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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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봄 31호
남원지역 동학농민혁명 유적지를 찾아서

남원지역 동학농민혁명 유적지를 찾아서


문병학 | 기념재단 기념사업부장



 

  남원지역 동학농민혁명이 지닌 역사적 의미는 첫째, 1860년대 동학 창도 초기의 역사. 둘째, 동학농민혁명 핵심 지도자 김개남의 활동 거점. 셋째, 동학농민군과 운봉 민보군의 치열한 전투지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첫째, 1860년대 동학(東學) 창도 초기의 역사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는 1860년 4월 5일 경북 경주 용담에서 한울님을 만나는 종교체험을 통해 영부와 주문을 받아 무극대도(無極大道) 또는 천도(天道)를 체득, 동학을 창도하였다. 이후 많은 사람들이 수운을 찾아와 경상감영 관원의 주목을 받자 1862년 12월 남원으로 피신하여 동학의 주요 경전을 집필하였고, 이때 집필한 논학문(論學文)이라는 저술에서 ‘동학’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였다.



둘째, 동학농민혁명 핵심 지도자 김개남의 활동 거점


  동학농민군은 고부봉기·무장기포·백산대회·황토현전투·황룡강전투를 거쳐 파죽지세로 전라도 수부 전주성을 함락시켰다. 이후 청·일 양국의 군대 파병으로 정치정세가 급박해지자 조선정부와 화약을 맺고 전주성에서 나와 전라도 전역에 집강소를 설치, 폐정을 개혁하였다. 이때 김개남은 전주성에서 나와 순창, 동복 등지를 돌아 6월 25일 남원으로 들어와 호남 좌도와 경상도 일부 지역까지 그 세력을 떨쳤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이 경복궁을 불법 점령하고, 청일전쟁을 도발하자 반일항전을 위해 전봉준과 7월 15일 남원대회 열기도 했다.



셋째, 동학농민군과 운봉 민보군의 치열한 전투지


  동학농민군 재 기병으로 김개남이 10월 14일 정예부대를 이끌고 북상한 후 운봉의 박봉양 민보군이 농민군을 공격하여 10월 24일 남원성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동학농민군 반격 소식에 민보군은 나흘만인 10월 27일 남원성에서 퇴각하였다. 이후 동학농민군은 민보군의 남원성 침략에 대비하여 여원치·방아치 부근에 진을 쳤고, 11월 14일 새벽 박봉양 민보군의 공격을 받아 15일 아침까지 치열하게 접전하였다. 이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은 크게 패배하여 11월 28일 다시 민보군에게 남원성을 빼앗기고 말았다.



[기념비] 동학성지남원



동학성지남원 기념비


• 전라북도 남원시 산곡동 251


  동학 교조 최제우가 1861년부터 1862년 3월까지 교룡산성에 있는 은적암에서 동학의 주요 경전을 집필하고, 포교 활동을 펼친 역사적 의미를 등잔과 호롱불로 형상화한 기념시설물이다. 남원문화원과 남원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에서 2005년 제작·설치하였다가 약 50미터 위쪽인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기념비] 동학과 동학농민군의 유적지 교룡산



동학과 동학농민군의 유적지 교룡산


• 전라북도 남원시 산곡동 251-20


  동학 교조 최제우의 은적암 기거와 김개남이 남원관아에 대도소를 두고 교룡산성에서 주둔한 역사적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2006년 11월 남원시와 남원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에서 설치하였다. 기념비 기단부 전면에 동학과 농민혁명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였고, 기단 옆면에는 검가(劍歌)의 가사가 새겨져 있다.



은적암(隱蹟庵) 터



은적암 터(원경)


• 전라북도 남원시 산곡동 16-1(교룡산성 내)


  동학 교조 최제우가 1861년부터 1862년까지 머물면서 동학의 교리를 정리한 곳임을 알리기 위하여 1989년 10월 천도교 서울교구에서 표지판을 세웠다. 은적암은 원래 남원 교룡산성 안에 있는 선국사 부속 암자 덕밀암(德密庵)이었는데 최제우가 이곳에 머물면서 당호를 은적암으로 바꿨다고 한다. 동학의 주요 경전인 논학문(論學文), 권학가(勸學歌), 교훈가(敎訓歌), 도수사(道修詞) 등이 이곳에서 집필되었다.



[표지목] 김개남 동학농민군 주둔지



김개남동학농민군주둔지 표지목


• 전라북도 남원시 산곡동 436


  동학농민혁명 핵심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김개남이 주둔하였던 교룡산성 입구에 세워진 이 표지목은 1993년 역사문제연구소 동학농민전쟁백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에서 세웠다. 김개남은 1894년 6월 25일 남원관아를 차지하고 전라좌도 도회소(全羅左道 都會所)라는 정청(政廳)을 설치, 농민군 군제를 오영(五營)으로 편제하고 인근 각 고을로부터 무기와 군량을 거두어들였다. 반일항전을 준비하기 위하여 전봉준과 함께 7월 15일 남원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후 7월 17일경 임실군 성수산에 있는 상여암[상이암(上耳庵)]으로 들어갔다가 8월 25일 남원으로 돌아온 김개남은 부대를 정비한 후 10월 14일 정예부대를 이끌고 반일항전을 위해 남원을 떠나 전주 등지로 북상하였다.



김개남(金開南, 1853~1894)


  태인현 산외면 동곡리에서 태어난 김개남의 본명은 영주이고, 자는 기선으로 김기범이라고 불렸다. 19세 때 전주 구이면 원터의 연안이씨와 결혼하였으나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상처(喪妻)하여 다시 외가인 임실 청웅면 향교리 전주이씨와 재혼하였다. 개남(開南)이라는 이름은 동학과 관계하면서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꿈에 신인이 나타나서 손바닥에 개남이라는 두 글자를 써서 보여주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을 고쳤다고 전해진다. 개남(開南)이라는 이름은 ‘남조선을 개벽’한다는 <정감록>류 도참 비기 사상의 영향을 받아 지어진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래서 개남이라는 이름을 1890년 전후 동학 입도 전후부터 사용했는지 혹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부터 사용했는지 하는 점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아직 명확하게 규명되지 않고 있다. 김개남은 재혼 이후 20대 때 외가(外家)이자 처가(妻家)인 임실을 자주 드나들면서 고려(高麗) 태조 왕건과 조선(朝鮮) 태조 이성계가 왕이 되기 위해 임실군 성수산(聖壽山)에 있는 상이암(上耳庵)에서 기도를 했다는 전설도 익히 알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김개남이 남원을 장악한 후 상이암으로 들어가 상당 기간 머물렀다는 사실을 두고 왕을 꿈꾼 김개남의 권력 의지를 엿볼 수 있는 상징적인 일로 해석하기도 한다.



동학농민군 대도소 터



동학농민군 대도소 터 (현재 남원문화원)


• 전라북도 남원시 하정동 192-4


  김개남이 남원에 들어와 대도소를 설치한 옛 남원관아 터다. 남원관아에 대도소가 설치되었던 사실은 여러 자료에서 확인되고 있다. 동헌이 있던 자리에는 남원군청으로 활용되다가 이전하였고, 현재 남원문화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기념비]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요천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요천(蓼川) 기념비(원경)


• 전라북도 남원시 쌍교동 52-1


  요천(蓼川)은 동학농민군이 남원에 주둔하면서 군사훈련을 실시했던 곳이다. 이런 역사적 의미를 알리기 위해 광한루 앞 요천 둑 위에 2007년 남원시와 남원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에서 기념비를 세우고, 그 주변을 시민휴게공간으로 정비하였다.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요천


  남원의 젖줄인 이 요천변은 동학농민혁명(1894) 당시 전라좌도 농민군을 총 지휘했던 김개남 장군이 전봉준 장군과 함께 7월 15일(음력) 수만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남원대회를 개최하며 척양척왜(斥洋斥倭)와 보국안민(補國安民)의 기치를 드높인 역사적 장소이며, 경복궁을 침입하여 국권을 훼손하고 침략의 야욕을 드러낸 일본군을 축출하기 위해서 농민군이 훈련하였던 곳입니다. 이곳에서 훈련하였던 전라좌도 농민군의 정예부대는 청주성 공격에, 남은 병력은 방아치(남원시 산동면)전투에 참여하였습니다. 지금은 당시의 원형이 많이 바뀌었지만, 귀 기울이면 그때 농민군의 함성을 들을 수 있는 곳입니다.


⊙ 비문 전문(全文)



[기념비] 동학농민혁명 백두대간



동학농민혁명 백두대간 기념비(근경)


•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준향리 657-1


  남원에서 운봉으로 넘어가는 여원치 정상부근 도로변에 세워진 이 기념비는  동학농민군과 운봉의 박봉양 민보군이 1894년 11월 14일 새벽부터 15일 아침까지 치열하게 전투지를 벌였던 장소임을 알리기 위해 2008년 11월 22일 남원시와 남원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설치하였다.



[기념비] 동학농민혁명 방아치 전투지



동학농민혁명 방아치전투지


• 전라북도 남원시 산동면 부절리 391-5


  동학농민군 방아치전투를 기념하여 2007년 11월 남원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에서 세운 기념비이다.



[기념비]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쪽뚤(籃坪)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쪽뚤 기념비(근경)


• 전라북도 남원시 이백면 남계리 435-4


  운봉 박봉양의 민보군이 남원성을 공격해오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1894년 10월말부터 11월 13일까지 동학농민군이 진을 치고 있었던 장소이다. 남원에서 운봉으로 넘어가는 24번 국도변 요천삼거리, 방아치와 여원치가 갈래지는 지점에 서 있는 이 기념시설물은 2009년 11월 21일 남원시와 남원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에서 설치하였다.



[기념비] 갑오토비사적비(甲午討匪事蹟碑)



갑오토비사적비 근경


•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서천리 349-1(서림공원)


  운봉의 토호(土豪) 박봉양(朴鳳陽)이 민보군을 일으켜 동학농민군을 물리쳤다는 내용이 새겨진 기념비이다. ‘박봉양(朴鳳陽) 불망비’라고도 불리는 이 비는 운봉초등학교 앞 도로공사를 하던 중 땅속에 묻혀 있던 것이 드러나면서 그 내용이 세상에 알려졌다. 발견 당시 윗부분이 깨져나간 상태였으며, 마모가 심해 해독할 수 없는 부분이 많은 이 비를 1994년 지금의 위치에 옮겨 세웠다.



참고자료

• 「전라도 임실현의 동학과 동학농민전쟁」, 『전북사학』(19,20호), 이진영, 1997. 

• 『동학·1–수운의 삶과 생각』, 통나무, 표영삼, 2004.

•  『동학농민혁명사 일지』, 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2006.

• 「甲午略歷」,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5』,  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2007.

•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및 기념시설물 현황조사』,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2011.

• 『방아치전투 전라좌도 농민군 제향』, 남원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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