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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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가을 17호
대를 거쳐 이어져 온 증조부의 구국정신

  대를 거쳐 이어져 온 증조부의 구국정신


참여자 유상렬의 증손 유제구



 


문) 유제구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증조부님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신 것에 대해 설명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답) 네, 옥천 증약전투가 일어났던 1894년 11월 당시 동학농민군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증조부께서는 전투에 적극 참여하시면서 이들에게 보리쌀 등을 몰래 전달하셨습니다. 특히 황룡사의 서낭당에 전 재산과도 같은 암소와 송아지를 한 마리씩 매어두고 오신 후 농민군에게 소 두 마리를 두고 왔으니 식량으로 사용하라는 말씀을 전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동학농민군을 도운 것이 관군에게 발각되어 고리산으로 피신하여 생활하셨습니다. 증조부님의 형수께서는 산에서 나물을 뜯는다는 핑계로 가족들을 한명 씩 고리산으로 보내 증조부께 식사를 배달해 주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생활하시던 중 밀고에 의해 형수님이 관가에 잡혀가게 되셨고, 갖은 고초를 당하시다 병을 얻어 일찍 돌아가시게 되셨습니다.



문) 조부님과 부친께서는 어떤 활동을 하셨습니까?


답) 조부께서는 한학에 조예가 깊어 명망 있는 분이셨습니다. 게다가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이었기 때문에 일본인들이 조부님을 회유하기 위해 당시 군북 2소의 초대면장으로 임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조부께서는 감투에 눈이 멀어 일제에 봉사하지는 않으셨고. 오히려 면 공금을 천도교 기금으로 보내 독립자금으로 사용하도록 하셨습니다. 이렇게 공금을 빼돌린 것이 발각되어 6개월 만에 면장에서 파직되셨고, 충주 형무소에서 8개월간 옥고를 겪으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이때 조부님이 걱정되어 옥살이 중 서른 두 번이나 면회를 가셨다고 합니다. 형무소에서 석방되신 이후에는 개명을 하신 뒤 방랑생활을 하시기도 하고 옥천에서 훈장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증조부님과 조부님의 뜻을 이어 천도교 옥천교구에서 공선원, 선전부장, 경리부장 등 여러 직을 맡으시며 독립운동에 앞장서셨습니다. 그러나 나라 안에서는 일본인들의 감시가 심해서 활동하기 어려워지시자, 천도교인 200여명을 농민개척단이라는 명목으로 인솔하여 만주로 가셔서 그곳에서 독립운동을 이어가기도 하셨습니다. 이후 해방되던 날 아버지께서 마을사람들을 이끌고 가장 먼저 앞산에 올라 만세삼창을 외치셨습니다. 저도 따라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해방 후에도 전북 익산시 함열읍의 천도교임시사무소에서 활동하시며 대구 달성공원의 수운선사 기념비 건립에 동참하시는 등 교세확장을 위해 힘쓰셨습니다.



문) 증조부님이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신 것에 대해 어느 분께 전해 들으셨습니까?


답) 제 아버지께서 말씀 해주셨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해방이 되어 앞산에서 만세삼창을 외치셨던 그 날, 처음으로 증조부님이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신 것에 대해 말씀해 주셨슴니다. 일제 치하에서는 동학농민군에 참여한 것, 천도교인으로 활동하는 것이 알려지면 어떤 치도곤이 따를지 모르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말씀을 못하시다가 해방이 되자 그 한을 풀듯이 저에게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아버지께 여러 이야기를 전해 들어 기억하고 있다 보니 당신께서 돌아가실 때 저를 보고 ‘우리 가문을 지킬 사람은 너뿐이다. 앞으로 새로운 세상이 올 것이니 그렇게 알거라.’하고 말씀하셨던 것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문) 그분들의 구국활동으로 인해 집안에서 피해를 입으신 분들이 계신가요?


답)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증조부님의 형수님께서는 밀고로 인해 붙잡히셔서 고초를 당하시고 병을 얻어 그대로 돌아가시게 되셨습니다. 그리고 증조부께서 동학농민혁명, 조부님과 아버지께서 독립운동에 참여하셨기 때문에 항상 일본경찰들의 감시를 받으며 지냈습니다. 특히 아버지께서 만주에 다녀오신 이후에는 군북주재소에서 집 사랑채 벽에 순찰함을 설치했습니다. 그리고 순찰의 명목으로 일주일에 한번정도 긴 칼을 찬 일본인 순사가 셰퍼드나 불독 같은 큰 개를 몰고 찾아와서 아버지의 동향을 묻고, 집을 뒤져 찾아낸 여러 문서를 주재소로 가져가는 것을 자주 보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커다란 개가 두려워서 강변으로 도망쳐오곤 했습니다. 식량도 언제 빼앗길지 몰라 강변에 묻어두고 꺼내먹으며 생활했습니다.



문) 증조부님 때부터 대를 이어 천도교 활동을 하고 계신 것입니까?


답) 증조부께서 동학에 입도하셨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저도 전해들은 것이 없어 확실히 대답을 드리기가 어렵습니다. 조부께서는 면의 공금을 천도교에 보내셨을 정도니 입도하여 활동하신 것으로 생각되고, 아버지께서는 20살 무렵부터 근 65년 간 천도교 활동을 하셨습니다. 아버지와 한 방에서 잘 때면 매일 새벽 1시에 시천주조화정으로 시작하는 주문을 외우셨고, 마을에 누가 병이 나면 그 집으로 찾아가셔서 해 빌어주기도(기도해주기도)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천도교에서 활동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려울 때나 기쁜 일이 있을 때면 아버지가 하셨던 것처럼 시천주조화정 하고 외우곤 합니다.



문) 동학농민혁명을 기념하는 여러 기념물을 설립하셨는데, 어떤 것들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답) 2004년도에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된 후, 조상님의 참여사실과 그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 후세에 전달해주기 위해 가족묘 조상전에 동학농민혁명참여비와 동학정을 세웠습니다. 완공된 이후 당시 천도교 교령이셨던 김동암 교령님과 동학농민혁명 연구자 분들이 다수 다녀가셨습니다.


  2009년에는 옥천군 군북면 증약리에 갑오년동학농민혁명전적비를 세웠습니다. 옥천 증약의 동학농민군은 주력부대가 우금티 전투를 치르던 당시 활발하게 활동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일본군은 증약의 농민군들을 견제하기 위해 군대를 분산해야했습니다. 결국 증약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은 일본군과 관군 연합군을 상대로 큰 피해를 입고 후퇴하고 말았지만, 우금티 전투에 참여할 일본군을 유인하여 힘을 약화시키는데 일조한 것이지요. 증조부께서는 바로 이 증약 지역의 농민군들을 위해 식량으로서 소 두 마리를 지원하셨던 것입니다. 전적비는 이 전투를 재조명하고 역사로서 보존하기 위해 2009년에 옥천군향토사학회 주관으로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가장 최근인 2013년에는 청산면 한곡리 문바위 뒤편에 동학농민혁명유적비를 세우고 공원을 조성하였습니다.

  청산면 한곡리는 재기포 당시 동학의 2대 교주인 최시형이 기포령을 내린 곳입니다. 이곳의 문바위는 당시 수천 명의 동학농민군이 모여들어 ‘새서울’이라 불렸던 곳이며, 농민군들을 훈련시키기도 했던 장소라고 합니다. 문바위를 살펴보면 당시 목숨을 건 투쟁을 결의하였던 동학농민군 지도자들이 자신 이름을 음각해놓은 흔적이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있어 시대를 넘어 그들의 결의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정신을 이어받고 선양하고자 옥천군의 지원을 받아 이곳에 폭4m, 높이7m 규모의 동학농민혁명유적비를 세우고 정자를 설치하여 소박하게 공원을 조성하게 되었습니다.



문) 증조부님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신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답) 조선말에는 삼정의 문란 등 부정부패로 인해 피폐해진 민심, 열강의 침략으로 국운이 매우 위태로웠습니다. 이런 시기에 고통 받던 모든 백성들을 대변하여 악습을 없애고 나라를 개혁하려 나서셨던데 후손으로서 매우 자랑스러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미약하게나마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선양하고 이어나가는데 노력하고자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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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겨울 6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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