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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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가을 17호
사람, 다시 하늘이 되다

  사람, 다시 하늘이 되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 고광헌



  갑오동학농민혁명(이하 혁명)이 깃발을 올린 지 1백20년이 됐다. 육십갑자(甲子) 긴 세월이 우리 앞에 두 번씩이나 찾아왔다. 많은 이들의 언명이 있었다. 혁명은 기억할 때에만 자존감을 드러내고, 기억은 정신이 오늘의 삶에서 재현될 때에만 미래의 좌표가 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에서 혁명은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 참담하게도 공동체의 삶은 제도 민주주의마저 감당 못하고 허덕이는 처지다. 혁명의 기억은 쪼그라들어 오늘도 호남과 충청 일부에 고립돼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1백20년 전의 농민은 오늘 비정규 노동자로, 88만원 세대로, OECD 최악의 노인 빈곤국가로 얼굴이 바뀌어 새로운 내정혁신의 깃발을 올려야 하는 처지에 몰리고 있다.


  “사람이 하늘이다.”


  이 불온하기 짝이 없는 전복의 선언은 서세점동기의 시대정신을 관통하는 선구적 ‘근대어’이자 부패한 내정과 외세라는 거악에 맞선 ‘인권선언문’이었다. 그런데, 2주갑을 맞은 지금 그 정신은 관련 기관과 유족단체들 안에서만 부산하다. 우리들의 의식 안에서 혁명농민들의 희망은 여전히 미복권 상태에 있는 것이다.


  농민은 유생 의병과 똑같이 부패한 내정 혁파와 주권수호를 위해 외세에 맞섰으나, 계급의 벽은 외세의 기관총 세례보다 더 서럽고 잔인했다. 상놈이어서 잊혀 져야 했고, 양반이어서 추모의 대상이었다. 상놈은 두고두고 반란의 낙인을 새겨야 했고, 양반은 대대로 충정의 옷을 입혔다. 조선 농민군은 조-왜연합군에 맞서 30여 만 명이 목숨을 잃고도 1세기 이상을 ‘반란’과 ‘반노’의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니 지난 1백 20년 동안 우리들의 의식 역시 꼼짝없이 봉건 유전자의 사슬에 매여 있었던 셈이다. 우리는 그들이 끝끝내 바라던 ‘하늘’을 여태껏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닌가.


  동학농민혁명 같은 세계사적 자랑거리마저도 국가 차원에서 내놓고 기리기 시작한 게 불과 10여 년 전이다. 그마저도 1백 년 넘게 그 불온함이 충분히 마모된 시간을 보내고서야 가능했다. 그러고도 지금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는 압도적인 망각의 풍경은 심상치 않다. 민주주의의 역진 아래서 펼쳐지고 있는 작금의 수구적 드라이브는 갈수록 혁명의 온전한 기억이 들어설 공간을 좁히고 있다.


  변화는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지역에서 만들어 내야 한다. 민주적 지역이 전체를 변화시킬 수 있는 진보적 부분의 역할을 하면 된다. 혁명으로부터 역사적 정당성을 세우고 영웅들의 전설을 찾아 기억할 수 있도록 하자. 동학농민혁명을 기념하는 모든 사업은 전국화 세계화 미래화에 두고 실천하자. 아무리 훌륭한 과거라도 현재에 거주하지 않으면 비천해지거나 강자의 노리개가 될 수 있다. 영웅의 행적은 현재의 삶 속에 뿌리내려야 한다. 각종 사료와 유물을 모아 분석하고 논리화할 수 있는 학술적 차원의 사업을 대대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아직도 이 땅 곳곳에는 농민혁명과 관련해 조상들이 남긴 각종 문서와 유물들이 남아 있다.


  농민혁명은 조선 지배 권력에 대한 항쟁이면서, 일본과 청국이 개입한 국제적 갈등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일본과 중국에 수많은 자료들이 쌓여있다. 1백20주년과 기념공원 설립을 계기삼아 적극적인 사료 수집을 해야 한다. 이들 나라에 문헌전공자들을 파견해 해당 정부의 공식기록에서부터 파견 군인과 외교관들의 공식 비공식 보고문서, 신문과 방송 잡지의 기사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료를 모아야 한다. 이를 위해 정부와 자치단체는 충분한 예산지원을 해야 할 것이다. 시민사회는 해당 지역 국회의원과 시장 군수 지역정치인들이 사업에 적극 참여하도록 촉구해야 한다. 정치인들이 선거에서 기억의 정치를 위한 공약을 하고 당선 뒤에는 반드시 실행에 옮기도록 공론을 형성해야 한다.


  농민혁명과 관련한 전문 연구자들을 집중 지원하고 발굴해 학술적 업적을 두텁게 쌓도록 하는 일도 늦춰서는 안 된다. 혁명 2주갑이지만 우리 학계의 학문적 열정은 크게 부족한 실정이다. 물론 오랫동안 민란 혹은 반역으로 배척 받아온 사실에서 보듯 우리의 연구 환경은 전문연구자들에게 학문적 열정을 쏟아 붓도록 유인할 처지가 되지 못했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적극적 활동을 이어가야 한다.


  전국화와 세계화, 미래화는 새로운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소통의 확장을 통한 기억의 힘을 재배치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학교 교육과정에서 혁명의 역사를 배우고 공유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마침 우리 재단이 전북도교육위원회와 공동으로 보조교과서 발행에 나섰다. 교과서가 나오면 전북지역 초중등학교 학생들부터 배우기 시작해 전국으로 확산시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전국 13개 시도에서 진보적인 교육감들이 교육행정을 이끌어 가고 있는 현실도 이 일을 추진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독일과 폴란드, 프랑스는 홀로코스트 만행을 저지른 히틀러와 나치의 범죄를 심판하고 기억하기 위해 역사편찬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리고 이 역사편찬위원회가 추진한 중요사업 가운데 하나가 전쟁범죄를 기억하고 애도하는 공동교과서를 만드는 일이었다. 오직 기억하는 것만이 또 다른 범죄와 불행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엥겔라 마르겔 독일 총리는 “우리는 나치의 각종 범죄와 2차 대전의 희생자들, 그리고 무엇보다 홀로코스트에 대해 영원히 책임을 져야 한다”며 “우리는 인종차별이나 반유대주의가 발붙이지 못하도록 개인이 용기를 갖고 기여해야 한다는 점을 대대손손 분명히 가르쳐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전쟁하는 국가’로 바뀐 아베의 일본이 우경화로 치닫는 현실이기는 하지만, 한국 일본 중국도 농민혁명을 비롯한 동아시아 역사 전반을 공동교과서에 새겨 세 나라 청소년들이 배울 수 있어야 한다. 농민혁명이 내세운 자유와 평등의 정신은 오직 미래 속에 거주할 청소년들에게 내면화될 때에만 역사투쟁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혁명을 기념하는 공원 조성사업 역시 화석화한 정신이 역사의 거푸집을 뚫고 희망의 미래 속으로 이주하는 사업이다. 그런 만큼 기념하고 조형하는 모든 것들은 기억의 현재화에 복속돼야 한다. ‘대물’ 지향은 사양이다. 크고 웅장하기만 한 구조물은 미래까지 지배하려는 폭력일 수 있다. 과시적인 대형화는 당대 권력의 자화자찬일지는 몰라도, 기억함으로서 미래를 찾아가는 일과는 거리가 멀다. 무엇보다도 국가 기념공원은 참혹했던 역사의 슬픔과 상처를 애도하고 기억하는 상징성을 품어야 한다. 건물 하나하나에서부터 풀 한포기에 이르기까지 기품과 절제미가 드러나는 작품이어야 한다. 외장의 화려함이 아니라 기억의 힘을 끌어내는 공간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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