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부농민봉기
혁명의 단초는 전라도 고부 땅에서 마련되었다. 고부는 큰 고장이었다. 지금이야 정읍의 한 면에 불과하지만, 1894년 당시에는 드넓은 배들평야(이평)에서 나오는 쌀과 함께 줄포, 염포 등 주변 포구에서 들어오는 물산이 집합했던 풍요로운 곳이었다. 그래서 빼앗아 갈 것도, 쥐어짤 것도 많았던 곳 고부…. 하지만 2011년 만석보터와 배들평야는 참으로 한가롭고 평화롭기만 하다. 117년 전, 뭔가 일어날 듯한 '필연'의 분위기 속에서 결국 혁명의 첫 단추를 과감히 풀어헤쳤던 역동적인 혁명의 발원지, 고부. 혁명의 전초전이었던 고부농민봉기를 뒤쫓아본다.
(1) 조병갑의 학정
1892년 4월 조병갑은 알토란 같은 이곳 고부에 군수로 부임한다. 그러나 부임하자마자 조병갑의 학정은 시작된다. 부모에 대한 불효와 형제에 대한 불화, 남녀의 음행을 죄목으로 부호들의 재산을 빼앗았고. 고부 옆 태인군수로 있었던 아버지의 영세불망비를 세운다는 명목으로 돈을 거둬들이고, 무고한 사람을 잡아 가둔 후 돈을 받고 풀어주었다. 그리고 농민들이 이미 정읍천에 만들어 놓고 잘 쓰고 있던 보(洑, 논에 물을 대기 위하여 하천에 둑을 쌓고 물을 가둔 일종의 저수지) 아래 정읍천과 태인천이 만나는 지점에 새 만석보를 쌓게 하였다. 그리고 만석보를 만드는 데에 남의 묘에 있던 거목을 베어다 쓰고, 품삯도 없이 사람들을 부리고, 거기에 애초 첫해는 수세를 받지 않겠다던 악속을 깨고 수세를 거둬들여 농민들의 원성이 치솟았다. 1893년 11, 12월 농민들은 조병갑에게 수세감면을 진정한다. 이때 그 진정서를 작성한 사람이 바로 전봉준이다. 그러나 이들은 난민(亂民)으로 지목받아 옥에 갇히거나 관아에서 내쫓기고 말았다.
여행정보
▷ 탐방순서 & 거리
만석보터 ― 16.6km → 동학혁명모의탑 ― 13.8km → 말목장터 ― 10km → 고부관아터
▷ 가는 길
만석보터: 정읍IC(호남고속국도) → 705번 지방도 → 말목장터 → 710번 지방도 방향 우회전 → 만석보터
동학혁명모의탑, 사발통문작성지, 무명동학농민군위령탑: 만석보터 → 710번 지방도 → 말목장터(이평면사무소) → 운학삼거리 좌회전 29번 국도 → 고부삼거리 → 입석삼거리 우회전 → 동학혁명모의탑
말목장터: 동학혁명모의탑 → 입석삼거리 좌회전 → 29번 국도 부안방향 → 운학삼거리 우회전 → 710번 지방도 → 말목장터
고부관아터: 말목장터 → 710번 지방도 → 운학삼거리 좌회전 → 29번 국도 정읍방향 → 고부관아터
▷ 주변 연계관광지
정읍: 내장산, 내장사, 옥정호수변공원, 김동수가옥, 피향정
◆ 만석보터
만석보터 주변 배들평야는 지평선을 볼 수 있을 만큼 너른 들이다. 특별한 문화재나 볼거리 하나 없는 호남지역 어디에서나 어렵잖게 볼 수 있는 조용한 들판이지만, 만석보터는 동학농민혁명의 계기를 만든 곳으로서 답사와 역사기행에 있어서 그 어떤 곳보다 큰 매력을 가진 곳이다.
또한 조용하고 풍요롭고 평화롭기만 한 지금의 분위기와 달리 117년 전, 당시의 치열함을 떠올려 보면서 색다른 감흥을 느낄 수 있으며 서해에 가까운 곳이니, 일몰 즈음에 찾아 자기 키보다 훨씬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를 물끄러미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농민들은 이곳에서 하늘이 준 생업을 이어갔고, 지금도 그 과정은 진행 중이다.
(2) 이미 준비되었던 혁명
고부농민들이 조병갑에게 수세감면을 요구할 그 즈음, 혁명은 이미 준비되고 있었다. 1893년 11월 전봉준을 비롯한 송두호, 정종혁, 송대화 등 20명은 죽산마을(지금의 고부면 신중리 주산마을) 송두호 집에 모여 사발통문을 작성하고 거사를 계획한다. 각 마을의 이(里)집강에게 보내는 이 통문은 '조병갑의 목을 베고 서울로 진격하자'는 내용이 담겨 있다.
(3) 혁명의 불을 당기다
거사를 준비하던 지도부는 사발통문을 작성한 그달 말(1893년 11월 30일) 조병갑이 익산군수로 발령되는 바람에 잠시 상황을 지켜봐야 했다. 그러나 양주 조씨이며 고종 초(1865년)에 영의정을 역임한 조두순의 서조카라고 알려진 조병갑이 중앙에 줄을 대고 갖은 수를 쓰자 조선정부가 조병갑을 고부군수로 재임명하는 조치를 내렸다. 농민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고, 전봉준은 농민들의 원성과 요구를 놓치지 않고 모아냈다. 드디어 동학농민혁명이 그 짧고도 긴 여정을 시작한 것이다. 1894년 1월 9일 저녁 전봉준 등 지도부가 사전에 준비한 풍물패들이 분위기를 선동하자 사람들은 말목장터 감나무 주위로 모여들었고 전봉준은 정부의 실정과 조병갑의 죄를 신랄하게 성토하였다.
◆ 동학농민혁명모의탑, 사발통문작성지
이곳 주산마을은 단순한 민란으로 평가받았던 고부농민봉기가 전봉준 등 혁명 주도세력의 준비와 다짐 아래 계획적으로 발생하였음을 증명하는 중요한 유적지이다. 그리고 당시 송씨의 집성촌이기도 하다. 마을 촌로 사이에서 만석보 수세에 관한 진정을 내는 일에 앞장섰던 전봉준의 아버지(전창혁)가 매를 맞고 쫓겨나자 전봉준은 이곳으로 모시고 왔고, 아버지가 죽자 이 근처에서 장사지냈고, 고부농민봉기 이후 반란의 근거지라는 이유로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는 등의 이야기가 전해온다.
모의탑에 도착하면, 대번에 "이게 뭐야?"라는 질문과 함께 실망과 혹은 원망까지 터져나올지 모르겠다. 그러나 동학농민혁명 문화탐방의 핵심은 볼거리가 아니라 그 내용과 사건, 줄거리가 중요함을 다시 한번 환기해야 한다.
마을 입구에 동학혁명모의탑이 서 있고, 마을길을 따라 내려가다가 첫 번째 좌측 골목으로 들어가면 사발통문을 작성했던 집이 있고, 마을회관 앞에는 이름 없이 쓰러졌던 무명 동학농민군을 위한 위령탑이 세워져 있다.
Tip. 고부봉기 주요일지
1892. 4. 26. 조병갑 고부군수로 임명
1893. 11. 사발통문 작성 및 거사 계획
11. 30. 조병갑 익산군수 발령
12. 고부군민, 전라감영에 수세감면 호소
1894. 1. 9. 조병갑 고부군수 재부임
1. 10. 고부봉기 (말목장터 집결, 고부관아 점령, 만석보 파괴)
1. 17. 말목장터에 진을 침
1. 25. 백산으로 이동
◆ 말목장터
영광스런 혁명의 첫 시발점이 바로 이곳 말목장터이다. 여느 장터가 그렇듯, 말목장터 역시 주변의 생산물과 유동인구가 모이기 좋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말목장터는 북으로 부안, 남으로 정읍, 동으로는 태인으로 통하는 목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지금도 이평면사무소가 소재한다. 지금은 장터의 분위기를 느끼기 힘들 만큼 고요하다 못해 적막하다. 그나마 "녹두식당", "청포다방", "동학식육점", "말목영농조합" 등 빛바랜 간판과 상호가 당시 기억의 끄트머리를 놓치지 않고 붙잡고 있다.
다방 옆 감나무가 있던 공터에는 동네 어르신들이 도란도란 세상 돌아가는 얘기에 침이 마르신다. 선거를 맞아 때론 자기의 생각과 맞지 않을 때에는 목에 핏대 세우면서 진지하게 토론도 하나, 결국 화제는 두고 있는 내기 장기와 오늘 저녁 소주 한 잔은 누가 살 거냐는 것으로 돌아간다. 그날 전봉준의 연설을 가장 가까이에서 들었을 감나무는 2003년 태풍 '매미'에 쓰러져 지금은 황토현에 있는 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 보존처리한 상태로 전시되어 있고, 그 자리에 새 감나무 한 그루가 심어져 있다.
Tip. 왜 '사발'통문이죠? 그리고 내용은 뭐죠?
통문에 고부농민봉기를 계획하고 뜻을 함께한 동지들의 이름을 써넣었는데, 사발 주위에 둥그렇게 배열해 넣어 주모자가 누군지 모르게 하고, 연대책임을 강조하는 통문이라 '사발통문'이란 이름을 붙인 것이다.
1893년 11월 죽산마을 송두호 집에서 작성된 사발통문은 1968년 발견되었는데 한때 독립기념관에 보관되어 있었으며 지금은 사발통문 작성자의 후손이 보관하고 있다. 이 사발통문은 진위에 대한 논란이 있었으나 종이가 당시의 것으로 고증되었다.
통문의 처음에는 작성 날짜(계사 11월 0일)와 서명자 이름이 둥근 모양으로 나열되어 있고, "각리이집강좌하(各里里執綱座下)"라는 글귀 아래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 우와 같이 격문을 사방에 날래 전하니 여론이 비등하였다. 매일 난망(亂亡)을 구가하던 민중들은 곳곳에 모여서 말하되 "났네 났어, 난리가 났어" "에이 참 잘 되얐지, 그냥 이대로 지내서야 백성 한 사람이 남아 있겠나" 하며 기일이 오기를 기다리더라.
이때에 도인들은 선후책을 토의 결정하기 위하여 고부 서부면 죽산리 송두호 집에 도소를 정하고 매일 운집하여 차서(次序)를 결정하니 그 결의된 내용은 좌와 같다.
1. 고부성을 격파하고 군수 조병갑을 효수할 것.
2. 군기창과 화약고를 점령할 것.
3. 군수에게 아부하여 인민을 갈취한 탐관오리를 쳐 징계할 것.
4. 전주 감영을 함락하고 서울로 곧바로 올라갈 것.
우와 같이 결의가 되고 따라서 군락에 능하고 모든 일에 민활한 영도자가 될 장(將)… 」
통문의 끝장이 없어져 마지막까지 그 내용을 알 수 없다. 둘째 장의 첫 마디는 과연 무엇이었을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4) 가자! 고부관아로
1월 10일 새벽 고부관아로 들이친 농민군. 그러나 고부군수 조병갑은 이미 전주로 달아나고 없었다. 고부관아를 접수한 농민군은 양곡을 풀고, 억울하게 옥살이 하는 자들을 풀어주는 등 조병갑의 학정을 바로잡고 무기를 나누어 무장한다.
고부관아 점령과 함께 농민군의 몇 무리는 본격적인 봉기 준비작업에 들어간다. 일군은 조병갑 학정의 상징인 새 만석보를 부수러 가고, 일부는 백산으로 가 산성을 쌓는다.
◆ 고부관아터
당시 고부관아가 있던 곳에 지금은 고부초등학교가 들어서 있어 관아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다만 고부초등학교 옆 향교와 경내에 있는 수백 년 수령의 은행나무, 향교 대성전으로 올라가는 경사 높은 돌계단만이 당시 고부관아의 권위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그 어느 곳처럼 시간을 거슬러 오르고, 공간을 확장하여야 하는 역사적 상상력이 요구되는 곳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