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발행처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56149)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동학로 742

TEL. 063-530-9400 FAX. 063-538-2893

E-mail. 1894@1894.or.kr

COPYRIGHT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FOUNDATION.

ALL RIGHTS RESERVED

목차열기
2011년 가을 5호
광대 출신의 고창 농민군 지도자 홍낙관

  광대 출신의 고창 농민군 지도자 홍낙관


동국대 연구교수

조재곤



  손화중 포와 홍낙관의 천민부대


  홍낙관(洪樂寬[觀] ; 1850 ~ ?)은 남양 홍씨이자 원래는 서울 태생이지만 동섕 계관과 동관을 데리고 고창읍 화산리로 이주하여 살았다. 광대(재인;才人) 출신의 고창의 대표적인 동학농민군 지도자로 스스로 대성(大成), 수접주(首接主)라 칭하였고 1894년 1월 고부 백산봉기에 다수의 천민부대를 이끌고 참여하였다. 그는 전봉준. 김개남과 함께 농민군 3대 지도자로 평가되는 손화중 포의 가장 선봉이자 주요 지도자로 무장(茂長)봉기와 이후 집강소 활동에 참여하였다. 정부측 기록에도 홍낙관을 '동학거괴(東學巨魁)'로 표현하고 있다.


  당시 손화중 부대 내에는 천민들이 다수 참여하였다. 매천 황현의 『오하기문(梧下記聞』에 따르면,

  "손화중은 전라우도 지방의 백정, 재인, 역부, 대장장이, 승려 등 평상시 가장 천한 무리들을 모아 별도로 하나의 접(接)을 만들었는데, 이들은 사납고 악독하기가 이를 데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했다."

  "지난날 화중은 도내의 광대를 뽑아 따로 한 부대를 만들었는데 홍낙관이 이들을 지휘하였다. 낙관은 고창의 광대인데 화중과 가깝게 지냈다. 그 부하 수천명은 걸음이 빠르고 사기가 높았으므로 화중은 봉준, 개남과 더불어 세력이 대등하였자만 그 무리들 중에서 가장 강하였다."

  고 기록되어 있다. 이런 천민부대를 이끈 사람이 바로 홍낙관이었다. 이들 부대에는 홍낙관이 인도하여 천민부대의 기포장으로 고창 읍내에서 활약하던 김수병(金琇炳) 등이 있었으며, 흥덕에서 활동하다 체포 처형된 농민군 접주 김도순(金道順)도 광대(재인) 출신이었다.



  2차 봉기 이후의 활동과 서울로의 압송


  그러나 11월 공주 우금치전투에서 패배한 후에도 홍낙관은 흥덕두령 고영숙(高永叔) 부대와 함께 나주, 장성까지 휩쓰는 등 대단한 활약을 보였다. 그 당시 정부측 자료에 따르면 흥덕과 고창의 도인 1천여 명이 풍악을 움리며 창과 포를 손에 들고 행군하여 나주와 흥덕의 대접주에게 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홍낙관은 손화중, 최경선, 오중문 등과 함께 나주에서 전투를 전개하였고, 또한 각 포의 흩어진 동료들을 수습하여 장성의 황룡, 나주의 북창 등지에 모여 기세를 크게 떨쳤다. 이들은 11월 27일 광주로 나왔고 12월 1일 농민군 부대를 해체시켰다. 이후 대부분의 농민군은 각지로 흩어졌고 관군과 일본군 연합부대에 의해 이들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이 진행되었다.


  그러던 중 홍낙관은 12월 9일 고창의 임리에서 교장(敎長) 홍선경(洪善敬)과 민보군에게 체포되어 진중에 수감되었고, 이어 11일에는 손화중도 고부군 고안고면 수강산 산당에서 체포되었다. 그와 손화중은 함평을 거쳐 나주로 압송되었다. 이때 체포된 농민군 94명의 명단이 보고되었고 이들 중 73명은 12월 30일 일본 군영에서 총살되었다. 그러나 홍낙관은 이때 살해되지 않고 함평을 거쳐 1895년 1월 4일 나주로 보내진 후 일본군 대대장에게 압송되었고 다시 전봉준, 손화중, 김덕명 등과 함께 서울의 일본영사관으로 호송되어 심문을 받았다. 이들의 이름은 『오사카마이니치신문(大阪每日新聞)』 1895년 3월 2일자에도 기재되어 있다.



  장 100대, 3천리 유형과 영학당 참여


  당시 취조기록 내용에 따르면 그는 "앞뒤로 진술한 바가 서로 모순되며 하나같이 사실을 속이고 자백하지 않아 결정하기 어려웠고 실상을 따로 조사하여 보고할 필요가 있다."고 되어 있다. 홍낙관의 광대 기질이 극단적 상황에서 발현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다시 법무아문 산하 권설재판소로 보내져 심문을 받았다. 법무아문 대신 서광범이 주도한 판결선고서에 의하면 체포 당시 그의 나이는 46세로 직업은 농업이며 죄명은 고창지방의 '비도(匪徒)'로 농민군을 지휘하여 군기(軍器)를 약탈하고 돈과 곡식을 겁탈하여 정부와 민간에 크게 소요하여 지방안녕을 해쳤다는 것이었다.


  그는 다행히 처형을 면하고 『대전회통(大典會通』 추단조(推斷條)에 의거하여 그해 3월 장(杖) 100대를 맞고 3천리 유배형에 처해졌다. 그가 언제 풀려났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후 1899년 동생 홍계관과 더불어 영학당(英學黨) 운동(흥덕민란)에도 '거괴(巨魁)'로 적극 가담하였던 사실이 확인된다. 그러나 이때 계관은 체포되었고, 홍낙관의 이후 행적은 알려지지 않는다. 



정기구독 신청

발행처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56149)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동학로 742

TEL. 063-530-9400 FAX. 063-538-2893

E-mail. 1894@1894.or.kr

COPYRIGHT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FOUNDATION.

ALL RIGHTS RESERVED

2011년 가을 5호
목차
目次 cont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