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이 된 전봉준의 비서 정백현
서강대학교 국제한국학센터 선임연구원 조재곤
전봉준의 수행비서와 책사로 활동
정백현(鄭伯賢)은 1869년 전북 고창군 공음면 예전리 상례마을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진주로 아버지 정만원, 어머니 순천 박씨 사이의 외아들이다. 호는 약봉(藥峰) 또는 진암(眞菴)이고 이름은 근영(根永). 자(字)는 백현이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2백석의 도조를 거두는 중농 지주였다고 한다. 여덟 살 때인 1876년 공음면 군유리 숙부로부터 한학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장성하면서 과거 준비를 하였다 한다. 전형적인 농촌 유교지식인이지만, 기골이 장대하고 성정도 활발하였다고 전해진다.
정백현이 언제 농민군 진영에 들어갔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동학농민혁명이 발발되기 이전부터 자신의 집과 가까운 곳에 살고 있던 전봉준을 알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인연으로 그는 1894년 백산봉기 무렵에 가면 정읍접주 송희옥과 함께 창의대장 전봉준의 수행비서로 활약하게 된 것이다. 열다섯 살 때까지 함께 살았던 그의 셋째 아들 병묵의 회고에 의하면 문장에 일가견이 있던 정백현은 각종 창의문과 격문을 작성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한다.
농민혁명의 실패와 가족들의 현실
천도교회사초고에 따르면 그는 별도로 송문수, 강경중, 송경찬, 송진호 등과 함께 무장현 봉기의 지역지도자로 활동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정씨 집안에서는 1893년 11월 고부민란의 ‘사발통문’과 1894년 3월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명의의 ‘무장포고문’ 작성에도 관여했다는 설이 전해진다. 그러나 사발통문에 정백현의 이름은 기재되어 있지 않다. 그해 11월 공주 우금치 공방전에서 관군과 일본 연합군에 패한 동학농민군들은 살해되거나 체포되거나 피신하였는데, 이때 정백현은 당촌마을 앞 신촌마을에 사는 친구 봉정범의 집에 숨어 있었다.
이후 각처의 패잔 농민군과 가족들은 화를 피하기 위해 산으로 섬으로 잠입하는 경우가 많았고, 일부는 서울로 들어와 신상을 숨기고 변성명하면서 목숨을 부지하는 형편이었다. 정백현은 1895년 1월에 몰래 서울로 들어오게 된다. 이후 그의 집안은 풍비박산 되었고 문서도 모두 불태워졌다. 그의 아버지 정만원은 연좌제로 인하여 수성군에 잡혀 고부관아에 끌려갔고 모진 고문 후유증으로 목숨을 잃었다. 정벽현의 큰 아들은 7살, 둘째 아들은 겨우 2살로 너무 어렸기에 연좌제를 피해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그로부터 얼마 후인 1896년 어머니 박씨도 사망하였다.
서울 도피생활 기록문, 약봉견문집
서울로 잠입한 정백현은 고향 소식은 물론 부모가 모두 돌아가셨다는 소식도 한참 후에 알 수밖에 없었다. 그는 서울에서 신헌구, 이준용, 이중하 등 여러 관리 명사들과 교분관계를 맺었고, 시세를 한탄하며 시를 짓고 술로 회포를 달랬다. 피난상황에서 그가 지은 시문은 약봉견문집(藥峰見聞集)으로 현재 일부가 전해진다. 그는 “슬프다! 대장부가 몸을 일으켜 한 번의 실패로 만사가 무너지니 운이런가 시세런가, 때를 얻지 못하고 움직였음이라. 하늘을 우러러 한번 웃음에 내 스스로는 알고 있으나 남에겐 어떻게 간을 내보여 차마 말하겠는가. 한 치 간장을 불에 태울 뿐이라”면서 농민혁명의 실패와 때를 만나지 못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였다.
또한 객지 나그네로서의 오래 떨어져서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었던 고향의 가족을 생각하는 애끓는 심정을 다음의 시로 남겼다.
밤에 들은 남쪽 기러기 서리 위를 울고 가니 / 시골 소식 전해줄거나 부질없이 기뻐했네.
오나라 초나라 넓은 강산 나그네길 한없는데 / 노란 국화꽃 소식만 금년에도 변함없네.
정백현은 1903년 경 9년여의 오랜 객지 떠돌이 생활을 끝내고 이제야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후 아산면 오정동에서 특별한 활동이 없이 은둔생활을 지속하다가 1920년 52세로 쓸쓸히 사망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