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주경노(朱京老)의 증손자(曾孫子) 주영채
이번 호 유족 인터뷰에는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주경노(朱京老, 1830∼1894)의 증손자(曾孫子) 주영채(천도교 교명 : 주선원) 동학농민혁명유족회 회장을 모셨다. 참여자 주경노는 1891년경 동학농민혁명 당시 전라도 무안(務安)을 거점으로 활동했던 배상옥(裵相玉 : 1862∼1894) 대접주에게 1891년경 「동경대전(東經大全)」 필사본을 받아 탐독(耽讀) 후 동학(東學)에 입도, 혁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증손자 주영채는 1994년 봄 유족회 창립 때부터 동학농민혁명 선양사업에 적극 참여하였고, 현재 전국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유족들의 모임인 (사)동학농민혁명유족회 회장을 맡고 있다. 한편, 2000년부터 2019년까지 천도교 중앙총부 종무원장, 종의원의장, 감사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일시 2024.10.15.(화). 14:00 ~
장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경운동 (사)동학농민혁명유족회 사무실(수운회관 701호)
문) 회장님 반갑습니다. 전국 각 지역에서 펼쳐지는 동학농민혁명 정신 선양사업 행사장에서 주로 뵙는데, 오늘은 유족인터뷰를 위해 유족회 사무실에서 뵈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회장님, 먼저 『녹두꽃』 독자 여러분께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답) 반갑습니다. 주영채입니다. 전국에 계신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유족 여러분, 그리고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선양하기 위해 애쓰시는 전국의 기념단체 임원진과 회원 여러분! 불초한 제가 2020년부터 2024년 지금까지 만 4년 동안 전국 동학농민혁명유족회 회장의 직임을 맡아오면서, 민족자주의 핏물로 아로새겨진 참여자 선조들의 영령 앞에 어떻게 하면 부끄럽지 않은 후손이 될 것인지를 늘 가슴에 새기며 임해왔습니다. 그 사이 유족회 창립 30주년을 맞아서 『동학농민군 명예회복운동 30년사』를 발행하여 유족회 창립 당시 선배님들의 간난신고를 되돌아보고, 농민군들의 진정한 명예회복은 참여자들의 독립유공자 서훈에 있음을 절감하고 보훈처와 국회를 수없이 왕래하며 매진하고 있습니다. 중이 제 머리를 못 깎는다는 속담처럼 우리 유족들을 위해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서훈에 앞장 서주신 기념재단 임직원 여러분과 전국의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회장단에게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회장이 되던 해에 『녹두꽃』 편집진의 유족 인터뷰 요청에 제가 회원님들이 먼저라고 미루었는데 이번에는 인터뷰에 응하게 되었습니다.
문) 증조부께서 고령(高齡)에 막냇동생과 함께 동학(東學)에 입도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증조부께서 동학교단에 입교하신 것과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시게 된 배경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답) 예, 그렇습니다. 증조부님은 족보상 1830년 출생입니다. 확인된 바로는 증조부께서 1891년경 당시 전라도 서남해안 지역에서 세력을 떨치던 동학 교단의 배상옥 대접주로부터 『동경대전(東經大全)』 필사본을 받아 탐독하신 후 동학에 입도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입도 당시 61세였습니다. 요즘에야 61세를 고령(高齡)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그 당시 61세는 노령(老齡)에 속하지요. 그때 서른여섯 살이던 막냇동생 주영신(朱永信)도 함께 입도하였습니다. 막냇동생은 1855년 출생으로 족보상의 함자는 기달(奇達)입니다. 입도한 후 큰 형님과 함께 뱃길로 영산강 하구의 무안 몽탄(夢灘)을 거쳐 청계면(淸溪面)까지 약 15kⅿ 떨어진 곳을 자주 왕래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도 적극 참여하였는데, 1894년 11월(음력) 고막포 전투에 두 분이 참전하셨습니다.
문) 증조부님과 조부님은 물론 회장님 아버님께서도 동학에 몸담으셨지요? 그리고 회장님께서도 천도교중앙총부 종무원장 등을 역임하셨습니다. 증조부님으로부터 지금까지 회장님 가계(家系)에서 동학을 떼놓을 수 없는데, 이점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답) 그렇습니다. 증조부님의 목숨으로부터 뿌리내린 동학사상은 조부모님, 부모님을 거쳐서 저까지 4대째 이어왔습니다. 어떠한 혁명이든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사상을 굳건한 믿음으로 가슴 깊이 새기고 있습니다.

순국 제129주기 전봉준 장군 추모제에서 추모사하는 주영채 회장
문) 회장님, 증조부께서는 당시 신분이 양반이었지요? 전라도 나주 영산강의 샛강이 있는 죽포면(竹浦面)의 면장(面長)을 지내셨다고 하는데, 증조부님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십시오.
답) 증조부님은 전라도 나주 영산강의 샛강이 있는 죽포면장(竹浦面長 : 현재 다시죽산 석관정 근처)을 지내셨다고 합니다. 지역의 주민들에게 늘 존경받았는데 그 이유가 돌절구통을 옆구리에 끼고 샛강을 뛰어넘을 만큼 기골(氣骨)이 장대하였다는 점 때문이 아니라 61세라는 노령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하늘처럼 섬기는 새로운 세상을 추구한 동학사상의 차원 높은 민권사상을 몸소 실천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문) 회장님 집안 대대로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기꺼이 의를 들고 일어나 희생된 분들이 많이 계신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이점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답) 네, 그렇습니다. 저의 증조부님은 임진왜란에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일본군과 수많은 전투를 지휘한 주몽룡(朱夢龍, 1561∼1633) 장군의 11대 직손(直孫)이십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주몽룡 장군은 임진왜란 때 전라도(현재 충청남도) 금산군수와 병마절도사를 역임하셨고, 경상도 진주에서 곽재우 홍의장군과 함께 흩어진 백성들을 모아 왜군을 물리친 의병장 강덕룡(姜德龍)·정기룡(鄭起龍)과 함께 영남 산간지대를 중심으로 일본군을 물리치기 위해 신출귀몰한 유격전을 펼쳐 경상도 백성들로부터 삼룡장군(三龍將軍)으로 불렸던 분입니다. 또한, 주경노 증조부님의 10대 조이신 주혁달(朱爀達) 이분도 정유재란 때 왜군들이 전라도 지역으로 침공하자 진주에서부터 전투를 계속하면서 전라도까지 넘어왔습니다. 이때부터 우리 집안이 호남에 정착한 것입니다. 신안주씨(新安朱氏) 족보와 『난중일기』 등에 이런 기록들이 확인됩니다.
문) 네, 증조부께서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척양척왜, 보국안민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동학과 갑오년 동학농민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신 가계의 내림이 있었군요?
답) 그렇지요. 제가 중학교 시절에 조부모님에게 늘 들었던 바에 의하면 동학농민혁명 참여하신 주경노 증조부님은 11대 선조이신 무열공(武烈公) 주몽룡(朱夢龍)께서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도 여러 차례 등장할 만큼 임진왜란 때 왜적을 물리친 공적이 아주 지대한 분이었다고 자랑스러워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주몽룡 이분 위패가 전라도 태인의 충렬사(忠烈祠)와 경상도 진주의 평천서원(平川書院), 의령(宜寧)의 충익사(忠翼祠)에 각각 배향되어 있습니다. 이런 가계의 전통에 대해 주경노 증조부께서 긍지와 자부심이 대단하셨다고 말씀하시곤 하셨습니다.
정남기 동학농민혁명유족회 상임고문과 주영채 동학농민혁명유족회 회장
문) 증조부께서는 64세가 되던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직접 전투에 참여하셨다가 전사하셨습니다. 증조부께서 막냇동생 주영신과 함께 참전하였다가 전사하신 전투가 고막포 전투였지요? 고막포는 갑오년 당시 무안군이었지만 지금은 함평군에 속한 곳으로 나주와 무안, 함평 접경(接境)이지요?
답) 그렇지요. 무안과 함평, 나주 등과 접경입니다. 1894년 11월(음력) 17일부터 21일 사이에 5만여 명의 동학농민군과 나주 수성군(守城軍)이 고막교 일대에서 접전합니다. 이때 동학농민군 총지휘자는 배상옥 대접주였습니다. 나주 수성군 지휘자는 나주목사 민종렬이었는데, 일본군 독립후비보병 대대장(미나미 고시로, 소좌)의 하수인으로 전락해서 자신의 집무실까지 내어 주고, 자기는 초토사 관직을 받아서 나주 수성군을 총동원하여 동학농민군 토벌에 나선 것입니다. 이 전투에 청암(靑庵) 주경노(朱京老) 저의 증조부님과 당시 39세였던 증조부님의 막냇동생 주영신(朱永信)도 참전합니다. 두 분은 고막포 똑다리를 넘어 나주 수다면(水多面, 현 다시면)의 진등(長嶝)에서 공방을 거듭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이곳에서 증조부님이 전사(戰死)하셨고, 막냇동생 주영신(朱永信)은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살아서 밤길을 타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문) 동학농민혁명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정치적 혼란 속에서 동학이라는 사교 집단의 난이라거나 전라도 고부 지방의 민란 등으로 왜곡되고 축소가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전라도 서남해안 지역에서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관심이 낮았다가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전후하여 함평과 무안 등지에 기념사업회가 창립되어 활동하면서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답) 그렇지요.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이전까지만 해도 서남해안 지역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관심이 낮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다가 특별법과 국가기념일이 제정된 이후 관심이 많이 높아져서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제가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유족 대표 자격으로 지난 2022년 여름 일본학자 나카츠카 아키라, 이노우에 가쓰오 교수 등과 나주군 다시면 진등고개 현장과 고막포 다리를 답사한 바 있습니다. 그때 현장 인근 지역의 90객 노인들이 전해 내려오는 이 지역의 회고담을 들려주었습니다. 나주목에서 내려온 일본군과 일본군 지휘를 받는 관군들이 맞은편 일명 자지고개를 넘어 진격하며 대포와 게틀링 기관총, 무라다 소총 등을 마구 쏘아대서 포탄과 총알이 비가 쏟아지듯 했답니다. 그래서 동학농민군의 시체가 논바닥에 즐비하게 쌓였다고 합니다. 일본군과 관군의 근대적 무기의 화력에 맥을 추지 못하고 후퇴하던 동학농민군이 고막포의 좁은 다리를 건너다가 영산강의 샛강으로 추락하여 강물 위로 흰옷을 입은 농민군들의 시체가 떠내려가는데 마치 흰 쌀뜨물처럼 흘러갔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래서 그 이듬해의 논농사가 농민군들의 시체와 핏물이 거름(비료)이 되어 크게 풍년이 들었다고 얘기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노인들은 산마루의 밭 가장자리 갈대밭 사이 돌무더기로 이루어진 작은 동산을 가리키면서 저곳이 동학농민군들의 시신을 대충 걷어 모아 돌로 덮어놓은 곳이라고도 말했습니다. 당시 고막포 전투가 일본군과 관군이 자행한 무지막지한 농민군에 대한 학살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늦었지만 가슴 아픈 역사의 장소를 명확하게 확인하여 추모의 장을 마련하는 등 조치가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문) 얘기를 조금 진전시키겠습니다. 증조부께서 고막포 전투에서 전사하신 후 집안은 아주 풍비박산이 났겠네요? 동학농민혁명이 끝난 후 집안 상황에 대해 들은 얘기가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답) 증조부께서 전사하신 후 집안 상황이야 불을 보듯 뻔하잖습니까? 1894년 당시 증조부님의 장남 주수일(朱水一)은 12세였고, 둘째는 6세였습니다. 집안 식구들이 모두 흩어졌고, 여섯 살이던 조부님 동생은 추위와 배고픔으로 굶어 죽어버렸답니다. 그래서 종증조부이신 주영신이 고아가 된 형님의 장남 주수일(朱水一)을 데리고 영산강 하구(河口) 쪽으로 피난하여 동강면의 달가메(오늘날의 동강면 장동리 월감부락) 구석진 강가에 숨어 살면서 풀과 갯조개로 가까스로 연명했답니다. 그러다가 1910년 한일병탄(韓日倂呑) 후 고향인 나주 다시면((多時面, 일제강점기 때 죽포면, 회진면, 수다면을 다시면으로 통합)으로 돌아와서 동학농민혁명 이전의 전답(田畓)들을 찾아 집안을 회복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천도교(天道敎)로 개명(改名)된 동학(東學)의 신앙생활도 다시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종증조부님이신 주영신의 아들들은 동학을 하면 또 언제 또 죽을지 모른다고 하며 모두가 손사래를 쳤다고 합니다. 그런데 유독 고아(孤兒)가 된 조카 주수일(朱水一)만이 숙부(叔父) 주영신(朱永信)의 명(命)에 순종하여 동학(東學, 天道敎)을 실행하였답니다. 그래서 종증조부님은 늘 이점을 가슴 아파하셔서 돌아가시기 전인 1903년에 21살의 조카 주수일을 혼인시켜 독립시켰다고 합니다.

■ 증조부 주경노(朱京老) 님의 묘소(전남 나주시 다시면 가운리 산 82-1)
문) 네, 지금 들어도 가슴이 미어집니다. 고막포 전투에서 전사한 증조부님 시신은 거두었는지요? 지금 어디에 모셔져 있는지요?
답) 을유년(1945) 8·15 광복이 되자 저의 부친(주학술, 朱學述)까지 장가를 들어 살림살이가 넉넉해지니까 저의 조부(주수일, 朱水一)께서는 젊은 아들에게 삽과 곡괭이 가마니 등을 챙겨서 당신의 부친 주경노(朱京老)의 유골(遺骨)을 수습하러 나섰다고 합니다. 주수일 조부님은 갑오년(甲午年) 당시 전투 현장이었던 진등고개(長嶝站)로 가서 생전의 주영신(朱永信) 종조부께서 지적해 주셨던 장소인 지금의 고막원 기차역 뒷편 밤산(일명栗山)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아득한 영감(靈感)으로 그 주변의 흙더미를 모두 휘저어서 몇 조각의 뼈를 수습하고 그곳의 흙 한 움큼과 함께 가마니에 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주시 다시면 가운리 선산(先山)으로 옮겨와, 안장(安葬)하였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1960년경 제가 참석한 자리에서 동학의 의례인 청수(淸水)를 모시고 주문(呪文)을 암송(暗誦)한 다음, 비석(碑石)을 세우고 글을 새겼습니다.
문) 몇 조각이나마 증조부님의 뼈를 수습해서 선산에 모실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회장님! 혹여 빠뜨린 얘기나 특별히 부연하고 싶은 말씀이 있는지요?
답) 네, 꼭 덧붙이고 싶은 얘기가 있습니다. 제 생각이지만, 동학농민혁명 전사자나 참여자의 유전자에는 432년 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나라를 위해서 목숨 바쳐 일어섰던 의병장과 의병들의 유전자가 다시 살아온 것이라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한 연유는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고경명 장군 12대 직계 후손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고광문·고광인·고광룡 3형제입니다. 그리고 전라도 무안군에서 동학농민혁명을 주도한 김응문·김효문·김자문 3형제도 임진왜란 때 의병장 김충수의 동생인 김덕수(金德秀) 의병장의 11대 후손임이 밝혀졌습니다. 또한 1986년 4월 서울대 자연과학대학 학생회장으로 ‘민족자주’를 외치며 분신한 김세진 열사의 고조부이신 김규일(1843-1894) 이분도 동학농민혁명 전투에 참여하셨다가 효수당한 지도자였습니다. 나아가 김규일 이분의 11대 선조이신 김응룡(1546-1597) 또한 임진왜란 때 전라관찰사 권율 장군의 행주산성 전투 때 행주치마 전술을 창안한 사람입니다. 앞서 말씀드렸습니다만 저의 증조부(주경노, 朱京老) 님의 11대 선조가 임진왜란 때 목숨을 초개같이 던지며 일어섰던 경상도 진주의 삼룡장군(三龍將軍) 중의 한 사람인 주몽룡 장군입니다. 이런 사실을 확인하게 되어 감개(感慨)가 무량(無量)합니다.
문) 네, 회장님. 꽃이 지고 난 그 상처 위에 열매가 맺힌다는 것이 자연의 이치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잘 살아갈 수 있는 것 또한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몸을 바친 조상님들이 계셨기 때문이라는 점을 다시금 되새기게 됩니다. 회장님 긴 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귀한 말씀 잘 정리해서 게재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