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에서 미래를 배우다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교수 백승종
지난 4주 동안 나는 서울 영등포에 있는 ‘하자센터’에서 연거푸 동학 강의를 하였다. 젊은 시절부터 동학 연구를 꿈만 꾸었지, 정작 제대로 공부해본 적이 없는 나다. 나의 섣부른 강의는 동학에서 미래를 배우자는 슬로건 아래 진행되었는데, 청중의 반응은 예상했던 것보다 뜨거웠다. 가르치는 것이 내게는 곧 배우는 일이었다. 기쁜 일이다.
먼저 우리는 동학의 탄생을 이야기하였다. <정감록>으로 대표되는 조선후기 예언문화의 전통 위에서 동학이라는 위대한 사상의 꽃이 피었다. 제1강은 그 긴 역사적 과정을 살펴보았다. 나는 특히 ‘비밀결사’의 전통에 주목하였다. ‘비밀결사’는 18세기 초반 서북지방의 평민지식인들을 중심으로 결성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점차 그것이 전국으로 확대되는 추세를 보였다. 신기하게도 ‘비밀결사’는 천주교 신앙집단과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것으로 보인다. 최근 몇 년 동안 나는 <정감록>을 연구하며, 바로 그 ‘비밀결사’의 성장에 관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럼 동학의 사상적 본질은 무엇인가? 제2강은 이것을 되짚어보는 시간이었다. 장님이 장님을 인도하는 격이었다. 그래도 약간의 수확은 있었다. 이 강의에서 나는 동학을 ‘자주적 근대화’를 위한 노력이라고 정의하였다. 이러한 정의 자체는 새로울 것이 없다. 하지만 그에 대한 나의 해석은 좀 달라졌다. 동학의 선구자들은 서구적 의미의 산업화 또는 인간중심의 시민사회 건설을 목표로 삼지 않았다. 동학은 서구적 근대화와는 비교될 수 없는, 본질적인 ‘관계의 질적 전환’을 꾀했다.
우선 동학이 추구한 ‘자주적 근대화’는 산업화를 앞세운 서구의 제국주의를 거부하는 것이었다. 또한 동학사상은 근대 서구의 계몽 사상가들이 주창한 자유와 평등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동학은 19세기부터 서구를 휩쓴 인종우월주의나 국가주의 같이 협소하고 편협한 사상을 배척하였다. 이러한 점은 최시형에게 뚜렷이 드러났다. 그는 인간중심에서 멀찌감치 벗어났다. 그가 ‘이천식천’(以天食天)을 설파했을 때, 인간과 우주만물은 위도 아래도, 지배도 소유도 없이 하나의 ‘생태적 질서’를 구성하는 동등한 구성인자였다. 요컨대 최제우의 ‘시천주’(侍天主)에서부터 시작해, 최시형의 ‘사인여천’(事人如天)을 거쳐, 손병희의 ‘인내천’(人乃天)으로 이어진 동학의 사상적 계보는 흔히 서구에서 말하는 시민사회의 인간평등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다. 동학이 추구한 ‘관계의 질적 전환’. 이것을 요샛말로 하면 ‘생태적 전환’(ecological turn)이라고 표현해야 맞을 성 싶다. 모든 개체의 고유한 가치와 평등을 인정하고, 그러한 토대 위에서 만물의 평화로운 공존공생을 추구하는 새로운 가치란 말이다. 동학에서 말하는 ‘후천개벽’(後天開闢)은 서구문명 따라잡기가 아니라, 우주적 차원의 완전히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학이 새 질서를 완성하지는 못했다. 그들로서는 19세기말 이미 제국주의의 광풍에 휘말린 서구열강과 일본군국주의자들의 침략을 막아낼 수 없었다. 나의 세 번째 동학강의는 그 문제를 다루었다. 1894년에 크게 일어난 갑오동학농민혁명. 그것은 제국주의 침략이라는 시대적 난제를 온몸으로 끌어안은 동학농민들의 역사적 선택이었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셀 수 없이 많은 연구 업적들이 쌓여 있다. 나 같은 말학(末學)이 그 논의에 함부로 끼어들 여지는 없다. 그럼에도 내 소감을 말하자면, 동학의 중심에는 소농(小農)이 존재했다는 점이 중요한 것 같다.
소유 재산은 두어 마지기의 논이 전부였다는 전봉준도 소농이었다. 김개남 역시 소농이었다. 제2대 동학 교조 최시형 또한 젊은 시절에 머슴살이를 거쳐 마을의 이장까지 맡은 가난한 독농가였다. 그들을 따랐던 동학농민군의 대다수도 물론 소농이었다. 동학하는 사람들의 절대 다수가 소농이었다. 당시 한국사회의 구성 또한 그러하였다.
전봉준의 ‘공초’(供招)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학자들이 있다. 그들은 전봉준이 포교활동도 별로 하지 않았고, 휘하에 ‘접’(接) 같은 조직을 따로 거느리지도 않았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 전봉준은 이미 1892년부터 경향 각처에서 열린 교조신원운동에 깊숙이 관여하였다. 그때부터 그는 동학의 강경파 지도자로 부상하였다. ‘공초’에서 포교활동과 휘하조직의 존재를 숨긴 것은, 동지들을 보호하려는 그의 사려 깊은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전봉준은 소농의 입장에서 동학농민혁명을 펼쳤다. 혁명 과정에서 등장한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와 ‘보국안민’(輔國安民)이란 구호가 이를 증명한다. 그들은 아무런 대책도 없이 미곡을 일본으로 빼돌리는 지주들의 처사에 반대했고, 영국제 값싼 면제품을 마구잡이로 수입하게 만든 조정을 규탄했다. 동학농민군은 소농위주의 자급적 농촌공동체, ‘유무상자’(有無相資)의 토대를 지키고자 일어섰다.
어떤 이는 흥선대원군과의 관계를 운위하며, 동학농민군에게는 근왕적(勤王的)인 성향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어불성설이다. 그때 전봉준과 함께 일어선 동학농민군은 위정자들이 함부로 밀어붙인 ‘개방정책’의 오류를 시정하려고 혁명을 일으켰다. 기회에 그들은 조선사회의 해묵은 낡은 폐단을 일소하고자 하였다.
동학의 여운은 길게 남았다. 나의 제4강은 그 문제를 검토하였다. 현대 한국사회는 개방만을 능사로 삼는 산업지상주의자들의 수중에 있다. 그로인한 농수산업의 위기와 환경오염 및 핵발전소 문제가 심각하다. 이를 해결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동학이 애써 발견한 ‘관계의 질적 전환’을 다시 숙고해보는 것은 어떠한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