령하기에 앞서 수백 명의 동학농민혁명군을 상인으로 변장시켜 전주성으로 투입시켰다. 이처럼 위장하여 투입된 동학농민혁명군과 성 내부의 협력자들에 의해 문이 열렸고, 동학농민혁명군은 전주에 무혈입성 하였다. 전라감사 김문현은 동학농민혁명군이 전주성을 공격해 오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이미 달아나 있었으며, 토벌대장인 홍계훈은 동학농민혁명군의 꽁무니만 쫓아다니다 이제 막 태인현에 도착했던 시기였다.

전주성을 점령한 이후에도 동학농민혁명군은 엄격한 규율을 유지하며 성내의 주민들을 안심시켰다. 특히 농민들에게는 부지런히 농사를 지어 모내기 때를 놓치지 말라고 전했다한다. 이러한 동학농민혁명군의 노력에 의해 전주성을 점령한 날 오후에는 평소처럼 장내에 사람들이 왕래하였고, 성안의 주민들이 모두 화합하였다고 전해진다.



  삼천


  삼천은 동학농민혁명군이 전주성을 점령하기 직전 숙영하였던 곳이다. 장성에서 이학승이 이끄는 경군을 격파한 동학농민혁명군은 장성과 정읍 사이에서 2일간 숙영 후 4월 25일 정읍을 거쳐 원평으로 향했다. 이곳에서 동학농민혁명군은 효유문을 가지고 찾아온 이효응과 배은환의 목을 쳤다. 국왕이 보낸 군대와 전투를 치르고, 또한 국왕이 보낸 사자를 죽인 것을 통해 동학농민혁명군은 타협의 뜻이 없었으며 스스로의 힘으로 개혁을 이루고자 했던 뜻을 조정에 확실히 알린 것이다. 이후 초토사 홍계훈이 금구현에 도착하였을 때 동학농민혁명군이 삼천에 주둔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는 점과 동학농민혁명군이 4월 26일 원평을 거쳐 전주에서 30리 가량 떨어진 두정에 도착했다는 전주 가도사의 전보, 이동거리나 진격일정, 경로를 미루어 볼 때 동학농민혁명군이 4월 26일 삼천 혹은 두정 일대에서 하루 숙영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후 4월 27일 아침부터 전주성을   압박하기 시작했고 오전부터 서문⋅북문⋅남문 등을 공격하여 전주성을 함락시켰다.



  용머리고개


  용머리고개는 전주로 입성하는 관문으로 금구 쪽에서 전주로 진격한 동학농민혁명군이 삼천을 건너 점령했던 곳이다. 금구를 거쳐 27일 전주로 진격하던 동학농민혁명군은 용머리고개에 올라 태세를 정비하였다. 정비를 마친 동학농민혁명군은 곧장 전주성을 향해 돌격하였다. 충청도 부여의 유생 이복영은 자신의 일기 『남유수록』에 이때의 광경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갑자기 용두현에서 붉은 깃발이 몰려오고 수천 명이 에워싸서 크게 소리를 질러 말하기를, ‘백성들은 안심하고 상인도 안심하고 장사하며 멀리 가는 사람들도 걱정 말고 떠나가도 되니 모두 놀라지 말라’하고는 천천히 길게 앞으로 몰려나왔습니다.”

동학농민군의 뒤를 따라다니던 초토사 홍계훈은 다음날 정오경 경군을 이끌고 용머리고개에 도착하여 완산칠봉에 경군을 배치하였다. 그리고 성 안의 동학농민혁명군과 용머리고개, 완산칠봉 일대의 경군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시작되었다.



1) 용머리 고개 2) 전주성 서문지



  전주성 서문지, 풍남문


  풍남문은 전라감영의 소재지였던 전주를 둘러싼 읍성의 남쪽 출입문이다. 풍남문이라는 이름은 1767년 전주성 남쪽의 문이 화재로 인해 불탄 것을 1768년 관찰사 홍낙인이 재건하며 붙인 것으로, 이전에는 명견루라 불렸다. 풍남문을 제외한 나머지 문들은 일제강점기 당시 철거되어 현재 전주성의 문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곳이다. 한때 시대의 풍파로 인해 많이 훼손된 것을 1978년부터 3년간의 보수공사를 통해 옛 모습을 되찾았다고 한다.


  이 풍남문은 동학농민혁명군이 전주성을 점령할 당시 공략하였던 곳이며, 전주성을 점령한 뒤 동학농민혁명군과 관군 사이에 치열한 접전이 펼쳐졌던 장소이기도 하다.


  전주성 서문지는 전주성의 서문이 있던 곳으로, 1767년 풍남문과 마찬가지로 화재로 인해 불타 재건하면서 패서문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며, 이전에는 상서문이라 불렸다고 한다. 서문은 풍남문과 마찬가지로 동학농민혁명군이 전주입성을 위해 공략한 곳이며, 이후 관군과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전주성 서문은 1907년 도시계획에 따라 철거되었다. 현재 서문이 서있던 자리에는 전주완산재향결우회 건물이 들어서 있으며, 건물 앞에 <전주부성서문지> 표지석이 설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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